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를 내면서

음악은 소리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전달되며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은 그것을 최대한 기억하고, 또 기록하려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떻게 기억되는 것인가?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소리의 관계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배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 어떤 노래를 어려서부터 기억하여 부른다. 그러나 이 노래가 사람의 뇌리에 어떻게 기억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노래를 어려서부터 배워 안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 선율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노랫말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노랫말은 잘 떠올리지만 선율은 거의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음악을 기억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 두는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랫말은 기억에 따라 문자로 기록할 수 있지만 선율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선율을 기록하는 이런저런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예를 들어 노래의 선율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연음표(連音標)와 같은 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음표는 노래의 가사 옆에 음의 높이·진행·기교 등의 표현법을 일정한 기호로 표시하는 기보법(記譜法)으로, 조선시대 가객(歌客)들이 사용한 부호표이다. 그 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기억을 되살려 부르기 위한 것으로 그 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알아보기 어렵다.

이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기로 연주되는 선율을 그 악기의 소리를 모방하여 기록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을 ‘구음(口音)’이라고 불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구음은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각 악기의 구음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에 대해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구음과 같이 실제 음악의 선율을 어떤 기호나 문자 등을 빌어서 기록하는 방법은 악보(樂譜)를 만들어 내는 기보법과 관련이 있다.

음악 자체를 기록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이지만, 음악과 관련된 주위의 여러 가지 모습을 문자로 기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이 소위 문헌에 의한 역사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음악과 관련된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 왕조 실록』 등과 같은 역사서 이외에도 악서(樂書), 의궤(儀軌), 무보(舞譜) 등이 있다. 또한 국가 주도로 편찬된 관찬(官撰) 서적뿐 아니라 개인 문집(文集)에도 음악에 관한 내용이 녹아 있다. 이와 같이 문헌에서 음악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내어 시대순으로 서술해 나가는 ‘문헌에 의한 음악사’는 그동안 많이 연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각 시대의 음악이 전승되는 모습을 배워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문헌 기록이 과연 각 시대의 음악적 상황을 제대로 잘 전해 주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문제는 문자로 기록된 문헌 이외에도 그림이나 사진, 혹은 악기의 유물, 그리고 여러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악기의 모습을 그려 놓은 도상 자료(圖像資料) 등 각 시대의 음악 연주 모습을 통하여 일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헌 자료, 악보 자료, 도상 자료 등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 시대적으로 우리 음악 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즉, 인류가 음악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연주하고 향유하였는지, 어떤 음악을 연주하였는지에 대한 음악과 음악 문화의 역사는 주로 악보, 서적 등의 문헌 사료(史料)와 인류의 정치·사회·경제·생활·풍속사를 담은 다양한 형태의 문자 기록과 20세기에 발명된 음향·영상 재생 기술을 통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음악은 무형(無形)의 시간 예술이라는 점에서 기록상의 한계가 있고, 음악의 연주 기술 및 공연 방식과 음악을 통한 소통 방식이 주로 생활을 통해 구비전승(口碑傳承)되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문자로 기록된 음악의 역사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음악 기록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문헌 기록과 유물·유적에 나타난 자료 이외에, 기보법에 의한 기록인 악보, 녹음·녹화 등 시청각 자료를 통해 각 시대별로 음악 전승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과 음악 문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음악사가(音樂史家)들은 문자로 기록된 사료 외에 고고학(考古學) 자료와 도상 자료, 구비전승 자료 등을 음악사 연구의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고대의 악기 유물이나, 회화·조각품·벽화·공예품 등에 표현된 음악 연주 장면들이 기록상의 한계로 인해 알 수 없었던 미지(未知)의 음악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의 음악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나 도상 자료는 악보나 음악 문헌이 희귀한 고대 음악 연구 및 시대별 악기의 변천 과정, 음악의 시대적 상징성 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현대 음악학 방법론에서는 역사적 유물과 고고학 사료를 바탕에 둔 음악 사학 연구를 ‘음악 고고학(音樂考古學, Music Archeology)’으로, 도상 자료를 이용한 음악 사학 연구를 ‘음악 도상학(音樂圖像學, Iconology of Music)’으로 세분하고 있다.

