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광고계의 주류를 이룬 의약품 광고

『독립신문』보다 늦게 출발하였지만 일간지로는 최초였던 『매일신문』에는 광고가 비교적 많은 편은 아니었다. 비록 적은 양의 광고였지만 대부분은 사립 흥화 학교(興化學校), 한성 의숙(漢城義塾), 나무를 파는 육종원(育種園), 각종 가죽을 파는 피물 회사(皮物會社), 같은 언론사인 『황성신문(皇城新聞)』, 청주(淸酒)를 제조 판매하는 조일 주장(朝日酒場), 촌정 형제 상회 (村井兄弟商會)의 권연(眷戀) 희로(喜怒), 장국밥으로 유명한 수월루(水月樓)의 매매, 전당표를 찾아갈 것과 도적에게 빼앗긴 말을 찾아 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새문안 오궁터 웃동산 마을골에 있는 흥화 학교는 민영환(閔泳煥)이 교장이었고 서양에서 유학한 임병구(林炳龜)와 한우(韓宇), 김신영(金信榮) 등이 설립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영어·산술·지지·역사·작문·토론·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으며, 학생을 모집하는 광고를 실었다.111) 또한 당시 유행하던 학질의 치료약으로 보화단(保和丹) 제약 광고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전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금계랍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새로운 학질 치료약으로 보화단을 발명하여 판매하였던 것이다.

이틀거리 학질에 유명이 신효(神效)한 보화단이라 하는 약을 철물교 아래 남편 첫 골목 들어서서 위생관이라고 괘패(卦牌)한 집에서 발매하고 다른 병에 쓰는 약도 많이 있사오니 사방에 병 있는 이들은 찾아오시오.112)

당시의 신문 문장이 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고 카피 역시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철물교(鐵物橋)113) 아래에 있는 위생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약방에서 보화단이라는 학질약을 비롯한 각종 약품을 판다는 것이다. 철물교는 계동과 재동 방면의 물이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장통교(長通橋) 아래로 흘러들어 가는 중간으로 지금의 종로 2가 동남쪽을 건너는 다리인데, 통운교(通雲橋)라고도 한다. 주변에 철물전이 많았기 때문에 철물전교 또는 철물교, 줄여서 철교라고도 하였다. 이 철물교 아래에 약방을 두고 광고를 통해 고객을 불렀던 것이다.

국내에서 제조한 의약품 광고는 1897년 7월 31일자 『독립신문』에 실렸던 보영산(保靈散)이 처음이었다.

어린아이가 늘 간기병(肝氣病)으로114) 신고하는 것이 많은지라. 이를 극히 염려하여 관찰 지석영 씨가 보영산이라는 약을 발명하여 여러 차례 시험하였음에 백발백중하오니 무릇 어린아이 기르는 모든 군자는 광고에 적힌 대로 집을 찾아와서 사다 드시옵시오.

그리고 보영산을 판매하는 곳으로 대묘동 보영당, 동구안 전완기 약국, 남문 밖 손경약 약국, 송교 문영수 약국, 느리골 박선영 약국, 중학교 김인배 약국, 인천항 죽동 곽희수 약국, 대사동 박태학 마방 객주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중 보영당은 괴질 또는 설사에도 신묘한 약이 있다고 광고하였는데, 보영당은 당시 한약방 중 가장 먼저 광고를 활용하여 의약품을 판매하였다. 보영산을 발명한 사람은 당시 중추원(中樞院) 2등 의관(醫官)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種痘)를 실시한 지석영(池錫永)이었다. 지석영은 1880년 일본에 가서 두묘(痘苗)의 제조법과 독우(犢牛, 송아지)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돌아왔고, 일본 공사관 의관에게 서양 의학을 배웠다. 1882년 전주와 공주에도 각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고, 1899년 경성 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한글 보급에도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1908년 국문 연구소(國文硏究所) 위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집필하는 등 한글 연구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보영산 광고>   
『독립신문』 1897년 7월 31일자에 실린 우리나라의 첫 의약품 광고이다. 보영당에서 발명한 보영산은 지석영이 간기병을 앓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었다.

의약품은 한말 최대의 광고주였다. 그뿐만 아니라 의약품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전파 광고가 발달한 1970년대까지 최대의 광고주 자리를 고수하였다. 이처럼 상품으로 약(藥)을 판매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의약품의 과장 광고 또한 적지 않았다. 1899년 4월에 발행된 『제국신문』의 의약품 광고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인천항 룡골 개풍국에 신효한 안약이 있는데 노인이라도 항상 시험한 즉 어둡던 눈도 다시 밝고, 소년이 항상 시험한 즉 눈이 늙지 않고, 또 예맥도 벗어지고 안채가 나고 눈물도 흐르지 아니하오니 사방 첨군자는 사다가 시험하오.115)

광고는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약방 개풍국(開豊局)의 안약 광고는 노인의 어둡던 눈이 밝아진다는 부분은 지나치게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풍국의 주인은 이래회(李來會)인데, 그는 1907년에도 보신단(保腎丹)이라는 약을 제조하여 시판하면서 한 달만 먹으면 30년 중청(重聽)과 탈항(脫肛)이 쾌유된다고 여전히 과장 광고를 하고 있다.116)

1899년에 『황성신문』이 창간되면서 광고 카피에도 한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새로운 광고 기법도 등장하였다. 1902년 8월 20일자 『제국신문』에는 양잿물보다 수입 표백제가 우수하다는 광고에 소비자를 동원하여 선전하는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1907년 6월 12일자 『만세보』에 실린 일본의 염색약 광고에는 두 부인이 ‘용표와 꽃표’의 염색약이 좋다는 뜻으로 대화하는 만화 기법의 그림을 활용하였다.

