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4. 사신의 접대와 군인의 위무

북방 지역 군사의 위무

북쪽 변경에 와서 국경 수비 업무를 담당하는 군사 가운데 아내가 없는 자를 위로하고자 기생을 둔 것은 조선 초기 이래의 관례였다. 세종이 함길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리면서 기생의 변방 군사 위무는 공식화되었다.

옛날에 변진(邊鎭)에 창기를 두어 아내 없는 군사들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지금도 변진과 주군에 또한 관기를 두어 행객(行客)을 접대하게 하는데, 더군다나 도내의 경원, 회령, 경성 등의 읍은 본국의 큰 진영으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수자리 사는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용(日用)의 잗단 일도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기녀를 두어 사졸들을 접대하게 함이 거의 도리에 합당할 것이다.60)

그리고 성종도 “처음 창기를 연변 여러 고을에 둔 것은 변장(邊將)과 군관들이 고향을 떠나서 변경을 지키므로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일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61)라고 하면서 변방에 기생을 설치한 목적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북변 지역에서 기생은 장기간 가정과 떨어져 복무하는 변장과 군관들에게 그 생활의 불편함을 최대한 줄여줄 수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배치된 기생, 즉 방기는 그야말로 가정에서의 아내 역할을 한시적으로 대신하여 일상적인 의식주 생활을 도맡아 해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육체적 안정까지도 감당하였을 것이다.

어떤 기생이 방기가 되었는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 상대에 따라 경우에 맞게 그때그때 적절하게 정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재색이나 능력이 뛰어난 기생은 당연히 관품이 높은 벼슬아치에게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이 방기를 배정받던 군관급에게는 격이 낮은 기생들이 배정되었을 것이다. 방기들의 기본적인 임무가 잡다한 집안일의 처리와 성적인 대상에 있었던 만큼, 굳이 오랜 수련 과정을 거쳐 어렵게 양성해 놓은 가무에 능한 상급 기생을 군관의 방기로 배정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전혀 기생으로 수업을 받지 않은 관비나 사비를 방비(房婢)라 하여 더러 군관의 방직(房直)으로 충원하였던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회령의 사비 노종은 잠시 출신 군관 박취문(朴就文)의 방비로 동원되어 자신의 집에서 그를 모신 적이 있었고, 경성(鏡城)의 사비 태향 역시 출신 군관으로 경성 병영에서 복무하게 된 박취문의 방비 노릇에 강제로 동원된 바 있었다.62)

방기는 자신이 모시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거처하는 곳도 달랐다. 벼 슬아치의 방기들은 관아에 딸린 별당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성곽과 가까운 타인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군관들의 방기는 군관을 따라 거기서 거주하였던 듯하다. 군관과 사는 방기는 한 달에 한 번씩 군관에게 지급되던 일정한 양료로 살림을 하였다. 그 밖에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는 있었겠지만 수령을 비롯한 상관으로부터 부정기적으로 지원받던 물건들도 가계 운영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방기의 집안 살림은 근처에 사는 기생 어미가 큰 도움을 주었다. 사실 기생은 그 어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을 것이며, 살림 경험이 부족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북일영도(北一營圖)>   
김홍도의 그림으로, 활 쏘는 사람과 과녁, 과녁 옆에서 적중 여부를 알려주는 사람 등 활터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기생들은 이러한 활쏘기 시합에 자주 동원이 되었다. 북일영은 훈련도감의 분영으로 궁궐 호위 부대의 하나인데, 지금의 사직동에 있었다.