음악사의 자료가 되는 음악 도상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문명의 발생 시기부터 존재한다. 고대로부터 인류의 종교적 의식이나 축제에는 항상 음악과 춤이 동반되었고, 그러한 모습은 회화나 조각 같은 시각 예술을 통해 가장 생생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사의 첫 장에서 만나는 기원전 2000년 전의 그리스 조각품 중 리라(lyra)를 연주하는 악사상(樂士像)이라든가, 기원전 1400년 전의 이집트 벽화 중 하프(harp)를 연주하거나 목이 긴 류트(lute)를 연주하는 여인들의 모습, 탬버린같이 생긴 악기를 두드리며 춤을 추는 무희들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이미 익숙하다.

이 밖에 그리스의 고대 유물, 서양의 중세 성당에 남아 있는 벽화나 조각품을 비롯한 수많은 미술품에 각 시대를 대표하는 악기의 모습, 연주 형태 등을 담고 있음은 서양 문화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 점은 중국 문명권도 마찬가지다. 기원전 수세기 전의 음악 유물을 비롯해 한대(漢代)의 화상석(畵像石), 고분 벽화, 불교 미술품, 회화, 도자기 등의 미술품은 각 시대의 음악 모습을 담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음악 자료는 도상학(iconography)이라는 연구 방법을 통해 음악사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본래 도상학이라는 말은 ‘상’이라는 그리스 어 ‘eikon(아이콘)’과 ‘쓰다’라는 ‘grapho(그라포)’의 합성어로, 서양의 고대학 중 주로 그리스와 로마의 초상 조각에서 재현된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를 증명해 내는 방법론으로 출발하였다. 고대부터 사용된 이 개념은 르네상스에 이르러 회화 참고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고대 작품들에 대한 특성을 연구하는 데 활용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학자들이 도상학 방법으로 중세 미술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당시 도상학의 대상은 기독교 미술에 집중되었다. 성인전, 성인의 상징물, 기독교 회화, 기독교 상징, 기독교 도상학 등과 같은 연구 성과가 축적됨으로써 도상학은 미술의 특수한 보조 학문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도상학은 중세 기독교 미술 영역을 넘어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미술을 해석하는 데도 큰 구실을 하였다.

아울러 작품의 일정 주제, 또 그 안에 포함된 개별 형태, 개별 형태의 상 징물(attribute), 상징(symbol), 알레고리(allegory)에 대한 일종의 ‘형상 프로그램’을 파악하고, 다시 그 모든 개체를 종합하여 해석하도록 하는 미술사의 한 방법론으로 출발한 도상학은 미술 이외에 문화사 전반으로 영역을 넓히게 되는데, 음악 도상학도 그 중의 한 갈래이다.

음악 도상학 연구에서는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 벽화와 회화, 조각, 공예품 등에 표현된 음악 도상을 대상으로 악기와 연주, 공연 방식, 음악의 상징, 음악 문화의 변천사 등이 주된 연구 성과로 축적되었다.

우리나라 음악사 연구 분야에서도 음악 도상 자료는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 음악사의 도상 자료는 대개 고대의 고분 벽화·불화(佛畵)·문인화(文人畵)·풍속화(風俗畵) 같은 회화 및 석탑·승탑 등의 석조 미술품, 범종(梵鐘) 등의 금속 공예품, 토기(土器) 및 토우(土偶), 도자류(陶瓷類)에 묘사되어 있다. 이 중 불화(주로 변상도(變相圖)), 무신도(巫神圖), 신선도(神仙圖), 고분 벽화 중의 일부분에는 종교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 시대성보다는 종교 미술로 양식화된 경향을 보여 준다.

이에 비해 진연도(進宴圖), 반차도(班次圖), 행렬도(行列圖), 기로연도(耆老宴圖) 등 국가의 공식 행사의 기록을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나, 세태 묘사에 충실한 풍속화, 불화 중의 감로왕도(甘露王圖), 선비들의 풍류 생활을 표현한 문인화 등은 시대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반영하고 있어 음악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한편 우리나라에 서양 미술이 소개되기 시작한 뒤로도 많은 미술가가 전통 음악과 무용을 미술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근·현대의 음악 역사도 역시 음악 도상 자료를 통해 반추해 볼 수 있다.

