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를 내면서

인간이 흙을 원료로 만든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아마 그릇일 것이다. 흙에 물을 붓고 잘 빚어 열을 가하면 단단해진다는 원리를 발견한 순간 그릇은 탄생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릇을 만들고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각 나라마다 입장이 다르고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최근에는 그릇의 사용 기간이 국력과 비례하기라도 하듯이 경쟁적으로 그 발생 시한을 앞당기려는 경향도 보인다. 이는 그릇의 제작이 인간의 지적 능력과 상상력, 자연 환경 등의 응용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기술력과 경제력 등이 결합된 특정 지역 집단의 힘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처음 그릇이 제작된 시기는 대략 만 년 전인 신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이 당시 그릇을 무엇이라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이 그릇들을 토기(土器)라고 부른다. 토기는 한반도에서 우리 선조들이 최초로 흙으로 만들고 불에 구워 사용한 그릇인 셈이다. 이후 토기는 제작기술의 발달과 다양한 소유욕에 힘입어 꾸준히 발달하였다. 일상적인 식기와 저장용기로서 뿐 아니라 때로는 다양한 장식으로 소유자의 지위와 권세를 상징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제의(祭儀)에 맞게 형태와 문양이 변형되기도 하였다.

토기 제작은 흙을 기본적인 원료로 사용하지만, 점차 어느 지역의 흙을 어떻게 반죽하고 건조시켜서 구우면 단단해지는가에 대한 선 험적인 지식이 제작을 담당한 사람들에게 축적되었다. 또 장식을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형태를 변형시키고 주변의 자연이나 다른 재질의 물건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보다 높은 온도로 굽기 위해 필요한 여러 장치와 시설을 고안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국가나 집단의 기술력과 비례하였다. 이를 위해 특정 원료를 독점하거나 기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으며, 이를 지배하는 자가 그릇을 기념비(紀念碑)적인 용도로 사용하는데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결국 토기의 제작은 집단이나 국가의 권력과 유착 관계를 형성하였고, 토기 생산지역의 확산은 곧 국가 권력의 영향과 확산을 의미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접어들면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는 신라 및 가야 토기가, 고구려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백제에서는 백제 토기가, 각 지역민들의 미감과 환경에 맞게 제작되었다. 생산 시스템도 보다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발전하여 여러 기의 토기 가마[窯]를 축조하고, 소성시 온도와 분위기를 조절하여 오늘날 산화와 환원으로 부르는 불꽃으로 그릇을 구웠다. 보다 강도 높은 그릇의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곧 신분에 따른 그릇의 차별화에도 박차를 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접어들면 숙련된 기술을 익힌 도공집단에 의해 대량의 표준화된 토기가 제작된 점이 주목된다. 물론 여기에는 한반도 사람들만의 힘만이 아닌 외부와의 물적, 인적 교류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중국의 선진 토기 제작 기술은 한반도에 유입되어 장식과 원료 정제 기술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중국은 삼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토기와 다른 고화도의 자기, 즉 청자와 백자를 이미 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는 삼국이 앞 다투어 수입하면서 당대 문화 교류의 생생한 증거로 남아 있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토기의 제작과 소유가 국가 권력과 관련을 맺 으면서 토기의 사용은 더욱 분화되었다. 음식 기명으로서 뿐 아니라 신분에 따른 부장용 그릇으로 사용되어 각 지역별로 차이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는 적게는 서너 점에서 많게는 수백여 점의 토기를 매장시 소비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도 고분에 부장품으로 토기를 여러 점 부장하였지만 신라와 가야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대신 궁성과 산성에서 많은 수의 토기가 발견되었고. 고구려의 경우 대부분 토기는 산성과 보루(堡壘)와 같은 방어시설의 조사에서 수습되었다.

