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1. 조선시대 벼농사의 추이

17세기 후반 이후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농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논 면적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표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총경작지 중 논의 비중’은 15세기 전반 상황을 전하는 『세종실록지리지』(1454) 기록과 18세기 초반 상황을 알려 주는 『경자양안(庚子量案)』(1720)을 비교한 것이다. 이 표는 해당 시기 총경작지 중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300년 가까운 긴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총경작지 중 논이 차지하는 비율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179) 즉, 18세기 초반까지도 벼농사가 조선 농업에서 양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없다. 또 조선에서 벼농사의 중심 지역인 삼남(三南), 즉 충청·경상·전라도에서의 벼농사 면적조차, 각 도별 총 경작 면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표에 나온 수치의 단위가 조선의 전통적 토지 측정 단위인 결부(結負)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180) 따라서 논밭 비율을 절대 면적으로 파악하면, 논의 비중은 더욱 줄어든다.

<『경자양안』>   
조선 왕조는 각 군현별로 전답의 위치·크기와 납세 대상자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안을 작성하였다. 양안은 각 개별 필지를 대상으로 실제 측량하는 과정인 양전(量田)을 거쳐 작성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매년 전답에서 조세를 거두었다. 사진은 1722년(경종 2) 경상도 창원부에 소재한 용동궁(龍洞宮) 전답에 대한 양안이다. 1719년에서 1720년에 걸쳐 삼남(三南) 지역에서 행한 경자양전을 거쳐 각 군현별로 양안을 작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용동궁에 관련된 부분을 뽑아서 만든 궁방양안(宮房量案)이다.
<표>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총경작지 중 논의 비중
단위 : %
도별
출전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황해 평안 함길
『세종실록지리지』 37.9 12.7 40.3 39.3 47.9 15.7 10.3 4.7
『경자양안』 33.9 - 37.1 43.5 48.5 20.5 20.8 8.2

18·19세기에 조선 농업에서 가장 뚜렷한 현상은 논의 확대이다.

표 ‘18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총경작지 및 논의 비중 변화’에서 『경자양안』의 총경작지 면적과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1909)의 총경작지 면적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두 통계값의 면적 파 악 단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성과에 따르면, 『경자양안』 이후에 조선은 총 경작 면적에서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더 이상 경작지로 확대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181) 조선 정부가 1720년(숙종 46) 경자양전(庚子量田) 이후 1901년 『광무양안(光武量案)』까지 양안을 개정하지 않았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알았기 때문이다.182) 제언(堤堰)을 쌓아서 쉽게 논으로 바꿀 수 있었던 곳은 이미 16·17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개발이 완료된 상태였다.183) 그 결과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논에 대한 요구는,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였다.184) 하지만 이것이 보여 주는 진정한 사회적·농업적 의미는, 조선 안에서 이제 더 이상 경작 면적 자체를 늘리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표> 18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총경작지 및 논의 비중 변화
구분
도별
『경자양안』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
총경작지(結) 논의 비율(%) 총경작지(町) 논의 비율(%)
경기 101,256 33.9 146,185.3 56.7
강원 44,051   175,850 28.5
충청 255,208 37.1 242,911.8 50.9
경상 336,778 43.5 284,400.1 64.8
전라 377,159 48.5 363,912.9 50.2
황해 128,834 20.5 229,821.4 29.2
평안 90,804 20.8 576,028.4 11.2
함경 61,248 8.2 283,392.3 8.9
총계 1,395,333
(1,070,401)

(43.3)
2,302,274.4
(1,037,410.1)

(55.3)
✽( )는 경기·충청·경상·전라도의 통계값

『경자양안』 이후 총 경작 면적에 별다른 변동이 없었던 것에 비해서, 논 면적은 큰 폭으로 늘었다. 이 표에서 보듯이 논 비중이 높지 않았던 경기 이북을 제외하고 경기와 삼남만을 따진다면, 1720년부터 1909년 사이에 총경작지 중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43.3%에서 55.3%로 12% 증가하였다. 실제 증가폭은 이보다 훨씬 컸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경자양전에서는 경작지를 결부 단위로 파악하였지만,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에서는 절대 면적인 정(町)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제로 이 시기 동안에 논은 얼마나 늘어났을까?

