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들어가면서

집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 모습이나 형태가 자연환경과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인간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집에서 생활을 할 것이다. 인류가 집을 지은 것은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집은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곳이고, 탄생에서 죽음까지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은 건물, 살림생활, 가족과 가문 등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전통집을 ‘한옥(韓屋)’이라고 한다. 한옥은 ‘한복’이나 ‘한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집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한옥의 특징은 구들과 마루가 함께 있다는 점이다. 구들은 북방의 추운 날씨에 적용된 주거양식이고, 마루는 습한 남방 지역의 건축 특징이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적인 요소와 반도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한반도의 특성 때문이다. 구들은 움집 형태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생겨났고, 고구려에서는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중요한 난방시설로 이용되었다. 마루는 백제인들이 사다리를 이용하여 다락집에서 오르내렸다는 중국의 기록을 볼 때 삼국시대 고상식(高床式) 건축양식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집들은 지면 아래에서 지상으로 점차 올라왔다.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채집을 하면서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였는데, 지면보다 낮게 판 움집에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움집의 형태는 현재 강원도에서 감자나 고구마, 무 등을 갈무리할 때 사용하는 ‘움’과 유사하다.

<움집복원>   
[연천 전곡리 선사 유적지]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움집은 주로 강이나 바다, 호수 근처의 구릉지대에서 집터가 발견된다. 그 형태는 타원형, 원형, 방형으로 지붕은 대개 원추형이고 실내 중앙에 화덕을 갖추고 그 주변에 음식을 저장하는 구덩이를 파놓은 정도이다. 움집 바닥에는 돌이나 가죽, 풀이나 짚, 자리나 멍석 등을 깔았다. 움집 그 이전에는 짐승을 따라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기에 자연동굴이나 바위틈, 큰 나무 밑 등에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신석기 후기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움집의 바닥 평면은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반듯한 모습으로 바뀌고, 규모도 커지고 지붕을 지탱할 수 있도록 기둥을 일정하게 배열하였다. 긴 장방형의 집이 지어지면서 움집의 중앙 화덕은 출입구 가까운 쪽으로 옮겨졌고, 경우에 따라 두 개의 화덕을 설치하여 취사와 난방을 하였다. 장방형의 움집에서는 취사와 휴식을 위한 공간 구분이 확실하였다. 당시 집의 큰 변화는 벽면을 만들고 지붕이 지상에서 분리되어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방형 평면에 맞추어 몇 개의 기둥을 정렬하고, 기둥머리를 도리로 연결하면 구조가 완성된다. 그리고 길이가 긴 좌우 측면 도리에 서까래가 나란히 경사지면서 서로 만나 지붕이 된다.

