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를 내면서

하나의 물건을 통해서 어떤 시대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포괄적이고 애매한 ‘시대’라는 인식 대상을, 내가 만지고 조작할 수 있는 물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 시대를 내연 기관을 통해서 설명한다면 그 시대를 매우 생생하면서도 동시에 종합적으로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석유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20세기는 어떨까? 아마 우리는 온갖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자동차, 배, 화학 섬유는 물론이고, 거대한 도시와 빌딩, 산업화된 농업, 전국적 교통망, 세계화된 무역, 다국적 기업,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국지전과 두 번의 세계 대전 등이 쉽게 떠오르는 설명의 항목이다. 오늘날 그 항목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야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문화사와 관련된 책의 제목에는 유난히 물건 이름이 많다. 빵, 밀, 옥수수, 감자, 소금, 설탕, 커피, 후추, 고추, 대구, 치즈, 담배, 목화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물건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전염병 같은 것도 문화사적 탐구의 대상이다. 정치사나 사상사에 관한 책의 제목이 대개 난해한 추상 명사인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오늘날 이들 물건의 이름 을 제목으로 삼은 문화사 책은 많은 역사책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물건의 역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문화사에서는 평범한 개인이 경험한 역사, 어떤 식으로든 개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이해하는 역사라는 측면이 강조된다. 그런 물건이야말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 개인적으로 매일 매일 경험하는 것이다. 문화사의 인기는 사람들에게 그들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역사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문화사는 평범한 개인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을 역사의 범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런 면에서 문화사의 등장은 역사학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정치사, 사회 경제사, 문화사는 마치 식탁 위에 고루 차려 놓은 음식 같은 느낌을 준다. 각각의 음식은 그 맛은 달라도 어떤 것에나 젓가락을 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각각의 역사학이 출현한 배경은 이와 전혀 다르다.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정치사이다.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유럽에서 근대 역사학을 정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책이 바로 정치사 책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유럽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하였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18세기 중반 무렵, 유럽은 거의 1,000개에 가까운 정치적 독립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국가가 그 후 채 100년이 지나기도 전에 대략 40, 50개 정도로 통합되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그것은 격렬한 변화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국가의 탄생 과정이다. 이 거대하고 격렬한 전환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랑케가,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이 이들 국가의 통합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던 위대한 인물들 속에 있다고 믿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그의 정치사는 그가 이해한 역사 변화의 동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실의 역동적 변화 속에 살면서, 그것을 빚어내는 힘이 만들어 내는 질서를 읽어 내고 기록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흥미롭지 않았겠는가.

사회 경제사는 역사 전개의 또 한 번의 굽이에 등장한다. 근대 국가로의 재편이 완료된 이후, 19세기 중반부터 산업 혁명의 물결이 전 유럽에 휘몰아쳤다. 마르크스에 의해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된 19세기의 고전적 산업주의는 수많은 사회 혁명을 초래하였다. 그 수많은 사회 혁명은 초기 산업 자본가들의 제어되지 않은 대중에 대한 무한 착취가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사회 경제사는 바로 이런 국면에서 탄생한다. 국가는 더 이상 그 자체로 단일한 단위로 인식될 수 없고, 사회는 더 이상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로는 설명될 수 없었다. 또 사람들은 더 이상 국가의 운명과 자신의 삶이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국가가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사회 경제사의 감성적 기초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거대한 사회 혁명으로 표현되었다. 그 결과 이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개개인으로 볼 때 아무런 힘도 없는, 집단으로서의 하층민들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존의 정치사가 위에서 바라본 역사라면, 사회 경제사는 아래에서 바라본 역사이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역사학 자체의 전복이 일어났던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하층민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경제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필수불가결하였다. 그 결과 사회 경제사가 등장한다.

앞서 말하였듯이 문화사의 등장은 역사학 자체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사는 제도적 측면에서 실제로 사회의 민주화에 기초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나라에서 민주화가 확산되었다. 또한 사회 자체가 대단히 복잡하게 분화되었다. 이것은 사회 경제사가 전제했던 것을 넘어서는 상황 전개였다. 사회 경제사는 비록 아래로부터 바라보는 역사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으로서의 민중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 집단성에 균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제 평범한 시민들은, 기존의 정치사나 사회 경제사가 보여 준 진실이 도대체 개인으로서의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것에 대한 설명이 문화사이다. 때문에 문화사에서 말하는 문화는 피상적으로 얼핏 생각할 수 있는, 삶과 동떨어진 ‘고상한’ 문화가 아니다. 그것들은 개인의 매우 구체적인 삶의 모든 양식과 관습, 심지어는 무의식적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이렇듯 정치사, 사회 경제사, 문화사는 단순히 역사에 대한 어떤 스타일이나 기호가 아니다. 그것들은 시대마다, 각 시대가 포괄하는 다양한 모습을 종합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서술 방식이다. 역사학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역사가가 하는 학문이 바로 역사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사, 사회 경제사, 문화사는 역사가가 자신이 절실하게 느끼는 현실이라고 파악하는 것들을 과거에 투영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 가지 역사학은 역사가가 이해하는 자기 시대에 대한 감수성을 과거 속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투영한 결과인 셈이다.

