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과대 광고와 허위 광고

광고는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나타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현상이었다. 『독립신문』의 광고론에서 지적하였듯이 광고란 상품 유통과 소비를 원활히 하여 산업을 발전시키는 촉진제가 된다고 보았다. 초기의 신문에는 광고의 역기능에 대한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고 외국 상품의 시장 침식(侵蝕)을 경계하는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의 광고 수법은 이 사회에 하나의 새로운 충격을 던져 주었 다. 이는 침체된 조선 사회의 상품 유통 구조에 큰 변혁을 강요하였고, 나아가서 전체 경제 구조의 근간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갈등을 불러일으켜서 광고에 대한 긍정론(肯定論)과 부정론(否定論)이 대두하는 배경이 되었다.

부정론은 두 가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 광고의 역기능이었다. 광고는 외국 상품의 급속한 침투를 촉진하여 빈약한 조선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열강 세력의 침탈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광고를 게재하는 신문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였다. 개화를 주장하고 자주와 독립을 외치는 신문이 외국의 상품 광고를 게재하여 그 수입으로 신문 발행을 계속한다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 주는 1900년 5일 10일자 『제국신문』에는 광고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을 비교하면서 그 효용성에 관해 긍정적으로 옹호한 논설이 실려 있다. 원래 우리나라는 좋은 것을 스스로 내세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선비의 재덕이든 생산된 물건이든 간에 좋은 것은 굳이 자랑하지 않더라도 사향(麝香)을 깊이 감추어 둔 것과 같아서 당사자는 말하지 않더라도 남이 자연히 알고 찾기도 하고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비를 허비하면서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포스터, 간판 등을 달아서 광고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서양식 광고가 들어와서 자신을 스스로 선전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제국신문』의 논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의술이 고명하니 찾아오시오. 내게 신기한 약이 있으니 찾아오시오. 우리 가게에 각색(各色) 상등(上等) 물건이 많고 헐하니 사가시오 하며 사람을 꾀이고 후리니 그 일이 어찌 당연한 이치라 하겠는가. 우리 동방 사회에서는 몇 천 년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으되 명의는 명의로 나타나고 명약은 명약이오, 기술은 기술이오, 물건은 물건대로 각각 그 생긴 대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팔리기도 잘 팔렸다. 요즘 외국의 상업 광고는 가령 소다 광고와 담배 광고를 보면 파는 곳과 물건 값을 명시하지도 않은 채 많은 광고비를 허비하고 있을 뿐이다.121)

즉 광고는 상품의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헐값이나 과장된 말로 일반 고객을 ‘꾀이고 후리는 수단’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특히 서양에서 수입된 상품의 경우 가격이나 파는 가게 등의 정보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 광고 비용의 낭비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광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긍정론자는 이렇게 변론하였다.

소다나 담배를 파는 곳과 값도 밝히지 않고 광고한다 하더라도 그 물건을 한국 사람의 눈과 귀에 익히도록 하여 그 물건을 사서 쓰게 만드는 것이다. 사서 쓰는 사람은 한국인에게 사든지 중국인에게서 사든지 사기만 하면 자연히 소다와 담배는 팔리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러한 광고 수입은 신뢰감을 심어 주고 상품의 이름을 널리 알려서 장기적으로 이익을 얻자는 것이다.122)

즉 긍정론자들은 광고는 상품 하나하나에 대한 정보도 중요하지만 ‘상품의 이미지’를 일반 고객의 뇌리에 깊이 인식시키고, 그 상품을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사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가 적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대기업에서 활용하고 있는 이미지 광고의 원조 격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황성신문』에도 광고의 유익한 점에 관한 논설이 실려 있다. 1899년 7월 5일자 논설은 광고가 사업을 번창하게 하고 그 이익을 많은 사람이 공유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광고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나오기 시작 하였다. 1900년 이후부터 『황성신문』에는 전체 지면의 절반 이상을 광고가 차지하는 경우도 생기자 광고가 너무 많다는 독자들 불평이 나오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고의 내용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소리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01년 3월 29일자 『황성신문』 논설을 들 수 있다. 이 논설에는 “광고가 10분의 9는 사회 진보상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때로는 아들이나 조카 등이 부랑하여 몰래 논밭을 팔아먹었다, 이름을 고쳤다, 도장이나 어음을 잃어버렸다는 등 창피스러운 일뿐이며, 광고다운 광고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가 외국인들이 내는 것으로, 오히려 광고로 인해 나라의 명예만 손상되는 데도 신문은 그저 광고료만 받아먹으면 그만이냐.”는 내용으로 광고의 폐해를 강조하였다.

<광고 무용론>   
『황성신문』 1901년 3월 29일자에 실린 논설이다. 개명국 신문의 광고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광고가 오히려 나라의 명예만 실추시킨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광고란 ‘천하에 널리 알리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이를 이용할 경우 이익을 크게 취하고 사업이 날로 확장하여 그 이익을 일반인이 공유하게 된다고 인식하였다.123)

[필자] 성주현
121) 『제국신문』 1900년 5월 10일자.
122) 『제국신문』 1900년 5월 10일자.
123) 『황성신문』 1899년 7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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