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2. 삶을 규제한 틀

배우고 익힘

조선 초기 서울 기생들은 관습도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가무와 악기 연주 기술을 배웠다. 세종대에 그 교습에 관련된 여러 가지 규정이 정해지면서 틀이 잡혔는데, 이때부터 기생들은 2·3·4월과 8·9·10월의 6개월 동안은 네 개의 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관습도감에 나와 교습해야만 하였다. 추운 11·12·1월과 더운 5·6·7월의 6개월은 공식적인 교습이 없이 각자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날씨에 따른 교습의 효율성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생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조처이기도 하였다.26) 기생들의 생계를 국가에서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27)

따라서 기생의 처지에서 볼 때 교습 기간이 아닌 나머지 6개월 동안은 집에 머물며 개인적인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6개월의 교습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관습도감으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4일에 하루꼴로 나가면 되었다. 그래서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집에 머물며 연습을 하거나 생계를 위한 일에 종사할 수 있었다.

<연당의 여인>   
신윤복의 그림으로 연못 앞 툇마루에서 생황(笙簧)을 연습하며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기생을 그렸다.

관습도감에서 모든 기생들이 배워야 했던 것은 가곡(歌曲)과 당비파(唐琵琶)였다. 그 밖에도 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장고(杖鼓)·아쟁(牙箏)·해금(奚琴)·필률(觱篥)·대금(大琴)·소금(小琴) 등의 악기를 익혔다. 능하지 못한 자는 한 가지 악기만을 배웠고, 능한 자는 다른 악기도 겸해 익혔다고 한다. 가곡과 악기를 교습할 때는 각기 스승을 정하여 온전히 교수케 하였고, 교수하는 것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 스승도 함께 벌을 받았다. 그리고 관습도감의 제조(提調)가 때때로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능하지 못한 자는 벌주고, 그 정도가 심한 자는 도로 본역(本役)으로 내보내게 하였다. 아울러 재색이 없는 자도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 일정 수준을 유지케 하였다고 한다.28)

그 후 성종대에 관습도감은 몇 개의 음악을 관장하던 다른 관서와 함께 통합되어 장악원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서울 기생들은 장악원에 소속되었다. 장악원에서 이루어진 기생의 교습은 관습도감 시절과 거의 유사하였 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주요 지방에는 교방을 설치하여 기생을 교습시켰다. 지방에 따라서는 교방 대신에 기생을 꽃과 봄에 비유하여 백화원(百花院), 장춘원(藏春院), 어화원(語花院)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29) 조선 후기 읍지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통하여 교방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교방은 대개 효율적인 사신 접대를 위해 객사(客舍) 근처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교방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관둔전(官屯田)의 일종으로 기답(妓畓)을 두어 재정 기반으로 삼았다. 또한, 기생 수가 많은 고을에는 기생을 위한 공간인 기생청(妓生廳) 또는 기생방(妓生房)이라는 별도의 거주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였다.30)

<쌍검대무(雙劍對舞)>   
신윤복의 그림으로, 양반들의 모임에서 양손에 칼을 들고 세차게 돌면서 쌍검무(雙劍舞)를 추는 기생의 모습이다. 앉아서 관람하는 기생도 두 명이 보인다. 서울 기생은 장악원에서, 지방 기생은 교방에서 주로 가무를 익혔다.

교방의 교습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장악원의 교습 내용과 대동소이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목적 역시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31) 19세기 평안도 성천 읍지에는 군현에서 주로 교습 하는 악기로는 적(笛)·생(笙)·소(簫)·쟁(箏)·비파(琵琶)·금(琴)·가금(伽琴)·계금(稽琴), 가무로는 초무(初舞)·포구(抛毬)·향발(響鈸)·아박(牙拍)·무수(舞袖)·무동(舞童)·처용(處容)·여무(女舞)·검무(劍舞)·학무(鶴舞)·사자(獅子)·발도가(撥棹歌)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32) 그 고을의 기생이 담당하였던 것이 대개 이 범주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방 군현의 교방은 서울에서 국가 차원의 연회가 있을 때에 재능이 뛰어난 기생을 제공하는 공급원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특히 장악원의 기생이 혁파된 뒤로는 오로지 지방의 기생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그 역할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재능을 익히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뛰어난 기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33)

[필자] 우인수
26)『세종실록』 권101, 세종 25년 9월 정묘.
27)우인수, 앞의 글, 2007 참조.
28)『세종실록』 권101, 세종 25년 9월 정묘.
29)이규리, 앞의 글, 174쪽.
30)이규리, 앞의 글, 175∼178쪽.
31)『성종실록』 권196, 성종 17년 10월 무술.
32)『관서읍지(關西邑誌)』(1895년) 제10책, 성천지(成川誌), 음악.
33)『명종실록』 권8, 명종 3년 5월 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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