삼국이 통일된 후 토기는 삼국의 분화된 지역 양식에서 신라 양식을 중심으로 백제와 고구려 토기 양식을 수용한 통합 양식을 선보였다. 경주를 중심으로 나타난 통합 양식은 다시 지방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횡혈식 석실분이나 사지(寺址) 및 안압지를 비롯한 왕경(王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제작기술의 발달로 계급에 따른 토기의 질적 차이는 더욱 심화되어 육안으로도 쉽게 구별되었다. 다양한 장식물이 별도로 성형된 후 부착되었는데 부착된 형태는 다산이나 사후의 안녕을 비는 상징물이 대부분이어서 당시의 사상적 경향도 엿보게 한다. 생산의 효율에서도 물레 사용의 보편화로 표준화된 크기의 접시나 완, 그리고 병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져, 외형으로는 중국 자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여기에 나무 재를 이용한 고화도 재유와 납이 주성분을 이루는 연유도기의 생산, 고화도 환원염 소성이 가능한 가마의 운영은 자기생산의 서막을 알리기에 충분하였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인 나말여초의 한반도는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을 겪었지만 새로운 그릇의 탄생을 위한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이 당말(唐末)의 혼란기로 접어들어 청자 제작이라는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의 유출이 가능해지면서, 절강성(浙江省) 월주(越州) 지방 일대의 장인들이 한반도에 찾아와 기술전수를 하게 되 었고, 이제까지의 토기와 차원이 다른 자기가 우리 땅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자기는 토기보다 굽는 온도와 강도가 높은 탓에 애초부터 태토와 유약의 원료와 조성, 가마 구조와 크기, 굽는 방식부터 달랐다. 바야흐로 천하제일 고려청자가 이 땅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고려청자는 초창기 수도 개경 일대에서 제작되었는데 월주 이외에도 점차 중국 남·북방의 다양한 제작기술을 도입하여 자체 역량을 강화하였다. 이후 전라도 강진 일대를 중심으로 불과 백여 년 만에 고려청자는 중국의 청자나 백자를 모방하던 단계에서 도약하여 중국도 인정하는 천하제일 비색청자의 모습으로 일변하였다. 이는 청자 제작에 알맞은 질 좋은 원료와 통일신라시대 이후 축적된 대단위 장인 집단의 숙련된 기술, 음다(飮茶) 풍습의 유행과 고려 귀족의 청자 애호 취향이 어울려 빚어낸 결과였다.

고려의 청자장인들은 음각이나 양각, 투각과 같은 기법의 청자 이외에도 인물과 자연을 모델로 이들을 사실적으로 축소 제작한 상형청자와 산화철 안료를 사용한 철화청자, 백토와 흑토를 굵게 칠하거나 점으로 찍은 퇴화문청자, 중국의 당삼채(唐三彩) 그릇을 연상하게 하는 연리문(練理文)청자, 고려 특유의 상감청자, 산화동을 사용한 동화(銅畵)청자, 금을 유약 위에 칠하고 다시 구운 화금(畫金)청자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제작 장소도 강진과 부안을 비롯해서 고려의 독특한 소(所) 수공업체제 아래 전국 각지에서 질 좋은 청자가 생산되었다. 12세기 후반 이후 무신란과 몽고의 침공 등으로 고려 사회 전체가 정치·사회적으로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고려청자는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서 보듯이 당당하고 기품있는 고유의 멋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몽고와의 전쟁 이후에는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으로 고려청자가 유입되어 원대(元代) 여러 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청자는 전세품 이외에도 개경과 강화도를 위시한 왕공 귀족들의 무덤에서 출토되었고, 최근에는 강진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개경으로 향하였을 상선(商船)들이 전라도와 충청도 해저에서 발견되었다. 이 침몰선 안에서 수천 점의 청자가 천 년 신비를 간직한 채 인양되어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출몰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고려의 국력이 쇠해지면서 청자의 질도 동반 쇄락하기 시작하였다. 정교한 조각보다는 신속한 대량 생산을 위해 도장을 이용한 간략하고 거친 인화문이 성행하였고, 그릇의 비례도 흐트러져 비색청자 시절의 자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왕조 교체를 미리 암시라도 하듯 고려 말의 청자는 고려 왕실 그 자체였다.

조선은 고려와는 다른 정치·사상 체제 탓에 그릇에서도 고려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청자의 제작전통을 계승한 분청사기가 전국적으로 생산되면서 또 다른 도자 전통을 만들어나갔다. 왕실은 물론 일반 사대부들도 인화(印花), 상감, 철화, 박지(剝地), 덤벙, 귀얄, 조화 기법 등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담아낸 다양하고 독특한 장식기법과 해학과 파격이라 불릴 만한 개성 넘치는 문양표현을 지닌 분청사기에 연호하였다. 분청사기는 강진과 부안 등지의 대단위 고려시대 청자 생산지와 달리 중·소규모의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생산되었다. 각 가마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와 같은 지역적 특성을 드러내며 조선 전기 150여 년간 한국 도자의 주요한 생산 기지로 역할을 하였다.

