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3. 벼농사의 발전과 확산

벼의 수확과 탈곡

벼를 수확하는 도구로는 돌칼, 철칼, 돌 또는 철로 만든 낫류가 있다. 벼를 수확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초기 농경 단계에서는 삼각형 돌칼이나 돌낫으로 벼의 낟알만을 거두는 방법으로 수확을 하였지만, 점차 농경 기술이 발전하고 소를 이용한 우경(牛耕)이 행해져 경작 면적이 증가하면서 돌낫 또는 철제 낫을 이용하여 볏단 채 수확하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다.

벼의 낟알을 수확하는 방법은 세 가지의 분화된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수확을 담당한 조(組)가 낟알을 한 올씩 수확하여 일정한 양이 모이면, 이것을 운반하는 사람에게 담아 주어 미리 정해 놓은 곳으로 옮기게 한다. 낟알 수확이 끝난 곳에서는 다음 해의 농사나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커다란 낫을 이용해 벼줄기를 쓰러뜨리는 작업을 마지막으로 하였다. 이때의 진행 방향은 낫과 달리 뒤로 이동하면서 이루어진다.

<쇠낫>   
경남 김해 양동, 경북 포항 옥성리, 울산 하대에서 출토된 쇠낫이다. 쇠낫은 기원 이후에 새로 나타났는데, 벼를 줄기 채 수확하는 데 사용하였다. 7세기 중엽 이후에는 자루를 끼우는 부분도 쇠로 만들어 나무 자루에 쉽게 고정하여 힘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쇠낫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두 번째로 낫을 이용해 벼를 줄기 채 수확하는 경우는, 아마도 농경 면적이 확대되면서 그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수확기의 손실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낫은 1∼3세기에 돌칼과 함께 등장하였지만, 주로 낫만 보이는 4세기 이후에는 낟알을 수확하는 방식에서 벼 전체를 수확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5세기가 되면 새로운 철제 농기구의 발달로 수전 개발이 확충되면서 낫이 일반화되었다. 대규모 농경과 낫의 등장이 서로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다.

낫으로 수확하는 방법은 수확기의 손실을 최소화시키고 수확량을 증대시키는 작용을 해 각 단위 집단의 생산량이 늘어나 잉여 산물의 축적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 2섬(石) 5말(斗)을 수확하는 논에서 하루 8시간 노동할 때, 낟알 수확으로 하는 경우와 낫으로 볏단 채 수확하는 경우를 비교 실험한 결과, 돌칼로 낟알을 수확하면 약 20일 가량이 소요되었으나, 낫으로 하면 5분의 1 수준인 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25)

그런데 낫으로 수확하는 방법은 수확기까지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품질이 개량되어 벼의 숙성 시기가 같아야만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논에서 이루어지는 농경 방법의 변화가 전제되어야만 낫으로 수확하는 것이 일반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신라는 4∼5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갈돌과 갈판>   
강원도 강릉시 지경동에서 출토된 갈돌과 갈판이다. 갈돌과 갈판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용한, 곡물을 부수는 조리용 석기이다. 밑에 놓인 갈판과 갈판 위에서 음식을 가는 데 사용하는 갈돌이 한 짝을 이룬다. 길이는 각각 20∼40㎝ 전후가 보통이다.
<돌절구>   
충남 보령 관창리와 경기도 하남 미사리에서 출토된 돌절구이다. 절구와 절굿공이는 벼의 껍질을 까는 탈곡 도구이다.
<나무 절굿공이>   
광주 신창동에서 나온 나무 절굿공이이다.

한편, 벼를 가공하는 도구로는 갈돌과 갈판, 절구와 절굿공이가 있다. 갈판 위에 놓인 갈돌을 손에 쥐고 앞뒤로 밀면서 껍질을 깠고, 둥근 갈돌을 돌려 벼를 갈았을 것이다. 또 벼의 껍질을 까는 탈곡 도구로 절구와 절굿공이가 가장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고, 가장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충남 보령 관창리 유적에서 돌로 만든 절구가 출토되었고,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나무로 만든 절굿공이가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벽화나 신라 토우(土偶),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결 선생(百結先生)의 일화26)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디딜방아를 통해서 벼를 탈곡하였을 것이다. 다만 일반 백성들은 대개 현미 상태로 먹었고, 백미(白米)는 매우 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악 3호분 벽화의 디딜방아>   
안악 3호분 동측실 서벽 입구 북측 벽화에 그려진 디딜방아이다. 디딜방아는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로, 한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것과 두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보통 부엌 옆의 부속 건물 한 칸에 방앗간을 차리고 디딜방아를 설치한다.
[필자] 박찬흥
25)전덕재, 「4∼6세기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사회 변동」, 『역사와 현실』 4, 한국역사연구회, 1990 ; 이현혜, 「삼국시대의 농업 기술과 사회 발전」, 『한국 상고사 학보』 8, 한국상고사학회, 1991 ; 이홍종, 「한국 고대의 생업과 식생활」, 『한국 고대사 연구』 12, 한국고대사학회, 1997.
26)『삼국사기』 권48, 열전8, 백결 선생(百結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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