방기라고 해서 계속 집안일만 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기생이었다. 환송연 같은 큰 연회가 있을 때나 군관들의 활쏘기 시합 같은 행사가 있을 때는 동원되었다. 특히 활쏘기 시합 때는 자신의 상대를 응원하면서 흥을 돋우는 구실을 하였다. 이는 당시 활쏘기 대회의 풍속과도 관련이 있었다. 활쏘기 대회는 대개 두 편으로 나누어 행하였는데, 시합이 끝난 후 진 편의 꼴찌에게 내리는 벌칙에 방기가 종종 동원되었다. 진 편의 꼴찌에 게 더러 곤장(棍杖)을 때리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양반인 군관에게 직접 곤장을 치기가 미안하였기 때문에 대신 그 방기를 끌어내어 족장이나 곤장을 치는 시늉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대개 술로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꼴찌에게 광대 옷을 입혀 춤을 추게 함으로써 희롱하기도 하였다. 이때 좀 더 짓궂은 경우에는 방기에게도 광대 옷을 입혀 같이 춤추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광대 옷을 입힌 방기를 소의 등에 태운 다음, 그 소를 역시 광대 옷을 입힌 꼴찌 군관에게 끌게 하면서 떨어져 있는 화살을 줍게 하기도 하였다. 소의 등에 타고 있던 방기는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으나,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를 즐겼던 것이다.

기생으로 몇몇 행사에 동원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방기의 생활은 남편을 둔 여느 여염집 아낙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관계는 한시적이었다. 한 사람이 가고 나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사람을 모셔야 했던 것이다. 방기에서 기첩(妓妾)으로 발전하여 같이 떠나기도 하였으나,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기생 폐지에 대한 논의가 많았던 중종대에도 기생이 존속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연과 더불어 북방 군사에 대한 위무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양계(兩界) 지역인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그러한 업무에 종사하는 많은 기생이 존재하였다.

국가에서는 양계 지역의 기생들을 국가 차원에서 특별히 관리하였다. 양계 지역 기생의 외부 유출을 금지하는 법제화가 추진되었다. 명종대에는 양계 지역의 기생은 아예 일체 속신(贖身)하지 못하게 법제화하였다.63) 이 법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져 숙종대에는 서북 지역 관기로서 불법으로 속량된 자를 모두 적발하여 관기로 환원시키는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64)

그러나 엄격한 규정에도 양계 지역의 관기가 외부로 많이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관료들이 양계 지역에 부임하였다가 돌아가면서 정이 들었던 기생을 기첩으로 삼아 데리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1606년(선 조 39)에 사헌부에서는 양계 지역의 관기를 불법으로 데리고 살던 사람들을 조사하여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종실이 2명, 당상관급 관료가 8명, 당하관 이하 관료가 29명, 기타 2명으로 총 41명에 달하였다.65)

조선 후기에는 불법으로 유출된 양계 지역의 기생을 쇄환하라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주장이 자주 제기되었다. 숙종대에 지평 이동언(李東彦)은 서북 지역 관기의 쇄환을 주장하였으며, 사간원에서는 “관기를 데려가는 무리는 대관(大官)이 아니면 반드시 부상(富商)이므로 고을 수령들이 위세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뇌물을 이롭게 여겨 비록 정해진 규정이 있더라도 마침내 시행하지 않았으며, 애초부터 쇄환하지 않은 채 감영에 거짓 보고하거나 혹은 잠시 점열(點閱)을 거친 뒤에 곧 돌아가도록 허락한다.”고66) 주장한 것이 그러한 사정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양계 지역 기생의 유출 현상은 관료들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한 기생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필자] 우인수
60)『세종실록』 권75, 세종 18년 12월 무인.
61)『성종실록』 권212, 성종 19년 윤정월 기묘.
62)우인수, 앞의 글, 2003, 115쪽. 북변 지역의 방기와 관련된 서술은 이 논문에 의거하였다.
63)『명종실록』 권9, 명종 4년 12월 기유 ; 『각사수교(各司受敎)』, 장례원수교(掌隷院受敎), 기유년(명종 4년).
64)『숙종실록』 권32, 숙종 24년 1월 무술.
65)『선조실록』 권202, 선조 39년 8월 계해·갑자.
66)『숙종실록』 권39, 숙종 30년 5월 을묘 ; 권40, 숙종 30년 11월 정미.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