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이방인이 본 우리를 내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주관(主觀)이라고 한다. 굳이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따지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주관적’이라고 하면 ‘객관적’이라는 용어와 대비되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않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공간적·시간적으로 진행할 경우에도 이러한 점이 크게 작용한다. 다른 나라나 민족과 대비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때, 양자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것의 장점을 과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역사와 문화에서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의 사례를 찾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他者)의 시선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한국적 정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구명하는 데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방인이 본 ‘우리’의 모습이 ‘객관적’이거나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관찰자의 시공간적 경험이 이들의 관찰기(觀察記), 여행기(旅行記) 등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에서는 먼 고대부터 가까운 당대까지를 대상으로 외국인이 본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시대까지 고대사의 영역에서 우리나라의 이미지는 주로 중국과 일 본의 역사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국경이 맞닿아 있는 중국의 정사(正史), 특히 기원후 1세기에 편찬된 『한서(漢書)』, 3세기 말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등을 통해 고대 우리 민족의 삶과 풍속이 소개되었다. 고대 중국인의 대외관은 세계의 중심에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중화(中華)가 존재하고, 중화의 주변 지역에 오랑캐인 이(夷)가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였다. 즉, 중국 민족 중심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정립하기 위해 주변 민족을 차별화하거나 배척하였다. 따라서 중국 정사에 나타난 고대 한민족에 관한 이미지는 이러한 측면에 유의해 검토하여야 한다.

한편 일본은 7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역사적 자기 인식이 형성되었고, 자신과 다른 외국에 관한 정보를 『일본서기(日本書紀)』(720), 『속일본기(續日本紀)』(797) 등의 편찬에 반영하였다. 일본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는 인식 속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의 대외 관계를 ‘조공(朝貢)’이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아랍·페르시아 상인의 기록을 통해 고대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알려진 점 역시 중요하다. 이들은 8세기에서 9세기경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당나라의 수도 장안-신라의 수도 경주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실크 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접한 신라를 이들은 ‘동양의 유토피아’로 묘사하였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외국인의 우리나라에 관한 인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접촉이 많을수록 서로 상대방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긴다. 특히 10세기에서 12세기에 중국인이 바라보는 고려 사회의 모습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와 송나라는 북방 민족과의 관계에 대비하여 고려와 연대하려는 송나라의 정책과 선진 문물을 수입하려는 고려의 적극적 의지가 결합하여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저자인 서긍(徐兢)이 고려를 찾은 1123년(인종 1)은 북송 말기에 해당한다. 서긍은 한 달 정도 체류하면서 고려의 역사, 정치, 경제, 종교, 풍 습 등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였다. 서술 주체의 입장에서 저술된 관찰기, 견문기의 특징은 자신과 타자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서긍은 중국과의 동질적인 요소인 ‘중화’에 의한 교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와 함께 차별적인 요소인 ‘문명화된’ 중국과 대비된 ‘비문명적인’ 고려의 문화와 풍속을 함께 살피고자 하였다. 반면 고려인은 중국의 문물을 따르면서도 고유성을 강조하고, 중국과 자주적이며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문화와 풍속에 관한 서긍의 긍정적 평가는 중국 문화의 전파를 통해 ‘문명화’가 전달된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부정적 묘사는 중국의 문화적 우월감을 대비시키는 표현, 즉 자국 중심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다원적 국제 관계에서 일원적 국제 질서로 변해 갔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 중심적 국제 관계가 성립되었는데, 여기에 고려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고려 말 조선 초에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국제 관계의 커다란 변동과 함께 대륙 세력의 우리나라에 관한 인식에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몽골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몽골은 ‘하늘이 승인한’ 자국이 세계적인 유목 지배를 달성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고려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강국인 몽골과 상대적 약소국인 고려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형’으로서 몽골은 ‘동생’인 고려에게 세공(歲貢)을 과중하게 요구하거나 ‘침략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몽골이 다른 나라와 민족은 ‘정복’하였지만, 유독 고려에 대해서만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 맺은 점이다. 왜냐하면 몽골은 강성하였던 고구려의 연장선에서 고려에 강대국 이미지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이후 몽골은 점차 복속된 고려에 대해 지배의 강도를 높여 갔다. 특히 원나라가 ‘중화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문명을 기준으로 주변국을 등급화하며 ‘야만 시’하였고, 고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약자인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지만, 14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급변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들어섰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를 이어 조선이 건국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관한 인식을 기존 『선화봉사고려도경』과 1487년(성종 19)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의 견문기 『조선부(朝鮮賦)』를 통해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수립해 갔다. 반면 조선의 지식인은 중국의 ‘조선관’에 내재되어 있는 부정확한 내용을 고치려고 하였고, 적극적으로 조선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는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 및 태국, 미얀마 등 몇몇 동아시아 국가에 한정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서 지리 지식의 확대와 더불어 조선인의 외부 세계에 관한 지식, 특히 서양에 관한 인식이 확대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는 선박의 난파로 인해 조선에 상륙한 서양인과의 조우를 통해 서양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선교나 교역 등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나 서양 상선을 통해 서양인과 접촉하였다. 조선 사회에 서양과 서양인에 관한 정보가 축적됨과 동시에 서양인이 귀국한 후 남긴 여러 여행기와 관찰기를 통해 조선의 사정이 유럽 지역에도 알려졌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하멜 표류기』는 1668년에 네덜란드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한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약 13년에 걸쳐 체류하면서 경험한 것을 기록한 이 책은 이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잇따라 출판됨으로써 조선에 관한 서양의 인식을 심화시켰다. 18세기에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이 당시 유럽인에게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측량과 통상을 목적으로 한 서양 선박의 기록을 통해 이전 시기 지도에서 빠져 있거나 섬으로 표시된 조선이 점차 대륙과 연결된 반도로 분명하게 표시되었다.