<표> 『여지도서』와 『광무양안』의 경기도 논밭 비율
구분
도별
『여지도서』 『광무양안』
밭(결) 논(결) 논/논+밭(%) 밭(결) 밭(결) 논/논+밭(%)
과천 984.543 580.518 37.1 530.561 856.829 61.8
안산 603.554 549.045 47.6 384.739 952.637 71.2
안성 1,179.757 1,443.522 55.0 646.722 1,632.638 71.6
양성 1,976.562 1,080.317 35.3 604.127 1,624.236 72.9
여주 2,669.814 2,124.094 44.3 1,183.56 2,843.089 70.6
음죽 1,070.268 1,195.483 52.8 370.606 1,295.549 77.8
이천 1,450.4 1,592.188 52.3 747.884 2,384.122 76.1
진위 1,154,273 1,134.488 49.6 546.229 1,385.628 71.7
광주 4,207.544 1,868.34 30.8 2,680.553 2,995.081 52.8
수원 6,328.87 5,275.74 45.5 2,472.93 6,684.314 73.0
양지 524.854 485.484 48.1 349.905 764.23 68.6
용인 3,406.317 1,313.002 27.8 1,372.133 2,170.841 62.3
죽산 342.395 125.393 26.8 598.54 1,724.923 74.2
25,899.144 19,487.614 42.9 12,488.489 27,314.117 68.6

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광무양안』의 경기도 논밭 비율’은 비록 조선 전체 경작 면적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지만, 경기 지역에 한해서 논 과 밭의 상대 비율 변화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조선 정부가 한 마지막 양전 사업 결과인 『광무양안』은 전통적 토지 파악 단위인 결부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185) 이 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에서 1901년 사이에 경기도의 총 경작 면적은 약 12.3% 감소하였다. 밭은 51.8% 감소한 반면에 논은 40.2% 증가하였다. 1901년(광무 5)의 밭 면적은 1759년 밭 면적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반대로 논은 절반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이 기간 중에 총 경작 면적 중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42.9%에서 68.6%로 증가한다.

논에는 벼 이외에 다른 작물을 심지 못하지만, 밭은 다르다. 밭에서는 여러 가지 잡곡과, 지금도 그렇듯이 다양한 양념류와 채소류를 재배한다. 고추, 배추, 장을 담그기 위해 필요한 콩 등이 그런 것이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논은 벼농사 이외에 다른 용도가 없지만, 밭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18세기 이후에 조선은 곡물 재배에서 쌀에 거의 모든 것을 거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반 『여지도서』(1759)에서의 논밭의 상대 비율과 20세기 초 『광무양안』(1901)에서의 논밭의 상대 비율은, 약 140년 만에 거의 완벽하게 자리를 바꾼 셈이다.

