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2. 궁중 의례궁중 의례에서 나타나는 왕실의 권위

의궤에 기록된 왕의 권위

흔히 생각하면 조선시대 왕의 권위가 가장 두드러진 행사로 즉위식을 떠올린다. 이것은 오늘날 대통령 취임식 행사를 연상한데서도 연유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즉위식은 축하 행사의 성격보다 장례식의 연장선상 속에서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대부분 전왕이 사망하고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국왕의 즉위식을 기록한 의궤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134) 그러나 고종 황제의 경우 왕위에 있다가 황제로 즉위하였고, 즉위식 자체가 군주국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되는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에 의궤를 작성하였다. 1897년(광무 1)에 만든 『고종대례의궤 (高宗大禮儀軌)』가 바로 그것이다. 『고종대례의궤』는 조선이 처음 황제국을 선포한 만큼 축제적 성격은 물론이고 황제국의 권위가 의궤 곳곳에 나타난다. 반차도의 그림에 그려진 가마의 경우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인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금책금보동재요여(金冊金寶同載腰輿)>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고종대례의궤』의 반차도 가운데 금책(金冊)과 금보(金寶)를 싣고 가는 요여(腰輿) 부분이다. 인원과 요여 모두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차림을 하고 있다.

왕실의 혼인이 있을 때는 『가례도감의궤』를 작성하였다. 왕비 또는 왕세자빈을 선발할 때에는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린 상태에서 세 차례에 걸친 선발 과정이 있었고, 다시 여섯 가지 절차를 거쳐 혼례를 치렀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 혼수 물품, 국왕이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親迎) 행렬을 반차도라는 그림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국왕의 결혼식에는 그 상징물로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만들었다. 왕실 결혼식 관련 의궤에는 궁중에서 사용한 기물(器物)이 도설로 표현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사용한 물품의 구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물품의 도설, 재료, 빛깔 등을 통하여 혼례식에서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려 했던 모습을 접할 수가 있다.

<종묘 원경>   
종묘는 태조를 비롯한 역대 국왕과 태조의 역대 선조의 신위를 모신 왕실 사당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종묘의 제사 의식, 제사 절차, 제사에 사용하는 각종 기물, 시설 증축 등에 관한 내용은 『종묘의궤』에 잘 정리되어 남아 있다.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를, 왕세자나 세자빈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장례 절차뿐 아니라 장례에 쓰는 상여(喪輿), 기물(器物), 부장품(副葬品) 등 일체의 물품을 그림으로 그려 함께 수록하였다. 삼년상을 치른 후에는 승하한 국왕의 신위(神位)를 종묘로 옮겼는데, 이때의 의식을 기록한 것이 『부묘도감의궤(祔廟都監儀軌)』이다. 이들 국장 관련 의궤에는 엄숙함과 경건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조선시대에는 왕이 주관하는 다양한 국가적 의식을 거행하였고, 의식이 끝난 후에 의궤를 작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대표적인 제사가 거행되는 공간이자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기관이었다. 태조를 비롯한 역대 국왕 그리고 태조의 역대 선조의 신위를 모신 종묘와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을 함께 모신 사직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가장 성대한 제사를 지냈고, 국가의 대사를 알리거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는 수시로 거행되었다. 『종묘의궤(宗廟儀軌)』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는 종묘와 사직의 시설 증축, 제례 절차,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기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보고서로서 이곳에서 행해진 제사 의식을 기록으로 정리하 였다. 종묘와 사직은 왕실의 존재와 정통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곳이었던 만큼 이곳에 대한 장중한 제사 의식은 한편으로는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과시하게 하였다.

<『영접도감사제청의궤』>   
1609년(광해군 1) 선조의 장례식에 참석한 명나라 사신 일행을 영접한 절차를 기록한 『영접도감사제청의궤(迎接都監賜祭廳儀軌)』이다. 당시 사제천사(賜祭天使)로 조선에 온 웅화(熊化)가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은 주산업이 농업인 국가였다. 따라서 왕실에서도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국왕이 농사를 짓고 왕비는 누에를 치는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시범을 보였다. 『친경의궤(親耕儀軌)』는 국왕이 전농동에 있던 적전(籍田)에 나가 시범적으로 농사짓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고, 『친잠의궤(親蠶儀軌)』는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여인들이 직접 누에를 치는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왕과 왕비가 모범적으로 백성들의 삶의 문제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백성들이 왕을 믿고 따르도록 하는 행사가 되었다. 오늘날 대통령이 민생 현장(民生現場)을 직접 찾는 것과도 흡사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국왕이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을 영접할 때에는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가 정리되었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업무였으므로 정부에서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사신이 방문할 때에는 영접을 전담하는 영접도감이 설치되었고, 영접도감 안에는 업무를 총괄하는 도청(都廳)과 실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나뉘어 있었다. 현재 영접도감과 관련한 의궤로는 『도청의궤』를 비롯하여 음식과 물자의 제공을 담당한 『미면색의궤(米麪色儀軌)』, 사망한 국왕의 조문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 『사제청의궤(賜祭廳儀軌)』가 전해 오고 있다. 당시 사대 외교(事大外交)의 특성상 영접도감 관련 의궤는 중국에 대해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는 입장에서 만들었다. 국제 관계에서도 예를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국내의 예를 지키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큰 나라에 종속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측면도 있다.

국가적으로 주요한 편찬 사업이 있을 때에도 의궤를 만들었다. 국가의 중요 기록물을 편찬하고 철저히 보관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기록물을 만든 과정까지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각 기록물에 따라 의궤의 종류도 달랐다. 실록의 편찬에는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를, 광해군대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편찬할 때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를, 『국조보감』을 편찬할 때에는 『국조보감감인청의궤(國朝寶鑑監印廳儀軌)』를 정리하였다. 국가가 주도한 편찬물은 왕실의 통치 행위와 백성들의 교화에 관한 내용을 다룬 만큼 이들 책의 보급은 왕실의 업적을 홍보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궁궐이나 성곽의 건축 과정을 담은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 역시 왕실의 권위를 보여 준다. 고대 국가의 그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역시 궁궐이나 성곽 건축의 웅장함은 왕실에 권위를 보여 주는 요소였다. 궁궐의 전각이 화재에 소실된 경우 이를 중수(重修)한 경우가 많았으며, 『화성성역의궤』처럼 특별한 공사 건축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도 있다. 이들 의궤에는 당시 건축 기술의 수준, 소요 물품, 인력 동원 방식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참여한 장인(匠人)의 명단이 모두 기록되고 이들에게 지급한 임금이 나타나 있어서 왕실에서 일사불란하게 백성들을 동원시킨 상 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궁궐이나 화성처럼 완성된 건축물은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거나 상징하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화성 행궁(華城行宮)은 1795년(정조 19)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 축제라 할 수 있는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이 벌어지는 등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135)

<행궁전도(行宮全圖)>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화성 행궁의 그림이다. 화성 행궁은 정조가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는데,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거나 상징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필자] 신병주
134)조선시대 왕의 즉위식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한 ‘슬픈 즉위식’이었다. 왕세자로서 왕이 된 인물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통곡 속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조선시대 즉위식 중에서도 기쁜 즉위식은 세종의 즉위식과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살아서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상태에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고,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선포하면서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135)화성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곽 일대가 파괴되기 시작하였고 6·25 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었는데, 1975년에 『화성성역의궤』를 활용하여 불과 3년 만에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다. 또한 수원시에서는 화성의 중심부에 있던 화성 행궁(行宮)을 복원하였는데, 역시 『화성성역의궤』가 주요 자료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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