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3. 조선 전기 대일 사행원의 일본 인식

조선 전기 사행원의 일본 인식 특성

조선 전기 지식인의 일본관을 구명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대일 사행원 가운데 이예, 송희경, 신숙주를 선택하여 그들의 일본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모두 세종대에 일본에 사행을 다녀왔고, 대일 외교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거나 일본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출신 배경 및 대일 관계에서 맡은 직책과 활동이 각각 달랐다. 또 시기적으로도 신숙주의 경우 사행은 세종대에 다녀왔지만 대일 외교에서의 주 활동 시기는 세조대와 성종대 초기였다. 그의 일본 인식을 살펴보는 데 주된 자료가 된 『해동제국기』도 이 시기에 찬술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들의 일본 인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종합해 봄으로써 조선 전기 대일 사행원의 일본 인식의 특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조일 관계에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던 세종대와 세조·성종대의 일본 인식의 차이점 또는 변화 양상을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공통점을 살펴보면 첫째, 1418년(세종 1)의 쓰시마 섬 토벌 이후 쓰시마 섬과 일본 본토의 지리적·정치적 관계를 확인하게 되었고, 무로마치 막부 쇼군과 일본 서부 지역의 호족 간의 세력 관계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보고에 의해 막부와 쓰시마 섬에 대한 정책이 변 화하게 되었고, 대일 통교 체제도 이른바 다원적 통교 체제로 확립되었다.

둘째, 실용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문물을 인식하고 있었다. 송희경이나 신숙주의 경우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 이적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몹시 교조화하거나 경직되지는 않았다. 일본의 문화나 풍속에 관해서도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야만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았고, 가치 중립적인 입장에서 담담히 소개하면서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요소는 16세기 이후의 일본 인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조일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도 정치적 명분론, 예컨대 일본을 교화한다거나 경제적 교류를 무시하는 등의 태도에만 머물지 않고 조일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일본의 경제와 기술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도입을 시도하였으며, 조선에서 산출되지 않는 일본의 특산물 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하였다.

셋째, 국가나 민족이라는 전체적인 일본에 대해서는 이적관을 간혹 표출하기도 하였지만, 개인적인 접촉과 체험에 따른 일본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우호적인 인식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들이 일본인을 직접 만나 체험한 사실과 관련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여겨진다.

넷째, 일본에 대한 관심이 주로 정치·군사·경제의 측면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일본의 유교 문화나 불교 문화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는 것도 공통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차이점 또는 시간적인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첫째, 일본의 정치와 권력 관계, 조일 간의 외교 의례 등에 대한 인식의 심화를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천황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예와 송희경의 저술에서는 천황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숙주에 이르러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천황의 위상을 인식하였고, 천황과 막부 쇼군의 정치적·제도적 권력 관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 무로마치 막부 쇼군 이 일본 국왕의 자격으로 조선 국왕과 대등한 의례를 취하였던 교린 체제의 문제점도 제기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1479년(성종 10) 일본에 통신사행을 파견하려 하였을 때 일본 천황과 국왕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 올 것을 지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오면 막부 쇼군뿐 아니라 천황에 대해서도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숙주가 『해동제국기』 ‘천황대서’에서 그만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만이 아니라 당시 조일 관계의 성격과 시대적 배경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해동제국기』는 성종대 초기 조일 관계에서 체제 정비의 성격을 띰과 동시에 조선 전기 일본 인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일본관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송희경과 신숙주는 모두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 이적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송희경의 일본 이적관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당시 상황과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신숙주는 직설적인 표현은 없지만 좀 더 체계화되고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이러한 차이는 기본적으로 세종대의 조일 관계와 세조대 말기부터 성종대 초기의 조일 관계 성격에 변화가 있었으며, 조선 조정과 무로마치 막부의 위상이 달라짐에 따라 일본관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필자] 하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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