한편, 15세기는 이미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 도자의 흐름이 청자에서 백자로 접어든 상태였다. 당시 조선을 왕래하였던 명의 사신들은 눈부신 중국 경덕진(景德鎭)과 용천(龍泉)의 백자와 청화백자, 청자 등을 조선의 임금과 대신들에게 선물하였다. 특히, 흰색 바탕에 푸른 문양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청화백자는 고려 말의 퇴색한 청자와는 다른 느낌으로 감상자에게 와 닿았고, 조선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여 겼던 조선의 새로운 어기(御器)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소수공업을 기초로 하였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왕실용 백자를 별도로 제작하는 국영 가마를 설치하였다. 임금의 수라를 담당하였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생산의 주체로 경기도 광주에 가마를 열고 전국 각지의 장인들을 모집하여 다양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청화백자의 경우는 안료인 코발트[회회청(回回靑)]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야 하였으므로 그 관리와 제작에 엄격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조선 최고의 화원들이 안료를 관리하였고, 문양 시문에 동원되어 매화와 대나무, 소나무 같은 사대부의 절개와 품격을 상징하는 문양들을 고아한 필치와 간결한 구도로 완성하여 높은 회화성을 과시하였다.

조선시대 자기는 고려시대 생산된 그릇의 종류와 장식에서 차별을 보였다. 순백자와 청화백자 뿐 아니라 산화철을 안료로 사용하는 철화백자가 조선 전기부터 제작되었고, 후기에는 산화동을 사용한 동화백자와 산화철 함량이 높은 흑유자가 선을 보였다. 상감청자와 거의 유사한 기법의 상감백자도 15세기 제작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하였고, 왕세자용으로 출발한 청자 역시 조선 후기에는 제작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유교적 제의가 중시된 탓에 각종 제기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사발, 대접, 완, 접시, 항아리와 병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와 같은 차이점은 그릇 수요자의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수요층이 비색과 상감청자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색과 문양의 완벽함이나 고귀함, 장식성을 추구하였다면 조선의 그릇은 성리학적 명분에서 검약과 순수의 상징으로 여겨져 가능한 장식을 배제하고 완벽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우선시되었다. 반드시 좌우 대칭이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고, 철분이나 다른 이물질이 그릇 표면에 붙어 있어도 그다지 흠이 되지 않았다. 왕실용 그릇이 이와 같았으니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그릇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자는 몇 차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에 의한 사회경제적 어려움으로 값비싼 안료를 사용하는 청화백자 대신 철화백자가 크게 유행하였고, 산화동을 사용하는 동화백자도 이 때 등장하였다. 철화백자에는 매화와 대나무 등을 중심으로 한 문인화풍의 문양이 있는가 하면 운룡문(雲龍文)처럼 양식화된 표현도 공존하였다. 관요 뿐 아니라 지방 가마의 생산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는 신분제의 변동과 상업의 발달이 배경에 자리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숙종 후반 이후 18세기 들어서는 전란 이후 혼돈을 거듭하던 분원의 제도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사대부의 미감을 맘껏 발휘한 회화성 높은 청화백자들이 새로운 면모로 나타났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산수문이 새롭게 등장하는가 하면 화보를 참고한 회화적 문양들이 우윳빛 표면 위에 푸르게 펼쳐졌다. 문방구 생산이 증가하고 음식문화도 다양해지면서 반상기 풍조가 유행하였고, 이에 따라 생산된 백자의 종류도 증가하고 유통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백자도 19세기에 들어서면 정치·경제적 소용돌이 속에 점차 중국 양식을 모방하거나 장식화 양상이 보다 심화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릇들이 이전에 비해 대량으로 수입되어 조선백자와 비교되면서 북학파의 반성과 개혁의 외침도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분원은 그릇이 상품으로 인식된 현실에서 기존의 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급기야 왕실재정의 파탄으로 분원은 결국 민영화되었고 왕조의 상징적인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책은 위와 같은 한국의 도자기를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선사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서술한 책이다. 이미 한국 도자기에 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대중적이든 전문적이든 많은 책이 출간된 바 있다. 전 시기를 편년체적으로 다루거나 조선 전기나 후기와 같이 특정시기에 집중한 책 등도 있다. 토기와 청자, 가마 구조나 발굴지 출토품을 중심으로 엮은 책도 있었으며 집필자의 전 시기에 관한 논문을 책으로 편집한 경우도 있었다.