이 표에 따르면 밭 면적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18·19세기 조선 상황을 반영하였다. 사실 17세기부터 정부는 논밭 구분 없이 차차 세금을 쌀로 거두기 시작하였다.186) 이것은 사회적으로 쌀이 중요한 상품 작물로 자리 잡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였다. 18세기 중후반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1,000개에 이르는 장시(場市)가 나타났다.187) 오일장(五日場)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장시에서 가장 빈번한 거래 품목이 바로 쌀이었다. 농민들이 필요한 물건을 장에서 구하려면, 집에서 쌀을 가지고 가서 바꾸어야 했다. 그 때문에 쌀은 직접적인 소비품일 뿐만 아니라, 자체가 화폐 기능을 하였다. 쌀이 화폐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더 오래된 일이지만, 그 기능이 서민의 삶에서 이렇듯 확대되었던 것은 분명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때문에 정부의 조세 수취 수단도 바뀌었다. 즉, 전에는 밭에서는 잡곡으로 세금을 거두었는데, 이제는 밭에서도 쌀로 세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시장>   
19세기 말에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시장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다. 소, 곡물, 포목, 엿 등을 사고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7세기 이후 쌀이 중요한 상품작물로 자리 잡으면서, 쌀은 장시에서 화폐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부는 수취량을 줄여 주지 않고 단순히 수취 수단만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즉, 전에 콩 1가마를 받았던 곳에서 이제는 콩 대신 쌀 1가마를 받았다.188) 이것은 농민들 입장에서는 세금이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어떤 밭작물도 쌀보다 비싸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농민들은 소출(所出)이 적은 밭의 경우에는 농사를 지어도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밭농사를 포기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189) 역설적이게도 평지에 있는 밭이 버려질 때, 산에서는 세금을 피할 수 있는 화전(火田)이 늘어났다. 이렇듯 18·19세기를 지나면서 벼농사는 조선의 농업에서 명실상부하게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필자] 이정철
179)이호철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총경작지 면적에서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이호철, 「조선시대 도작 농업의 발전과 인구 증가」, 『경북대 농학지』 7,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1989, 214쪽). 이것은 이미 조선시대의 농업이 경작지 확대를 통해서 산출량을 늘리는 단계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180)결(10부(負)가 1결(結)이다)은 토지 절대 면적이 아닌, 생산량에 따른 상대적 토지 면적이다. 즉, 절대 면적이 서로 달라도 그곳에서 수확된 곡물 생산량이 같다면, 그 두 곳의 토지 면적은 같은 결 수로 파악된다. 따라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은 곳은 더 적은 토지 면적으로, 생산량이 낮은 더 넓은 곳과 같은 면적으로 파악된다. 논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다른 모든 밭작물에 비해서 높기 때문에, 논 1결은 밭 1결 비해서 절대 면적에서 훨씬 적었다.
181)『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43, 숙종 14년 4월 14일.
182)『경국대전』은 20년마다 모든 경작지를 재조사하도록 규정하였다. 즉, 주기적으로 경작지를 재조사하여, 새로 늘어나는 경작지를 과세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균등 과세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건국 초 상황에 기초한 규정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더 이상 경작지가 늘어나지 않자, 이 규정은 의미를 잃었다. 18세기에 양전 사업을 실시하지 않은 이유가 결코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183)이태진, 「16세기의 천방(보) 관개의 발달 ; 사림 세력 대두의 경제적 배경 일단」,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 논총』, 한우근박사 정년기념 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81. 그 시기에 제언을 쌓는 것은, 관(官)과 결탁할 힘이 있는 양반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던 일이었다. 제언을 쌓으려면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여야 했다. 이것은 제언을 쌓을 해당 지역 수령을 통해서 지역민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 당시에는 힘 있는 양반이 제언을 쌓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184)임학성, 「조선 후기 번답(反畓)의 성행과 그 배경」, 『인하 사학』 2, 인하대학교 역사학회, 1994.
185)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광무양안』의 경기도 논밭 비율’이 전국의 토지를 포괄하지 못하는 것은 『광무양안』이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광무양안』 기록 중에서 비교적 기록이 충실한 경기를 선택해서 18세기 중반에서 조선 왕조 말까지의 경작지 변화를 살폈다.
186)정연식, 「조선 후기 부세 제도 연구 현황」, 『한국 중세 사회 해체기의 제 문제』(하), 한울, 1987.
187)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2005. 13장, 장돌뱅이의 애환(유필조) 부분에 상세하다.
188)정약용(丁若鏞), 『경세유표(經世遺表)』, 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7.
189)18세기에 농촌에 거주하는 지식인들의 상소에는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많았다. 이들은 해결책으로 소출이 적은 밭에 대해서 세금을 낮추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승정원일기』 정조 12년 8월 18일).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