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4. 사신의 접대와 군인의 위무

사신 맞이 접대

사신들을 맞이하여 여는 잔치에서 가무로 여흥을 돋우거나 나아가 성적으로 접대하는 일은 기생의 주된 임무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사신은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신, 중앙과 지방을 공무로 오가는 사신을 모두 포함한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오늘날 관아에서 창기를 길러 사객(使客)이 오면 얼굴을 단장하고 옷차림을 화사하게 하여 그를 접대하게 하는데, 술을 따라 권하고 악곡을 연주하여 흥을 돋우니 이름하여 방기(房妓)라 한다.”라 하여 사객의 접대를 위해 군현에 기생을 두었음을 지적하고 있다.47)

방기는 각 고을에서 손님으로 오는 사람을 접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수청 기생을 가리킨다. 예컨대 황주 기생 유지(柳枝)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황해도 관찰사로 도내를 순시할 때 잠자리 시중을 들었는데, 그 뒤 이이가 원접사(遠接使)로 황해도에 왔을 때 다시 만났다. 그때 스스로를 방기라고 일컫고 있다. 명종대에 박응남(朴應 男)이 왕명을 받은 사신으로 관서 지방에 갔을 때 관찰사가 방기를 보내 맞이하였다는 것도 같은 경우의 예가 되겠다.48)

조선 초부터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기생이 시침(侍寢)하는 것이 관행이었다.49) 세종대에도 명나라 사신이 와서 기생을 요구하자 정승 황희(黃喜)의 의견에 따라 허락한 바 있었다.50) 세종대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목적으로 기생들에게 중국인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익히게 하거나, 명 황제가 좋아할 만한 내용의 시와 노래를 익히게 하기도 하였다.

<봉사도 제18폭>   
1725년(영조 1) 조선을 다녀간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이 남긴 봉사도(奉使圖) 20폭 중 18폭으로, 영조가 아극돈에게 연회를 베푸는 장면이다. 사신을 맞이하여 여는 잔치에서 춤과 노래로 여흥을 돋우는 일은 기생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평안도 의주에서는 청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기생이 정재를 추었으며, 이러한 연회는 서울까지 가는 동안 거치는 여섯 고을에서도 마찬가지로 베풀어졌다고 하였다.51)

인조 초에 청나라 사신이 노골적으로 수청 기생을 요구하기 시작하여 한때 큰 폐단이 되었는데, 이때 연로(沿路)에서는 관기로써 충당하였고, 서울에서는 의녀와 사창(私娼)으로써 충당한 바 있었다.52)

그런데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 사신이 연로의 각 고을에 수청 기생을 요 구하였을 때 기생들이 죽음으로 항거한 바 있었고, 용강의 기생 한 명은 목을 매어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하였다. 얼마 뒤 청나라는 조선을 협조자로 계속 묶어 두기 위한 현실적 목적으로 조선에 끼친 여러 가지 폐해를 쇄신하였다. 이때 사신 맞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수청 기생 문제도 혁파의 대상이 되었다.53)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   
1572년(선조 5)에 의주 의순관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가마를 탄 이들이 명나라 사신이다. 조선 초부터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기생이 잠자리 시중을 드는 것이 관행이었다.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   

중국의 사신뿐 아니라 중국을 오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기생의 수청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명종대에 중국을 다녀오던 동지사(冬至使) 송복견(宋福堅)과 김언(金漹)이 국경 지대에서부터 파주에 이르기까지 기생을 끼고 무절제하게 즐기며 행동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당한 일이 있었다.54) 숙종대에도 민암(閔黯)이 부사가 되어 연경에 가면서 평안도에 이르러 기생과 어울려 오랑캐 춤을 추고 놀았다가 탄핵받은 사실은 이러한 현실을 증명해 준다.55)

그 밖에 국내 중앙의 대소 관료들이 지방의 사신으로 외방으로 나가면 관기에 빠져 직무를 게을리 한다는 기사가 세종대에 거론되는 것으로56) 미루어 그러한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하여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최한량(崔漢良)의 말을 빌 려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내려간 관리들이 기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생히 알려 주고 있다.

