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5. 쌀밥·떡·볏짚

쌀밥

이제까지 우리는 벼농사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쌀의 생산적 측면에 해당된다. 이제부터 쌀의 소비적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쌀밥, 떡 그리고 벼농사의 부산물인 볏짚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들이야말로 벼농사보다 훨씬 더 쌀의 문화사적 측면과 관련된다.

여러 번 지적하였듯이, 조선시대 대부분 기간 동안 대다수 백성들에게 쌀은 주식이 아니었다. 주식으로 하기에 쌀은 너무 귀하였고, 너무 적은 양만 생산되었다. 쌀밥은 매우 특별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18세기를 지나면서 논 면적은 급격히 늘어났고 밭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것은 사회 전체가 쌀 생산에 매달리기 시작하였음을 뜻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높아진 인구압이 이런 현상의 배경이었다. 제한된 땅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벼농사가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백성들에게도 쌀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 쌀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모습은, 1833년(순조 33) 한양에서 일어났던 ‘쌀 폭동’을 통해서 도 확인된다.216) ‘쌀 폭동’은 적어도 한양에서는 중간층 이하 사람들조차 쌀을 주식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식생활에서 쌀 소비가 늘어났음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저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도 언급하였다. 그는 거의 100년 이래 쌀을 먹는 풍조가 만연하여, 옛날에 잡곡을 심었던 땅 중에 논으로 바뀐 곳이 무척 많다고 말하였다.217) 이 말이 19세기 전반에 나온 것임을 감안하면, 18세기 전반이나 중반 이후로 쌀을 먹는 풍조가 퍼져 나갔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서유구 초상>   
19세기에 그린 서유구의 초상화이다. 그는 당시에 쌀을 먹는 풍조가 만연하여 잡곡을 심던 땅이 논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말하여 쌀 소비가 늘어났음을 밝혔다.

물론 농민들은 대부분 인구압으로 경작 규모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1년 내내 쌀을 먹을 수는 없었다. 또 쌀을 먹는다고 해도 대개는 도정(搗精)을 좀 덜한 쌀을 먹었다.218) 추수 후부터 초봄까지 쌀을 먹었고, 늦은 봄부터는 대개 보리를 먹어야 했다. 그조차 여의치 못하면 구황 작물(救荒作物)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농민들의 쌀 소비는 각자의 살림살이 정도에 따라, 해마다의 풍흉에 따라 많은 편차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18·19세기에 쌀은 보통 사람의 주식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쌀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언제나 충분한 양식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쌀밥을 먹는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쌀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의 이런 집단적 경험과 기억은 쌀이야말로 이상적 먹을거리이며, 밥은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는 강력한 인식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조선시대는 쌀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관습과 속담을 남겼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 시골에는 집집마다 성주 단지가 있었다. 이것은 집을 지키는 가신(家神)들 중 으뜸으로 꼽히는 성주신을 모신 쌀 항아리였다. 이 성주 단지를 대청(혹은 마루) 한 구석에 모셔 두고 집안의 안녕을 바랐다. 이것은 쌀 자체에 곡령(穀靈), 즉 곡식의 영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밥술이나 뜬다.”, “밥줄 떨어진다.”는 표현은 생계의 넉넉함이나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을 말한다. 밥은 그 자체가 생계와 동일시되었다. “밥숟갈 놓다.”는 표현은 죽었다는 것의 다른 말로, 밥을 생명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표현이다. 또 사람이 죽어갈 때 대나무 통에 쌀을 담아 귓가에 흔들면 목숨이 잠시 연장된다는 말도 있었다. 이 말은 쌀이나 쌀밥에 대한 바람이 얼마나 절실하였는지를 담고 있다. 평상시에 얼마나 원하였으면, 죽어 가는 순간에 죽음조차 잠시 미룰 수 있었겠는가.219)

<성주 단지>   
진성 이씨(眞城李氏) 집안에서 성주신을 모시던 쌀 항아리이다. 우리 조상들은 집안 구석마다 각각 그 장소를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 중 성주신은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가신 중 가장 으뜸으로 섬겼다. 성주 단지는 대청에 모셔 두고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였는데, 추수한 후 맨 처음 찧은 쌀을 넣어 두었다.
[필자] 이정철
216)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 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84쪽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2005. 12장, 서울의 장사꾼들(이욱) 부분에 상세하다.
217)한국학문헌연구소, 『농서(農書)』 36, 의상경계책(擬上經界策) 하(下), 한국 근세 사회 경제사 총서 3, 1986.
218)『승정원일기』 정조 23년 3월 19일.
219)이규태, 앞의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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