움집의 역사는 이처럼 오래되었지만, 근대까지도 존재한 주거 형태이기도 하다. 움집 이외에 귀틀집, 토막집, 토벽집, 오두막집, 여막집 등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그 모양이 원형, 타원형, 단순한 네모형으로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 후기 ‘원삼국 시대’가 되면서 본격적인 지상 주거가 출현하게 된다. 삼국시대가 되면서 움집에서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집을 짓고 살았고, 지배계층은 기와를 덮은 목조 건물에 살기 시작한다. 지상 가옥이 등장하고 난방을 위한 원초적인 형태의 구들이 등장한다. 또한, 바닥으로부터 높이 떠 있는 다락집 등도 등장하여 삼국시대에 북방과 남방식 가옥의 형태가 결합된 가옥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문헌에는 삼국시대의 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단지 중국의 문헌을 통해 삼국시대의 민가에 대한 기록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데, 『후한서』에 북방의 읍루족들이 “기후가 추워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산다. 혈거는 깊을수록 귀하고 큰 집이면 아홉의 계단을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남방의 삼한의 주민들은 “집은 움집으로 그 모양은 무덤처럼 생겼고, 출입구는 위쪽에 있다”라는 구절로 보아 주민들이 움집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집 모양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부여의 주민들이 지표 상에 집을 짓고 살고 있고, 고구려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작은 집인 서옥(壻屋)에서 생활하였으며, 마한의 귀족이나 관원의 집에는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변한과 진한에서는 둥근 나무를 포개 쌓아 집을 만들었 다는 기록 등을 통해 계층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집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둥근 나무를 포갠다는 것은 당시의 귀틀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귀틀집은 화전민 주거 지역에서 볼 수 있고, 태백산맥 지역 주민들이 이주해서 정착한 울릉도 민가에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집은 고구려 벽화, 경주 출토 집모형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약수리(藥水里), 덕흥리(德興里) 등의 고분의 주인공을 보면, 의자에 앉아 탁자에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침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좌식이 아닌 입식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벽화나 출토 집모형물을 통해 지붕을 기와로 얹은 고급 주택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악 제3호 고분 벽화에 그려진 부엌, 고깃간, 차고, 마구간 등의 그림을 통해 상류층의 다양한 생활공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주택의 담장과 대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당시의 집의 모양이 오늘날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벽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집의 벽면은 공간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데, 출입구가 하나인 움집의 경우 별도의 출입문을 구획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건물이 지상 위로 지어졌다면 출입구를 여러 군데 다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구획이라든지 칸막이 시설은 움집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흔히 통일신라시대 서라벌에는 초가가 없고 모두 기와집이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귀족들의 생활수준이 높았음을 말해준다. 12세기경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은 개경(開京) 교외에 다정하게 모여 있는 초가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신분에 따라서 집터의 크기는 물론 집의 칸수, 크기, 장식에 차등을 두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집터 크기를 보면, 대군과 공주는 30부, 왕자·군·옹주는 25부, 1·2품 관리는 15부, 3·4품 관리는 10부, 5·6품은 8부, 7품 이 하의 관리와 음덕을 입은 자손은 4부, 서민은 2부로 제한이 있었다(당시 1부는 39평 정도이다). 이 시기의 마루와 온돌은 각각 기능이 달랐는데, 마루는 관혼상제를 치르는 공간으로, 온돌은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 사당을 갖추고, 안채에는 각종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넓은 대청을 두고, 사랑에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객청을 두었다. 손님 접대를 위해서는 주택 내에 남자의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고, 이것이 안채와 사랑채를 구획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양반집에서는 사당과 안채, 사랑채, 하인들이 거처하거나 창고 등이 있는 행랑채 등 집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가 있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의 민가는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말부터 유학자들은 집 안에 가묘, 즉 사당을 갖출 것을 주장하였고, 문무관료를 중심으로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효는 유교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했으므로 죽은 조상도 섬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사권을 계승하는 증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증손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 증손만이 사당의 중앙문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사당은 조상숭배 관념을 드러낸 건축물로 집터 중에 제일 먼저 터를 잡았으며, 다른 건물보다도 높게 지었다. 조상의 보살핌 덕에 자손들이 안전하고 풍요롭게 생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당의 좌향(坐向)은 동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기본이다. 동쪽은 해가 뜨는 양의 방향으로, 태양은 생명을 상징하고 부활을 의미한다. 북쪽은 제일 윗자리를 뜻한다. 제사상에서 조상의 위패를 두는 곳을 실제 방향과 상관없이 북쪽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설하는 단상, 식사 할 때 상석 등도 마찬가지로 북쪽을 가리킨다.

사당은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지만 사당 안의 조상은 살아 계신 존재로 여긴다. 자손들은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올렸고,먼 곳을 외출하는 경우에도 사당부터 들러 고(告)하였다. 가정의 중대사인 결혼, 해산 등의 일도 사당에 먼저 알렸다. 또한, 중요한 가정 문제도 사당 앞에서 의논했는데 이는 조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한다는 뜻이다. 새로 나온 과일이나 곡식 등도 천신례(薦新禮)라 하여 사당에 먼저 올렸다.

<안동 고성 이씨 사당>   

사당은 4대 선조까지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종손의 집에만 있다. 대가 지나면 왼쪽에 있는 맨 윗대의 위패를 그의 무덤 앞에 묻는다. 어떤 집에서는 이들 위패 외에도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경우가 있었다. 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국가에서 지정한 위패다. 영원히 제사를 드리며, 다른 조상의 위패보다도 크다. 조상의 위패는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었다. 사당 앞에는 밤나무가 있으며, 양기가 강한 말년·말월·말일·말시에 심는다.