사회 경제사가 등장하였다고 해서 정치사가 사라지지 않았듯이, 문화사가 나왔다고 해서 사회 경제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도 우리는 각각의 영역에서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세 가지 역사학은 대체되는 대신,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전쟁에 대해서 서술한다고 할 때, 전쟁에 이르게 되는 국가들 간의 긴장과 갈등, 전후의 배상 문제, 정치 지도자들 간의 갈등과 협력을 다룬다면 그것은 정치사적 접근 방식이다. 반면에 전쟁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병사들의 사회 계급적 분석, 전쟁의 경제적 효과 등을 다룬다면 이것은 사회 경제사적 접근 방법이다. 문화사적 접근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어떤 병사가 전쟁 과정에서 겪은 참상에 대한 기억이 전쟁 후 그의 일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세균이나 독가스 등에 감염되어 그 병사는 어떤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가, 참전 군인의 자격이 그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다룬다면 그것은 문화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 경제사를 통해서 정치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문화사를 통해서 사회 경제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학은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상호 침투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쌀은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3대 곡물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 가지 곡물의 생산지가 각각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즉, 밀은 유럽에서, 옥수수는 아메리카에서, 쌀은 아시아에서 각각 생산된다. 그 중에서도 밀과 옥수수가 생산과 소비 지역 간에 약간 차이를 보이는 것에 반해서, 쌀은 생산된 곳에서 거의 소비되는 특성을 가진다. 쌀은 많은 아시아 국가의 역사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보통 명사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적’ 가족주의나 마을 공동체가 가지는 특징은 쌀과 관련해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쌀은 아시아적 보편성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 토대 중 하나이다.

쌀은 다른 주요 곡물에 비해서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쌀은 밀보다 단위 면적당 다섯 배 이상의 소출을 낸다. 또 하나는 쌀의 뛰어난 노동 흡수 능력이다. 다른 곡물의 경우에 노동력 투여와 그에 따른 소출 증가는 별다른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일해도 일한 만큼 소출이 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쌀은 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큰다.”는 말이 있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의미하는 것은 쌀의 압도적인 인구 부양 능력이다. 쌀농사 지대는 똑같은 면적의 땅에서 다른 작물 지대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 쌀을 주식으로 하는 국가는 대부분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쌀의 높은 인구 부양력은 고도의 관료제(官僚制)와 자립적인 소농(小農)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반면에 유럽에서 늦게까지 관료제가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은 희박한 인구에 기인하는 측면이 많다. 전통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족 단위로 벼농사를 짓고, 서울에 왕과 고위 관료가, 지방에 수령이 있는 것은 친근한 것을 넘어서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이것은 특정 지역에서 특정 시기부터 출현한 하나의 사회 유형이라고 해야 옳다. 서구 학자들은 일찍부터 이것을 매우 기이한 현상으로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보여 주었던 높은 수준의 관료제는 유럽에서는 근대의 한 특징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것은 근대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쌀의 높은 생산력은 단지 인구를 증가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하는 힘이었다.

벼농사는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등장한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 긴 세월 동안, 쌀은 생산과 소비에서 몇 번의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17·18세기, 개항 및 광복 등이 바로 그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들 시기에는 쌀과 관련된 것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러한 변화의 폭과 강도는 보통 사람의 기본 먹을거리를 바꾸는 정도의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벼가 어느 지역에서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기존에는 인도설, 아프리카설, 동남아시아설 등이 있었는데, 근래에는 인도의 아삼, 미얀마 북부, 타이 북부, 중국 남서부를 동서로 잇는 긴 지대를 벼농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생각하는 학자가 많아졌다. 벼농사 기원과 연관되는 중요한 사항은 벼농사가 어떻게 한반도에 전파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것으로는 북방설, 서해 횡단설, 남방설의 세 가지 주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벼농사 기원설 중 마지막 것에 기초한다. 한편 이들 주장 중에서 마지막 남방설은 아직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주로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주요한 전파 경로로 생각되고 있다.

