한국문화사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을 내면서

천문과 역, 관상과 수시, 그리고 지리

지식인들의 자연에 대한 사색과 전문적 자연 지식은 거의 모든 문명에서 그러하듯이 동아시아 문화에서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자연에 대한 사색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가 또는 유가 사상가들에 의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한 자연 전체에 대한 사색의 전통과 달리 우리들은 전문적인 자연 지식의 고전적 전통을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고전적 자연 지식을 다섯 개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즉, 관상(觀象), 수시(授時), 역(曆)과 역서(曆書), 지도와 지리지, 그리고 풍수지리이다. 물론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함과 동시에 책의 편제를 위해 편의상 나눈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생소한 범주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각각의 용어와 범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본다. 이는 하늘과 땅에 대한 사색과 전문적 지식들이 역사 속에 어떻게 존재하였는지, 그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늘에 관한 전문적 자연 지식은 크게 나누어 천문과 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정통 역사서인 『고려사』를 보면 「천문지」와 「역지」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천문과 역은 어떻게 다를까? 천문의 의미는 『주역』 「계사전」의 문구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위를 우러러보아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를 굽어보아 지리를 살펴서 모든 사물의 이치를 안다.”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늘이 상(象)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천문이란 ‘하늘의 상’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하늘의 상, 즉 하늘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이다. 이러한 천문 현상을 통해 인간 세상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이치를 알아낸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앞날을 예측하고, 사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천문’은 자연 대상물로서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현재 상태의 옳고 그름과 미래를 예측하는 징조로 여겨졌다.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천문은 오히려 ‘점성술’에 가까운 의미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천문 지식은 『사기』 「천관서(天官書)」에서 처음으로 체계화되었다. 관측 가능한 500여 개의 모든 별을 5관 분류 방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나아가 각 별자리들을 ‘천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정부 내의 부서와 관직을 인간 사회의 모든 것들에 빗대어 이름지었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자리들을 지상 세계의 사물들과 연관해 분류, 체계화한 것이다. 특정한 별자리들의 변화는 그것과 연결된 지상 세계의 사물들의 길흉과 미래의 예측 해석에 동원되었다. 고려시대의 『고려사』 「천문지」와 조선 초의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가 편찬한 『천문유초(天文類抄)」에 담긴 내용이 이러하였다.

천문과 달리 역은 전적으로 정량적이고 산술적인 전문적 지식이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역상(曆象)해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 준다.”는 문구에 역의 의미가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역상’이란 천체를 관측하고, 나아가 천체 운행의 데이터를 계산해서 천체 운행을 정확히 예측해 내는 등의 수리천문학을 말한다. 천문이 천체 현상의 관찰을 통해 길흉과 미래의 예측과 같은 다소 정성적인 사색을 펼치는 것이라면, 역은 천체의 변화, 특히, 운행 주기의 정량적 데이터 관측을 통해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역의 전문가들은 천체 현상이 갖는 정치적 의미나 길흉의 판단 같은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단지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주기를 관측하고 계산만 하면 되며, 그것을 이용해 일 년의 주기와 계절의 계산뿐 아니라 일식·월식 등의 천체 현상을 수학적으로 예측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역 전문가는 상당한 수준의 수학적 훈련을 받은 전문가이어야 하였다.

역은 천문과 함께 천명(天命)을 받은 제왕된 자가 즉위 후에 선정을 펼침에 앞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수행해야 하는 업무였다. 전국시대에 이미 ‘사분력(四分曆)’이라는 구체적인 역법이 성립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반포된 역은 한나라 때의 ‘태초력(太初曆)’(기원전 105)이었다. 이후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한시라도 역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천명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국가라면 어떠한 역이라도 반드시 있어야 하였다. 그래야 국가로서 또는 왕실로서 그 정당성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삼국시대까지 우리들은 중국의 역을 그대로 사용해 왔다. 적어도 역법을 독자적으로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국가 체제였는가만을 놓고 보면, 국제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사실 중국의 왕조와 국가에 비해 격이 떨어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시대부터는 중국과 다른 역법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완전하게 중국의 의존에서 벗어난 것은 조선 초기 『칠정산(七政算)』의 확립부터였다. 세종대에 『칠정산』이라는 역법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천문학에서의 독립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하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천문과 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활동의 차원에서 분류하면 ‘관상’과 ‘수시’로도 나눌 수 있다. 관상과 수시는 말 그대로 하늘의 현상을 관찰하는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시간을 정해 알려 주는 활동을 각각 말한다. 이는 『서경』의 「요전」과 「순전(舜典)」의 첫머리에서 각각 제시되었던 제왕학의 요체였다. 그것에 의하면, 순임금은 제위에 올라 무엇보다 앞서 가장 중요하게 추진하였던 사업이 ‘선기옥형’과 같은 과학 기구를 창제해서 천체 운행을 정밀하게 관측하는 일을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요임금은 ‘희화씨’ 등의 관원과 부서를 제도화하고 역법을 정비해서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순임금이 ‘관상’의 모범을 보였다면, 요임금은 ‘수시’의 모범을 보인 성군이었다.