여러 가지 형편상 사당을 따로 세우지 못한 집에서는 집 안의 어 느 한 공간을 사당으로 정하고 그곳에 위패를 모셨다. 마루 한쪽에 꾸민 것을 사당청(祠堂廳), 방에 꾸민 것을 사당방이라고 부른다. 사당청이나 사당방조차 따로 두기 어려운 경우에는 대청 뒷벽 상부에 붙인 작은 장에 위패를 모시기도 했는데 이것을 벽감(壁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을 보면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어져 있다. 안채는 여인네의 공간으로 안주인이, 사랑채는 남정네를 위한 공간으로 주인이 기거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담을 치고 문(중문)을 달았는데, 이 중문을 닫으면 두 세계는 완전히 차단된다. 부녀자에게 중문은 바깥 세계의 경계로, 일생 중문을 벗어나는 일은 서너 번에 지나지 않는다. 사내아이를 낳은 후 친정 부모님께 근친(覲親)을 가거나 부모님의 상례를 치르려고 친정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나들이였고, 마지막으로 죽어서 관에 실려 나가는 것이다. 혼례를 치른 딸을 마중할 때도 중문 앞까지만 하였다.

식사도 안채에서 만든 음식을 사랑채로 운반하였으며, 옷 또한 안채에서 내어다 사랑채에서 입었다. 또한, 사랑채의 남자도 안채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으며, 들어가는 경우에도 미리 알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들어갔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후손을 잇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남녀가 떨어져 생활하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비밀통로이다. 전라북도 정읍 김씨 집에서는 안쪽 행랑채와 담 사이에 사람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보통 때에는 이곳에 나락단을 세워두어 외부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게 한다.

경상도 상류가옥에서는 사랑방 뒤에 골방을 두고 방 한쪽 벽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을 달았다. 따라서 외부 사람에게는 이 비밀통로가 감추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채 건넌방과 젊은 주인의 작은 사랑방을 최단거리에 두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외간 남자가 안채로 접근하는 것은 철저히 봉쇄되었다. 또한, 외부 사람의 시선이 안채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을 세웠다. 이 벽을 내외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문이 열렸을 경우 마당에서 안채의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으려고 안채쪽에 세운 벽이다. 내외벽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담장이 없는 중류가옥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문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대문 크기의 벽을 세웠다. 남녀유별의 관념은 뒷간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 바깥쪽에는 각각 뒷간이 하나씩 있다. 집 안에 있는 뒷간을 안뒷간, 바깥에 있는 뒷간을 바깥뒷간이라고 부른다. 안뒷간은 여인네들만이 쓰고, 바깥뒷간은 남정네들만 사용하였다. 어린아이가 3∼4세가 되면 어머니를 떠나 사랑채에서 생활하는 것과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관념도 남녀유별을 나타내는 것이다.

장유유서의 관념은 건축 구조물의 명칭이나 공간배치, 크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랑채의 경우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을 큰사랑방, 아들이 쓰는 방을 작은사랑방이라고 부르며, 안채의 경우도 어머니가 기거하는 방을 안방 또는 큰방, 며느리가 기거하는 방을 건넌방 또는 작은방이라고 부른다.

사랑방의 크기는 큰사랑방이 두 칸, 작은사랑방이 한 칸이 보통이다. 또 큰사랑방은 햇빛이 잘 들고 대청을 끼고 있어서 어느 계절이나 쾌적한 분위기를 이룬다. 작은사랑방은 큰사랑방에 딸린 공간에 불과하다. 세간도 큰사랑방은 호화스러운 가구와 값진 문방구로 장식한 반면 작은사랑방은 특별한 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안채도 안방은 건넌방에 비해 크기가 배다. 안방에는 다락이나 벽장까지 있으며, 안방에 달린 골방(웃방)도 안주인의 차지로 세간을 놓았다.

일반 서민들의 가옥에서도 장유유서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 부모님은 안방에 자식들은 건넌방에 기거했으며,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상태를 유지하였다. 60세가 넘어도 건넌방에서 계속 생활해야 했던 며느리들은 불평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시어머니 죽으니 안방이 내 차지구나.” 하는 말도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 일부 지방에서는 아들 내외에게 안방과 큰사랑을 물려주어 서로 방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를 ‘안방물림’이라고 한다.