한국 음악학에서는 이상의 주악(奏樂) 도상을 음악사 연구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거문고와 가야금의 연원, 고유성, 연주법에 관한 논의나 고분 벽화에 표현된 음악 연주 장면의 해석,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의 불교 미술품에 표현된 악기의 종류와 편성이 실제 음악 문화 를 어떻게 증명해 주는가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 궁중 의례 및 지방 관청, 민간에서 연행된 행사와 연회를 그린 기록화와 풍속화를 주제로 한 연구 등이 여러 학자에 의해 다양하게 섭렵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루어진 도상학 관련 논저는 대부분 도상 자료에 표현된 악기가 무엇인가, 그 악기가 우리나라 음악에 관한 문헌 기록과 일치하는가에 초점을 둔 것이며, 최근 들어 음악 도상이 담고 있는 음악적 정보를 그 시대의 정치·종교·철학·민속 등 인문학적 해석으로 접근하는 연구도 부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한편, 음향을 기록하는 것도 역사의 한 부분에 포함된다. 녹음 기술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음악을 그저 악보에 기록하거나 그림 또는 상여 꼭두 같은 조각품에 그 이미지를 나타내는 정도였다. 음반 매체의 탄생은 이후 인류 음악 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세계 도처의 다양한 음악이 많이 사라지고 획일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 기술이 출현하기 이전 이 세상 예술 가운데 글, 그림, 공예, 건축물 이외에 음악이나 무용 등은 제대로 기록하기가 어려웠다. 무용의 경우 벽화 등 그림으로 일부 묘사하기도 하였고 음악은 악보라는 수단을 강구하여 기록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속 춤 동작이나 소리의 섬세한 음색, 성량, 강약 등을 풍부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고. 더구나 가무악(歌舞樂)을 기록물로 대량 생산하여 배포한다는 것은 사진, 음반, 영화 필름의 발명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매체를 이용한 음악 기록 방법에는 녹음기를 사용하여 테이프에 음향을 기록하는 방법과 음반을 제작하는 방법이 있었다. 음반(音盤)은 음(音)의 기록물로서 소리를 보관하였다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재생해서 들을 수 있는 편리한 발명품이다. 1877년 에디슨이 처음 발명하였을 당시의 음반은 원통형으로, 나팔통이 달린 유성기를 사용하여 재생하였다. 그 후 원통형 음반은 평판으로 발전하였다. 평판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레코드 프레스 기 술이 부족하여 한쪽 면에만 소릿골을 새기고 뒷면은 소릿골을 내지 못하는 일명 ‘쪽판’을 생산하였다. 초기 음반 취입 방식은 나팔통에 대고 녹음하는 기계식이었고 그 후 마이크가 발달하면서 전기식 녹음으로, 다시 모노에서 스테레오와 디지털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음반 매체도 유성기 음반(Standard Playing)에서 장시간 음반(Long Playing)과 콤팩트디스크(Compact Disc)로 점차 발달되어 왔고, 오디오 또한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오늘날 음반은 소리뿐 아니라 영상과 활자까지도 저장할 수 있는 기록물로 거듭 태어났다. 음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되자 이제 음반은 책이나 다른 어떤 기록 매체보다도 다양한 정보를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기록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음반은 이제 음악 외에도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기록 매체로 자리를 잡았다.

음악에는 한 사회의 가치관, 심성, 습성, 언어, 사고방식 등 상당히 많은 양의 문화 정보가 담겨 있다. 역사를 탐구하고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고, 과거에 축적된 지혜를 습득하여 미래에 생존을 위한 예측과 지식으로 활용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수많은 지혜와 영양분이 들어 있는 문화 용광로인 음악에 대한 기록과 관찰은 인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음악 기록은 인류에게 아주 소중한 자산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매우 증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음악 기록물은 그 후 언어, 역사, 심리학, 고고학 등 여러 가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연구 자료로 활용될 것이며, 오래도록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하는 지구촌의 다양하고도 특이한 지역 고유의 음악이 장차 지구상에서 존재했었는지조차 모르게 될 정도로 음악의 전승이 매우 위태로워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음악을 기록해야 할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이제 우리나라의 음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 그 나이에 걸맞게 수백 개의 음반 회사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역사를 담고 있는 음반들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제대로 된 음향 영상 자료관은 전무한 형편이다. 새로 녹음을 하여 음반화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와 병행하여 과거에 기록된 여러 음향 영상물을 수집·연구·보존하는 일 또한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좀 더 많은 국립, 사립, 분야별 음향 영상 자료관(아카이브) 건립이 시급하다. ‘듣기 문화’로서의 음악이 ‘보기 문화’인 영상과 함께 악(樂)·가(歌)·무(舞) 일체의 공연 예술을 어떻게 하면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2009년 5월

한양 대학교 명예 교수

[필자] 권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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