<화평당 약방 광고>   
『매일신보』 1911년 6월 27일자에 실린 화평당 약방의 광고로, 팔보단을 비롯하여 29종의 약을 광고하고 있다. 화평당 약방은 “화평당은 약업계의 영광이요, 팔보단은 세계인의 복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국내 의약품 가운데는 이응선(李應善)의 종로 화평당 약방(和平堂藥房)과 이경봉(李慶鳳)의 남대문 제생당 약방(濟生堂藥房)이 최대의 광고주였다. 화평당 약방은 팔보단(八寶丹)이라는 건위 소화제를 제조하던 제약 회사였 는데, “화평당은 약업계의 영광이요, 팔보단은 세계인의 복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팔보단은 화평당 약방의 대표적인 의약품이었지만 1911년 6월 27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화평당 약방의 광고에는 약(藥), 단(丹), 수(水), 환(丸), 산(散), 고(膏), 정(精) 등 무려 29종의 다양한 약을 광고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생당 약방은 ‘팔보단 제조 본포 매약 행상원 모집’이라는 광고를 내고 판매원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방문(方文)만 보내도 약을 배송해 준다는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117)

<유사 의약품 주의 광고>   
제생당 약방이 『대한매일신보』(한글판) 1909년 5월 19일자에 실어 유사 의약품에 주의할 것을 알리는 광고이다. 제생당 약방의 청심보명단은 당시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자 유사 제품이 등장하였다. 이에 제생당 약방은 주의를 요하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제생당 약방을 경영한 이경봉은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과 삼용대보원(蔘茸大補元)의 특허를 얻어 초기 광고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청심보명단은 당시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아 유사 의약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제생당 약방에서는 청심보명단을 음용하는 고객에게 주의를 요하는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제생당 약방 역시 청심보명단이 대표적인 의약품이었지만 약, 단, 수, 환, 산, 고, 정 등 20여 종의 의약품을 광고하였다. 제생당 약방은 1909년경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의 룽징춘(龍井村)을 비롯하여 펑톈(奉天), 다롄(大連), 톈진(天津), 잉커우(營口)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지점 또는 출장소를 설치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118)

제생당 약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약 전문지 『중외의약신보(中外醫藥申報)』를 발행하였다. 1909년 8월 25일에 월간으로 창간한 이 신문의 주필 은 육군 군의였던 장기무(張基茂)였다. 창간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에는 “『중외의약신보』에 광고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본사 영업부 내의 광고부 주임과 상의하시기를 바람”이라는119)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신문은 영업부 아래에 광고 담당자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화평당 약방과 제생당 약방은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제생당 약방 창립 5주년과 화평당 약방 창립 3주년을 기념하여 각각의 대표 의약 상품인 청심보명단과 팔보단에 상품권을 넣어 특별히 판매한다는 연합 현상 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하기도 하였다.120)

이 밖에도 한말 각종 신문에 광고를 게재한 의약 관련 광고주는 자혜 약방(慈惠藥房)·이호정 약방(李鎬廷藥房)·한미 흥업 주식회사·육괴당(六魁堂, 전 개풍국)·공애당(共愛堂)·이가로 약포(李家老藥舖)·대약방(大藥房) 등이 있었으며, 의약품으로는 영약만금단(靈藥萬金丹)·팔보곤순단(八寶坤順丹)·만명고(萬明膏)·태을보명단(太乙保命丹)·구전영묘만응단(九轉靈妙萬應丹)·구전영묘보명단(九轉靈妙保命丹)·구전영묘제중단(九轉靈妙濟衆丹)·구전영묘자금단(九轉靈妙紫金丹)·춘약(春藥)·쾌약제(快藥劑)·구영단(九靈丹)·구위환(九胃丸)·장양복원단(壯陽復元丹)·청안수(淸眼水) 등이 있었다.

[필자] 성주현
111) 『매일신문』 1899년 1월 2일자.
112) 『매일신문』 1899년 1월 5일자.
113) 철물교는 현재의 종로구 관철동 일대이다. 관철동은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때 관자동(貫子洞)과 철물교(鐵物橋)를 합하여 새로 만든 행정명(行政名)으로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14) 간기병(肝氣病)은 어린 아이가 소화불량으로 식욕이 떨어지고 얼굴이 해쓱해져, 푸른 젖을 토하고 푸른 대변을 보며 자꾸 우는 증세를 말한다.
115) 정진석, 『한국광고 100년―광복 이전』, 광고정보센터(www.adic.co.kr).
116) 『황성신문』 1907년 7월 17일자.
117) 『황성신문』 1909년 5월 8일자.
118) 『황성신문』 1909년 11월 2일자.
119) 『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7일자.
120) 『황성신문』 1909년 6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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