결국 하늘에 대한 전문 지식인 천문과 역은 관상과 수시의 활동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꼭 이렇게 구분되는 것만도 아니 다. 소위 국립 천문대 격인 중국의 흠천감이나 우리의 관상감(또는 서운관으로 불렸다)에서 이루어진 천문학 분야의 업무는 크게 세 가지였다. 즉, 천문 관측 활동, 역법 계산과 역서의 편찬 활동, 그리고 시계의 운영과 시보(時報) 활동이 그것이다. 이것은 각각 관상, 역, 그리고 수시에 다름 아니다. 결국 천문과 역, 그리고 관상과 수시는 지식의 차원과 활동의 차원에서 구분되지만 상호 중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와 조선시대 과학을 담당하던 부서인 관상감의 업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천문학, 지리학, 그리고 명과학(命課學)이 그것이다. 명과학은 택일(擇日)과 같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일과 시간 등을 정확하게 선정하는 업무를 보는 영역이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산술적 계산에 의존할 뿐 하늘과 땅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명과학을 제외하면 관상감의 주요 영역은 하늘을 맡아보는 천문학, 땅을 맡아보는 지리학이었다. 그 중 천문학 분야는 관상감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치도 높았던 분야이다. 천문학 분야의 업무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천문, 측후(測候), 역수(曆數), 그리고 각루(刻漏)가 그것들이다. 천문이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에서 일어난 천문 현상을 통해 길흉과 미래를 예측하는 업무이다. 측후는 천문 현상의 관측 활동이다. 역수는 역법 계산과 역서의 편찬이다. 각루는 물시계의 운영과 시보 활동을 말한다. 이렇게 천문학 분야는 전통 사회에서 관상감이라는 확실한 부서와 맡은 바의 분명한 업무가 있을 정도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전문 분야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관상감의 전신인 서운관의 업무는 거의 전적으로 천문학 분야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관상감으로 개편되면서 명과학과 지리학이 부가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명과학과 지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형성되어 전문 분야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관상감의 지리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지리학과는 다소 달랐다. 거의 전적으로 풍수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풍수지리학이었으며, 주된 업무도 왕실의 무덤이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건물 터를 고르는 일이었다. 이는 풍수지리학이 전통 사회에서 땅에 대한 전문적 자연 지식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과학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풍수지리와 달리 4장에서 다루게 될 지리학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성과물로 말하면, ‘지리지(地理誌)’와 ‘지도(地圖)’를 제작하던 활동과 그 전문 지식을 말한다. 천문과 역이 왕조와 국가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분야였다면, 지리지와 지도는 다소 실용적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이미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지리지」가 포함되었고, 조선시대 초부터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는 등 지리지와 지도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 제작할 정도였다. 특히, 지리지는 농서(農書)와 의서(醫書)의 편찬과 같이 방대한 자료를 모아야 가능한 작업으로, 국가적인 차원의 국책 프로젝트로 진행되어 편찬되었다.

이렇게 지리지와 지도가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국책 과제로 진행되어 얻은 결과물이었지만, 그것을 전담하는 정부 내 상설적인 부서는 없었다. 지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행정 전문가가 주도해서 일종의 ‘태스크 포스’가 구성되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작업이 진행되었다. 방대한 자료의 수집에는 지방 관원들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새로이 측정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라면 풍수 전문가인 ‘상지관(相地官)’이 동원되어 실측을 하기도 하였다. 지도 제작 작업에는 도화서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완성이 된 지도와 지리지는 사사로이 소장할 수 없었으며, 정부 내에서만 보관되고 활용되어야 하였다. 사사로이 활용하거나 소장하면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해 엄중한 처벌을 받을 정도였다.

이 책은 하늘과 땅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고전적 사색과 그에 대한 지적인 활동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고전적 자 연 지식은 우리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자연 지식, 즉 과학과는 많이 달랐다. 그 내용도 물론 달랐지만 자연 인식 체계의 차원에서는 더욱 크게 달랐다. 또한, 사회적 존재 양상에서도 많이 달랐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은 여러 학문 지식들 중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대부분 사상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 등이었고, 자연에 대한 관심과 고찰은 부차적이었다. 그런 만큼 자연에 대한 논의도 지속적이거나 정합적이지도 못하였다. 요즘처럼 많은 학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논쟁적 주제들도 많지 않았으며, 있더라도 산발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현대의 자연 지식과 과학을 보는 잣대는 잠시 놓아두고 이 책을 읽길 바란다.

2007년 9월

서울대학교 교수

[필자] 문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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