북방설에 따르면 벼농사는 인도의 아삼과 윈난(雲南) 지방에서 양쯔강(楊子江) 하류를 거쳐 북상하여 산둥(山東) 및 랴오둥(遼東) 반도를 통해 육로로 한반도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벼는 원래의 열대성 식물로서의 특성이 바뀐다. 즉, 인디카종(indica種)이 한랭한 화중(華中) 화북(華北)으로 전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주로 이용하는 자포니카(japonica)로 변하였던 것이다. 서해 횡단설은 벼농사가 양쯔강 하류 또는 산둥 반도에서 바로 서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한다. 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증거를 갖춘 주장이다.

한반도에 벼농사가 전래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에서도 한참 거슬러 올라간 후기 신석기시대이다. 하지만 흔적 차원이 아닌 농작의 전반적 양상으로 볼 때, 벼농사가 한반도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 중기쯤이었던 것 같다. 이후 벼농사는 주로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벼농사의 확산은 그에 따른 다양한 농기구의 출현을 동반하였다. 땅을 파고, 다 자란 알곡을 수확하고, 껍질을 까고, 이를 조리하고, 또 저장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도구가 개발되었다.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적지 않은 벼농사 도구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출현한다. 이것들 중 많은 종류가 청동기시대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역사 속에서 늘 확인되듯이, 생산과 관련된 새로운 지식과 도구 및 그 결과물은 그 사회적 영향이 직접적인 생산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벼농사의 확산이 가져온 결과도 농기구의 발달에 그치지 않았다.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의 향상은 무기를 만드는 것에도 적용되었다. 또 벼농사는 물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그러한 통제가 실현되는 환경으로서의 논이라는 인공적 조건이 거의 필수적이다. 수리 시설(水利施設)을 만들고 운용하는 것은 집단적 노동력을 동원하여야 할 수 있었고, 다시 이를 가능하게 할 어떤 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던 어떤 농업 공동체의 존재를 의미한다. 요컨대, 벼농사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경제적 힘을 의미하였고, 그 힘이 담길 수 있는 사회적 조직을 요청하였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벼농사는, 다시 그 사회 조직을 작 동시키는 다양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즉, 쌀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주식(主食)으로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조직 운영에 필요한 세금과 화폐로도 이용되었다.

고려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이 널리 확산되고 정착된 시기이다. 이것들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이들 사항은 17·18세기에 이르러서야 변화하기 시작하였지만, 이 시기 이후에도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말하자면 고려시대는 전통 시대에 쌀과 관련된 대부분의 특징이 성립된 시기이다.

고려시대는 쌀 중심의 농업 문화를 가졌다. 그런데 이 말이, 생산이나 소비에서 쌀이 가장 많은 양적 비중을 차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17·18세기까지도 벼농사는 전체 농업 생산에서 대략 30%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다. 또 그 주 소비층은 지배 계층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쌀은 우리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일반 백성의 주식은 아니었다. 이렇듯 농업에서 벼농사가 중심이었다는 말의 의미는, 국가가 쌀을 부세 수취 수단(賦稅收聚手段)으로 삼은 것으로 표현되듯이 그 양적 측면이 아니라 중요성과 가치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한반도는 자연 조건에서 벼농사에 유리한 곳은 아니다. 벼농사는 고온다습한 기후가 필요한데, 한반도는 벼농사를 짓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기온과 건조한 기후를 가졌다. 또 잦은 가뭄은 벼농사에 매우 치명적인 조건이다. 때문에 고려 국가는 일찍부터 이러한 자연적 취약성을 보완하여, 농민의 재생산을 도와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권농 정책(勸農政策)으로 나타났다. 지배층의 식량이자, 부세 수취의 수단을 쌀로 삼은 상황에서 이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고려시대에 쌀은 거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규모가 큰 교역에서는 저포(紵布)나 은병(銀甁)을 사용하였지만, 일반적인 소규모 거래에서는 분할 가능하고 저장에 유리하며 자체로 사용 가치를 지닌 쌀을 널리 이용하였다.

이렇듯 부세 수취의 수단, 지배층의 주식, 거래 수단으로서의 쌀은 민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벼농사가 잘 되는 것은 매우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되었고, 반대의 경우에는 천재지변으로 인식되었다. 쌀은 민간 신앙과도 다양한 관련을 맺었다.