이와 달리 본서의 경우는 각 시기별·주제별로 이를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루었던 전문가들에 의해 집필되었다. 집필 형식은 우선 도자기를 토기와 자기로 크게 나누어, 토기 부분은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로 구분하여 고고학 전공 교수들이 집필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자기 부분은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 조선 후기로 나누어 도자사 전공 교수들이 집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이 책의 장점으로,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일 오브제(objet)에 대해 전공 시기에 따라 다양한 집필진의 글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도자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재미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문화사적인 관점을 주안으로 전문적인 제작기술이나 양식사적인 설명과 함께 실제 왜, 어떻게, 누가 그릇을 썼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 문화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시각에서도 토기와 자기를 관찰하였다. 또한, 문화 교류의 매개체로서 도자기가 시대별로 어떻게 활용되고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에도 주목하였다. 예술품은 물론 기술전파의 첨병으로, 조공품으로, 무역품으로 뿐 아니라 국력의 과시나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자기가 사용되었음을 고찰하였다.

이 책의 구성은 시대별로 짜여있는데, 전반부인 1장과 2장은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토기를 다루었고, 후반부 3장에서 5장까지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자기가 주된 내용이다.

제1장은 먼저 한반도 최초의 토기를 몇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고산리식 토기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보고 다음으로 원시 무문토기, 지자문(之字文)토기와 요동반도 토기를 거쳐 융기문 토기 등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각 토기의 정의와 특징, 상호 관계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토기의 탄생 이후에는 토기 제작의 확산 단계를 살펴보았다. 먼저 신석기시대 토기의 제작기술을 검토하고 빗살무늬토기의 등장과 변천, 그 기능을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무문토기의 등장과 함께 토기제작의 확산을 고려하였다. 돌대각목문 토기의 등장과 함께 청동기시대 상한을 설정하고 미송리식 토기와 고조선의 역사 환경과 제작 배경을 알아보았다. 장식과 기법에 따라 팽이형토기, 공열토기, 적색마연토기, 송국리형토기, 점토대토기와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나누어 각각의 특징을 비교, 고찰하였다.

제2장은 토기생산의 전성시대로 원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토기를 서술하였다. 원삼국시대는 바야흐로 기술혁신과 공방(工房)의 발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먼저 신기술 도입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토기 제작기술의 발전을 원료 점토, 성형법과 장식, 소성법과 기술혁신의 과정으로 나누어 검토하고 당시 토기의 생산과 사용을 알아보았다. 토기의 유형은 와질토기, 타날문토기, 경질무문토기와 중도식토기, 도질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로 분류하였고, 지역에 따른 토기생산의 전통은 진·변한 지역, 마한 지역, 중부 지역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삼국시대는 국가에 의해 조직된 토기 생산시스템을 갖춘 보다 발달된 상태로 보고, 먼저 고구려토기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다음 백제토기는 백제의 성장 배경과 백제토기의 범주를 정하고 백제토기의 등장시기를 설정한 후 한성시기, 웅진시기, 사비시기의 백제토기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또한, 중국도자와 백제토기, 고구려토기와 가야토기의 영향, 영산강 유역의 백제토기 등 백제토기 주변에 대해 알아보았다. 신라·가야토기는 먼저 그 개념을 정의하고 생산기술 과 고분문화를 배경으로 한 토기생산, 정치세력에 따른 토기양식과 그 변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어지는 통일신라는 자기 발생의 전야기로 보고, 우선 고신라토기에서 통일신라토기로의 전이과정을 설명하였다. 다음 인화문토기의 전개와 시유도기를 중심으로 경주와 지방의 토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제3장은 고려시대 청자에 대해 서술하였다. 먼저 차 문화의 유행과 청자의 제작에 대해 살펴보았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차문화 유행을 고찰하고 고려시대 차 문화와 제도가 고려청자제작에 기여한 점을 강조하면서, 중국 다법(茶法)의 전래와 변화가 고려청자 다구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 점을 주목하였다. 또한, 청자의 제작 개시 시기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살펴보고 청자의 최초 제작지와 청자 제작자 집단을 추정해보았다.