전통시대에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관한 이미지가 생겨났다면, 개항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진행된 서구와의 접촉과 이들에 의한 우리나라 관찰기를 통해 조선이 구체적으로 서양에 알려졌다. 전통시대에 중국이 화이론에 입각하여 조선을 보았다면, 19세기 후반 이래 서양인은 자신의 문명관(文明觀)을 투영하여 조선을 바라보았다. 특히 서구의 강대국이 제국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문명적인 서양에 대비된 야만적인 동양이란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의 논의가 반복 재생산되었다. 문명과 야만의 대비는 유럽인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와 결합하였고, 이른바 ‘비문명적’인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정당하거나 합리적이라는 논리를 낳았다. 이러한 서양의 동양에 관한 사고-지배 방식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하는데, 개항기 조선을 방문하였던 서양인의 글쓰기는 이에 의거하여 조선에 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물론 긍정적인 이해 역시 함께 기록하였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금강산을 비롯하여 조선의 산수는 아름다우며, 조선인은 체격도 좋고 잘생겼으며, 심성은 착하고 친절하며, 예술적 재능이 풍부하여 음악과 미술에 소질이 풍부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아울러 지적 능력이 뛰어나며 연장자를 공경하는 풍속도 서양인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착한 미개인’의 이미지가 컸다. 그들의 시선에서 조선인의 ‘야만’을 상징하는 것은 위생 문제, 여성의 낮은 사회적 위상, 게으름, 정치의 후진성에서 비롯한 부패한 관리의 모습 등으로 정형화되었다. ‘은둔국’ 혹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등은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조선을 가리키는 이미지가 되었다.

서양인의 ‘문명 대 야만’의 시선은 한말 일제 강점기에도 스테레오 타입처럼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한말 시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조선은 세계열강의 각축장(角逐場)이면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지배권이 확대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국가 사이의 경쟁에서 뒤처진 대한제국은 서구인의 시선에서 보면, ‘문명화’된 서양과 대비되거나 심 지어 정체된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초반 조선은 여전히 ‘미신의 나라’였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조선인에게 ‘애정’을 지닌 서양인은 조선인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인의 기록은 조선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더욱 강조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조선의 사정은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인에 의해 가공되어 서양 세계에 전달되었다. 일본은 ‘야만’의 조선을 ‘문명화’한다고 강조하였고, 일제와 일제의 선전에 속은 서양인은 “한국인은 열등 민족이어서 독립, 자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라고 이해하였다.