우리나라에서 쌀은 대개 밥을 지어 먹지만, 다양한 가공 식품의 원료로도 사용한다. 전통적인 식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술과 떡을 쌀로 만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쌀은 음식 중의 음식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고려시대에 정착된 양상이다.

조선시대에는 논이 확장되었다. 벼농사의 확대는 인구를 증가시켰다. 앞서 말하였듯이 벼농사가 다른 곡물 농작에 비해서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고도의 노동 집약성이다. 벼농사 확대는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에서 어떤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가족이나 마을이라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특성을 가진 측면이 벼농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벼농사 확대는 사회적으로 어떤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왔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주로 18·19세기에 관한 일이다. 벼농사 확대는 조선에서 18세기 이후 나타났던 인구압(人口壓)을 돌파하기 위한 사회적 전략이었다. 그러한 인구압은 기존의 가족 제도를 완전히 새롭게 변모시켰다. 나아가 19세기에 들어서는 급격한 인구 증가의 결과로 자연 환경의 역습을 받게 된다. 여기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생태학적 역사학 연구의 일환으로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18·19세기는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전통적 모습으로 생각되는 특징의 대부분이 형성된 시기이다.

쌀은 주로 밥을 해 먹었지만 죽, 술, 떡 등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했던 것은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된 내용이다. 이 세 가지가 두루 검토되어야겠지만, 조선시대와 관련해서 주로 떡에 관해서 살폈다. 이것은 죽이나 술에 대한 연구가 떡에 대한 연구만큼 축적되어 있지 못하다는 기술적인 이유뿐 만 아니라, 떡이 가지는 예식적(禮式的) 측면, 즉 각종 절기(節氣)나 통과 의례(通過儀禮), 무속(巫俗)에서 떡이 가지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쌀의 문화적 측면은 밥보다는 떡의 형태로 두드러졌다. 한편, 우리는 볏짚을 흔히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통 시대에는 농민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한 소재였다. 나아가 일종의 신앙적 징표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은 ‘봉건주의’와 ‘근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종래 우리의 한국사 연구에서는 서구에 의해서 강요된 ‘봉건주의’에 대한 매우 잘못된 인식이 있었다. 사실 그런 인식 자체가 19·20세기에 있었던 역사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이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고 있다.

개항 이전에도 조선이 쌀을 수입하거나 수출하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개항과 함께 조선 쌀이 맞은 극적인 변화는 그것이 자본주의 원리의 적용을 받으며 수출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이래 쌀은 상품화가 많이 진행되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중요한 소비 품목이었다. 반면 공급량은 충분치 않았다.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조선 쌀의 무역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키면서 가장 원했던 것이 조선 쌀이었다.

일본의 조선 쌀에 대한 요구는 개항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러한 요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과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렸다. 조선을 합병한 이후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지세 개정(地稅改定)을 통해서 근대적 식민지 운영 체계를 갖추었다. 동시에 조선에 대한 효율적 지배를 위해서 물품의 대량 운송망을 건설하였다. 철도가 끝나는 곳에 항구를 건설하였고, 그곳에 새로운 도시가 들어섰다. 이들 도시의 배후에는 넓은 평야가 자리 잡고 있었고, 여기서 생산된 쌀은 이 새로운 도시들을 통해서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식민지적 착취가 근대적 효율성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대략 1890년대 이후로 일본이 조선 농업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환경과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것은 일본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조선 쌀의 수출은 단지 유통과 판매만 문제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품종의 도입이 요구되었고, 이것은 전통적 조선 쌀에 대한 종자 개량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쌀의 상품화와 지주제의 결합이라는 당시 조선 농업의 구조 속에서 가능하였다.