다음 청자기술이 중국에서 전래된 이후 유색(釉色)의 발전과 기종, 기형, 문양소재, 시문기법의 변화, 금속기로부터의 영향을 고찰하였다. 중국의 사료를 통해 동아시아에 있어서 고려청자의 위상과 인식을 재확인하고, 중국 각 가마 생산품의 국내 수입과 사용처, 그 의미와 함께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고려도자의 사례와 의미, 수출시기를 살펴보았다.

고려청자의 용도에 대해서는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등장하는 생활용기의 사례를 중심으로 각종 생활용기의 종류, 가마터와 각종 소비지, 분묘에서 발견되는 도자의 종류와 성격을 고찰하고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국가 제례기와 불교의식기로서의 청자를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입증하였다. 나아가 각 유적지별 성격으로 드러난 청자의 품질과 조합, 고려사에 등장하는 청자상인세력을 알아보았다. 끝으로 최근 서해안 침몰선에서 발견되는 각종 청자의 유통방식과 조세체계 및 12개 조창의 활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제4장에서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대해 서술하였다. 먼저 전통의 계승과 소박한 파격의 미를 지닌 분청사기에 대해서는 고려청자로부터 이행 과정, 편년자료와 분청사기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다음 분청사기에 사용된 일곱 가지 장식기법의 유행과 개성적인 표현을 유물을 통해 고찰하고 전국에 남아 있는 제작지를 검토하였다.

다음 백자는 왕실백자의 제작지인 경기도 광주 관요의 운영과 관리, 관요의 성격과 가마 구조를 문헌과 유물을 통해 고찰하고 백자의 제작량과 요도구(窯道具) 등을 살펴보았다. 조선 왕실의 위엄과 권위의 상징인 백자에 대한 조선 조정의 정책과 사대부의 인식을 검토하고 관요백자와 청화백자의 장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관요백자에 많은 영향을 미친 중국백자에 대해서는 문헌기록과 출토품을 통해 영향과 변용, 수용과정에 대해 해석을 기하였으며 특별히 그 의미를 고찰하였다.

끝으로 제5장에서는 조선 후기 백자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조선 후기의 시대 배경과 신분제의 변동에 따른 백자 소유 기회의 평등과 부와 품격의 상징이 된 백자 인식을 고찰하였다. 다음 17세기 철화백자를 중심으로 고난 극복을 위한 분원제도의 정비에 대해 살펴보고 분원 이동에 따른 편년 자료를 토대로 철화백자 양식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17세기 한일 공동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왜관(倭館) 다완 생산에 대해 언급하였다.

18세기는 사번(私燔)의 허용과 상품 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청화백자에 새롭게 등장한 양식들을 진경 문화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이를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정조 이후 저변의 확대에 따른 장식화의 심화를 시대적 산물로 추정하였다.

19세기는 북학파의 제작기술과 소비에 대한 인식과 다양한 실용기명과 중화풍 양식이 주를 이룬 분원자기 양식에 주목하였다. 그릇 의 유통과 생산에 대해서는 당시 사기전(沙器廛)의 양태와 분원이 분원공소(分院貢所)로 변모하는 과정을 문헌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조선 말기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 책을 통틀어 필자들은 한국 문화사에서 도자기의 표현과 도자기와 문화와의 관계의 구조와 궤적을 고찰하였다. 한국의 도자기에 관한 많은 의문들―예를 들면 한국의 도자기는 누가 만들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 시대별·지역별 특성은 무엇인가. 중국이나 일본과의 차별점은 무엇이고 어떠한 문화적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유익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앞으로도 한 집단, 국가, 민족의 문화적 산물을 넘어 세계의 문화로 한국의 도자기가 존재할 것을 그려 본다.

2010년 9월

고려대학교 교수

[필자] 방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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