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첫 광고주 세창 양행

『한성주보』에 첫 광고를 낸 세창 양행은 이후 『독립신문』을 비롯하여 한말 개화기에 간행된 각종 신문에 광고를 가장 많이 낸 광고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말에 가장 활발히 활동한 광고주였던 세창 양행은 어떠한 회사인가? 그리고 단순한 광고주였을까? 하지만 세창 양행은 광고주의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와 독일의 관계 형성 초기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종합 상사였다.

<세창 양행 상표>   
『한성주보』에 첫 광고를 낸 세창 양행은 이후 각종 신문에 가장 광고를 많이 낸 광고주 중의 하나였다. 세창 양행은 광고주의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와 독일 관계 형성 초기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종합 상사였다.
<세창 양행 상표>   

18세기 초 산업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내지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한 서구 열강은 식민지를 찾아 세계 각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도를 거쳐 동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이들 국가는 19세기 중엽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에 대해 통상을 요구하면서 집요하게 개국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쇄국 정책은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더불어 서구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조선 침략을 준비하였다. 국내 자원이 빈약한 일본이 근대로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해외 침략을 통한 재원 조달이 필요하였고, 그 첫 대상이 조선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875년 강화도에서 일으킨 운요호(雲揚 號)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결과 조선에서는 부산 등 세 개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 열강과도 수호 통상 조약을 통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독일은 조선 정부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 전부터 청나라의 주선으로 내한한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를 통하여 정치적·경제적 교섭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중국 해관(海關)에 관계하였던 인물로 1882년 말 조선의 통리교섭통상사무 협판(統理交涉通商事務協辦)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11월 조선과 독일 간에 통상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우선적으로 외무 담당 기구와 화폐 제조를 위한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중국 톈진(天津)에 있는 마이어 상사(E. Meyer & Co.)의 지사(支社)인 세창 양행을 제물포에 설치하는 일을 주선하였다.

세창 양행의 설립자 마이어(H. E. Meyer)는 1814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성장한 후에는 장난감 수출업체인 다니엘 라이(Daniel Ley)에게 상인 수업을 받았다. 이후 1859년 조그만 범선을 타고 중국에 도착하였으며, 1863년 홍콩에서 무역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어 1873년 톈진에 마이어 상사라는 본격적인 무역 회사를 설립하여 자본을 축적하면서 제국주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마이어는 함부르크와 런던, 홍콩에 지사를 설립한 후 1884년 6월 6일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제물포에 세창 양행을 설립하였다.

세창 양행은 묄렌도르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권을 확장시켜 갔는데, 해운 사업과 차관 도입, 근대 기기 도입과 기술자 고용 알선, 광산 채굴권 획득, 문화 교류, 중개 무역 등을 통해 급속도로 기업 기반을 확장하였다. 이런 활약을 인정받은 마이어는 우리나라 외교관이 독일에 부임하기 전인 1886년 3월까지 조선 정부로부터 독일 주재 총영사로 임명되어 조선과 독일 간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889년에는 함부르크 산업 박람회에 우리나라 물품을 소개하고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에 우리 나라 유물을 전달하는 등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서 우리나라와 독일의 교류를 이끌어 냈다. 이처럼 세창 양행은 단순한 무역상의 차원을 넘어서 한말 우리나라와 독일의 외교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105)

[필자] 성주현
105) 김봉철, 앞의 글, pp.118∼121.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