일본은 섣부르게 조선의 전통적인 지주 소작제에 영향을 주려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조선의 전통적 토지 소유 관계는 새롭게 전개되는 자본주의적 쌀 수출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내 지주들은 쌀값 상승이라는 우호적인 조건에서 쌀 수출로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이것은 지주제의 강화와 쌀의 단작화로 이어졌다. 한편 이 속에서 소작농의 처지는 대체로 악화되었다. 소작 기간은 짧아졌고, 소작농의 농업 자율성이 침해되었다. 이렇듯이 조선 쌀의 수출이 조선 사회에 가져온 사회 계층적 효과는 단순치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 조선의 벼농사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농업 공황이 발생하였고, 기존의 생산성 증가 방식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쌀값의 하락, 농가 수지의 악화, 지주의 소작료 수입 정체 등의 결과로 나타났다. 동시에 소작 쟁의(小作爭議)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전통적 지주 소작제를 통해서 농업 정책을 실시하던 조선 총독부가 기존 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점차 조선 총독부와 지주들의 긴밀하였던 관계에 불협화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45년 남한에서 쌀은 잠재적으로 마치 정치적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시기는 상황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세심한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 대개 그랬듯이 미군정 당국은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서툴렀다. 일제하 조선 대중의 쌀에 대한 인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 였고, 농업 정책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되었다. 이것은 대중들에게 배고픔과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배고픔과 분노로 표현되는 대중의 정서는 정치적 폭탄의 뇌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47년 이후 미군정 당국자들은 동아시아 지역 차원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쌀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 핵심은 일본의 반공 기지화였고, 이를 위해서 일본의 경제적 부흥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전쟁 이전 일본이 장악하였던 원료 공급지와 일본과의 관계를 재개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한편 이승만 정부도 일본에 대한 쌀 수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1950년에 일본에 쌀을 수출한다. 하지만 당시 남한은 쌀을 수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수출한 쌀은 사실 농민들 자신의 최소한의 소비도 억제하면서 마련된 것이었다. 이런 무리한 수출을 관철하기 위해서 정부는 사이비 과학과 과도한 형벌로 민중을 속이고 억압하였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끝 무렵까지 국민의 절대다수가 농민이었지만 1970년대 중반 주곡의 자급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쌀이 부족하였다. 일제강점기는 빼고라도, 건국 이후 한 세대 동안 절대적인 수준에서 쌀이 부족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산업화 세대는 바로 이 기간에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이런 결핍을 메우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통한 구호 및 식량 원조였다. 이것은 미국에게도 중요한 경제적·군사적 의미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길고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은 쌀과 보리를 주식으로 삼아 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디어 미국산 밀로 만든 빵에 적응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국민 식생활에 변화가 초래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게, 한국에게, 나아가서는 한국민의 감성과 미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72년까지 학교 급식은 미국의 잉여 농산물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청소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학교 급식은 어린이들의 영양과 체위 향상에 일조하였고, 우유나 빵에 친근한 어린이를 양성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까지도 국민학생의 30% 정도는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올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이 되기 전까지 쌀을 자급할 것이라고 천명(闡明)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1970년대 초반에 식량의 무기화 경향이 국제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이 농업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주곡인 쌀의 자급에 다시 노력하게 된 계기이다. 그 결과 쌀의 종자 개량을 통한 ‘녹색 혁명’으로, 1975년에 쌀의 완전 자급을 달성한다. 국민들이 세 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도 대단히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

지금이 우리나라에서 쌀에 관한 문화사가 나와야 할 적절한 시점인지는 의문이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정치사, 사회 경제사, 문화사가 단순히 필자의 개인적 관심이나 주제 선택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분류사는 그에 상응하는 현실과 그 현실에 상응하는 감성과 의식을 필요로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대단히 짧은 시간 만에 ‘봉건적’ 국가에서 강력한 군사적 권위주의 국가로, 다시 형식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국가로 변모해 왔다. 이 시기 동안 줄곧 ‘국가’는 대단히 강력하였고, ‘사회’는 너무나 왜소하였다. 그런 관계가 변해서 사회가 국가 기구에 대해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가지게 된 것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대적 독립성이 바로 사회사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는 이제야 사회사를 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에 막 들어섰는지도 모르겠다.

유효한 구분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문화사는 제대로 된 문화사와 사이비 문화사로 나눌 수도 있을 듯하다. 전자가 사회사의 연구 성과를 충 분히 반영한 문화사라면 그렇지 못한 것이 후자일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사에서 우리는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맥락에서 비추어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단순히 개인적 취미와 ‘고상한 교양’ 이상으로 발전하기는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는 좋은 문화사와 그렇지 못한 문화사가 나뉘는 기로에 해당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장을 표현하기 위해서 ‘압축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 ‘압축적’인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사회적 변화 역시 ‘압축적’이다. 우리 사회의 상당한 영역은 아직도 ‘봉건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사 연구의 사회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문화사는 사회사와 구분되면서 동시에 사회사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대동맥과 모세 혈관이 구분되지만 동시에 모두 혈관이라는 것과도 유사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록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지금이 문화사를 위한 최적의 조건 속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문화사적 관심과 연구가 시작될 시기로 보인다. 마치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논에서 다가올 여름을 위해서 논을 가는 벼농사처럼 말이다.

2009년 5월

[필자] 이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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