그렇지만 수동적으로만 보이던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한 적극적 활동은 서양인의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말 시기부터 국망(國亡)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병 활동에 관해 일본은 ‘비적(匪賊)’으로 알려지기를 바랐지만,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McKenzie) 등은 독립된 국가의 백성으로 살고자 한 조선인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1919년 온 겨레가 일떠서 3·1 운동을 일으켰을 때 일본은 조선인이 여전히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애정을 지닌 서양인들은 일제가 무력으로 시위를 탄압한 행위와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 떨쳐 일어날 수 있는 존재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조선인의 민족 해방 운동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서양인의 관심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님 웨일스(Nym Wales)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혁명가와의 만남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이 일제에 저항해서 무력 항쟁을 벌이고, 이를 통해 자유와 인간 해방을 쟁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조선에 ‘애정’을 지닌 서양인들은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내내 전개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노력을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훌륭한 역사적 귀감(龜鑑)으로 전해 주었다.

이방인이 남긴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은 우리의 정체성, 고유성을 타인의 시각을 통해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런데 외국인의 관찰기나 여행기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공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본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를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고대사의 경우 중국인은 우리나라에 문명을 전달하였다는 입장이었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인식은 반복 재생산되었다. 북방 민족인 원나라는 초기에 강성하였던 고구려와 문명화된 고려의 이미지를 중첩하여 인식하면서 고려를 ‘맹약’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후 점차 원나라 중심의 국제 정세가 정착되자 고려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표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명나라의 경우 『선화봉사고려도경』, 『조선부』 등을 통해 ‘조공-책봉 체제’에 입각하여 화이관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서구와의 접촉을 통해 조선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이 전달되는 통로가 열렸지만, 조선을 섬으로 알거나 삽화를 통해 상상의 동물이 사는 곳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개항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서양과 접촉하면서 조선에 관한 좀 더 많은 정보가 전해졌으나, 제국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양인이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은 조선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문명과 야만을 대비하여 조선을 비문명한 지역으로 보는 스테레오 타입의 논의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통감부를 세우면서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한 일본은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고 강화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고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사람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에 대해 많은 당혹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역사적 교훈은 외국인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는 항상 타자인 우리나라에 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하멜은 표류한 후 조선인과 처음 만났을 때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조선인은 “인정이 많아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을 아끼지 않고 외국인을 따뜻하게 대우한다.”라고 하며 호의 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는 한말 일제 강점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조선은 주위의 강대국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조선인은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서양인의 시선은 달랐다. 이들은 훌륭한 도자기와 예술품을 만든 조선의 과거는 세계에 자랑거리로 내세울 것이 많음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쇠락한 이유는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문명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들의 확신은 조선인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노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이렇듯 부정적 이미지는 타자에 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이방인이 우리나라를 보는 시선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우리가 ‘타자’인 외국인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많은 외국인이 왕래하거나 거주하고, 혼인을 통해 우리와 함께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데 외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이나 행동이 사회적 이슈가 되듯이 우리가 다문화 가정, 제3 세계 출신에 대해 서양인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았던 부정적 시선을 그들에게 투영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과거에 서양인이 그러하였듯이 우리 역시 이 땅에 함께 거주하는 타자에게 부정적 인식을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과 유혹을 분명히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즉, 타자에 관해 깊은 이해와 애정이 바탕이 될 때 그들에 대한 부정확하고 왜곡된 인식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의거할 때, 식민지와 외환 위기 등의 어려움을 겪어 내고 세계 10위권의 경제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가 세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 의식도 형성될 것이다.

2009년 10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필자] 류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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