춘풍의 아름다운 계절을 당하여 준마를 타고 달려 이름 있는 고을에 들어서면 좌우의 긴 소나무와 높은 전나무는 큰길에 그늘을 이루게 하여 십여 리를 연하였고, 팔뚝을 반쯤 내놓은 소매 짧은 푸른 옷 입은 나장(羅將)이 쌍쌍으로 앞은 인도하고…… 대문 밖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쪽져 얹은 기생 수십 명이 길 왼쪽에 엎드려 있으며, 혹 머리를 쳐들어 우러러보기도 한다. 나는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말에서 내려 상방(上房)으로 들어가서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늘 밤엔 누구하고 짝하여 잘고’ 하다가 기생이 과실 소반을 받들고 들어오면 나는 또 생각하기를 ‘바로 이 사람일까 아닐까?’ 반신반의하다가 문득 수령이 찾아와서 문안을 드릴 때 동헌(東軒)에 앉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내가 일어나 술을 부어 돌리면 기생이 술을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사람이 보기 싫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하고 답답하고, 좀 부끄러워서 읍(邑) 가운데 산천이 모두 빛이 없고, 좌우의 사람을 볼 때 모두 몽둥이로 때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 것 같으면, 수령의 거동이 모두 명관(名官)이 하는 것처럼 보이고 객사 지붕 위의 까마귀마저도 예뻐 보인다.57)

최한량의 기생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당시 관리들 대부분도 공감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지방 기생은 봉명(奉命) 사신의 대접에 소홀할 수 없는 수령에게는 매우 유용한 존재였던 것이다. 기생들 사이에서는 “객사에 머무는 객 가운데 기생을 보고 즐거워하며 웃는 자는 범하기 어렵고, 기생을 보고 정색을 하는 자는 다루기가 쉽다.”58) 라는 나름의 감식안(鑑識眼)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유운(柳雲, 1485∼1528)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맨 먼저 공주로 들어 갔다가 경험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공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유운은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공주 수령이 기생을 들여보내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려니 하고 자리에 누워서 기다렸다. 그런데 수령은 ‘어사는 다른 사객과는 다르다’고 하며 그 서릿발 같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기생을 들여보내지 못하고, 다만 통인(通引)을 시켜 객사 마루 밑에서 밤새 지키게 했다. 이에 유운은 밤새도록 기다렸으나 끝내 사람의 발걸음 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이튿날 아침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침소의 병풍에 써 놓고 가버렸다.

공산의 원이 서릿발 같은 위엄을 두려워하누나

어사의 풍정도 여색은 아네

빈방에 홀로 긴 밤 지새우니

남쪽으로 온 나그네 행색이 중보다 처량하도다59)

[필자] 우인수
47)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磻溪隨錄)』 25, 속편(續篇) 상(上), 여악우희(女樂優戲).
48)이능화, 이재곤 옮김, 앞의 책, 204∼206쪽.
49)『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8월 갑자.
50)『세종실록』 권94, 세종 23년 12월 임술.
51)『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2월 신축 ; 권6, 세종 1년 12월 경진.
52)『통문관지(通文館志)』 권4, 사대(事大) 하(下), 방배(房排).
53)『인조실록』 권35, 인조 15년 11월 임신 ; 권38, 인조 17년 6월 병오 ; 권44, 인조 21년 5월 경신 ; 10월 무진.
54)『명종실록』 권7, 명종 3년 3월 신축.
55)『숙종실록』 권8, 숙종 5년 10월 갑술.
56)『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4월 무자.
57)성현, 『용재총화』 10(『국역 대동야승』 1, 민족 문화 추진회, 1982), 241∼242쪽 ; 이능화, 이재곤 옮김, 앞의 책, 126∼127쪽.
58)유몽인(柳夢寅), 이월영 옮김, 『어우야담(於于野談)』, 한국 문화사, 1996, 430쪽.
59)김정국(金正國), 『사재집(思齋集)』 권4, 척언(摭言), 5쪽 ; 이능화, 이재곤 옮김, 앞의 책,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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