풍수도 궁궐은 물론 민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풍수사상을 최초로 전한 사람은 신라시대 승려 도선(道詵, 827∼898)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제4대 임금인 탈해(脫解)의 기록에 보인다. 도선이 쓴 『도선비기(道詵秘記)』는 이후에 풍수의 원전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풍수사상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고, 조선 후기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 「복거조(卜居條)」,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지은 『택리지』 「복거총론」에는 마을에 관한 풍수를 자세히 적고 있다. 특히, 이중환은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 지역을 현지 답사한 끝에 살 만한 곳과 살지 못할 곳의 지명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풍수 가운데 형국론은 마을의 생김을 산의 모습이나 물이 흐르는 모습을 동물, 식물, 물질, 인물, 문자 등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형국은 동물형·식물형·물질형·문자형·인물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동물형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 다음은 물질형·인물형·식물형·문자형 순서이다. 동물형 가운데 가장 많이 나타나는 동물은 용·소·말·닭·봉황·범 등이며, 물질형은 반달·배·등잔·금소반, 인물형은 옥녀·장군·신선, 식물형은 매화·연꽃, 문자형은 야(也)·내(乃)자이다. 이들 형국은 우리 주위에서 많이 듣거나 실질적으로 보는 것으로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집터나 마을터에 형국이 있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이 들 형국은 우리네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로 좋고 나쁨이 엇갈리는 일종의 포물선을 그린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형국 중에는 순환적인 특징을 가진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반달형·배형·키형·삼태기형·조리형 등을 들 수 있다. 반달형은 달이 커가는 상태에서는 가문이나 마을이 융성해 가지만, 만월이 되어 달이 작아지는 상태에서는 가문이 쇠퇴하고, 반월이 되어서야 다시 본래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배형의 경우는 배에 재물을 가득 채우는 단계까지는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배에 재물이 가득 차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이 터에 살고 있는 부자들은 이곳을 떠나야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조리형은 쌀을 이는 도구로, 쌀을 일 때 쌓이는 쌀은 재물의 증가를 상징하지만 조리에 가득 찬 쌀을 털어내는 일은 재산과 가문의 쇠퇴를 의미한다. 그래서 한 세대는 잘살고, 한 세대는 못사는 성격을 가진다. 키형과 삼태기형도 곡물을 채울 때는 잘살게 되지만, 그 안에 채워진 것을 덜어낼 때는 가난해진다. 위와 같이 한 세대가 번갈아 가면서 흥망성쇠가 찾아온다.

둘째, 하나의 형국이라고 하더라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소, 말, 개와 같은 동물형의 경우 배에 해당하는 터는 좋은 반면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집을 짓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긴다. 배는 음식물이 가득한 곳으로 풍요를 나타내고, 배의 부분 중에도 젖가슴 부분을 으뜸으로 친다. 동물의 꼬리 부분은 항상 흔들듯이 재물이 떨어져 나간다고 여겨 좋지 않게 여긴다. 닭형은 볏에 해당하는 부분에 집을 지으면 후손이 관직에 오른다고 여기며, 게형의 양쪽 집게 다리에 집을 지으면 재물을 잡는 형국이라 좋다고 여긴다. 키나 삼태기형의 경우에는 안쪽에 터를 잡는 것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들 물건들은 안쪽이 깊고 바깥쪽이 얕기 때문이다.

셋째, 좋은 형국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해둔다. 예를 들어 목마른 소형[渴牛形]이나 말형[渴馬形], 용형, 지네형 등에서는 일부러 연못을 판다. 목마른 소나 말은 연못이 없으면 달아날 것이고, 용 또한 물에 사는 동물이고 지네는 습지에 사는 동물인지라 못이 필요하다. 이와는 반대로 배형[行舟形]에서는 못을 파는 것은 배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함부로 우물을 팔 수 없다. 배 형국의 마을이나 집에 우물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복이 도망갈 것에 대비해 소나 말 같은 동물에게는 구유나 고삐목이라 하여 동물 머리 쪽에 땅을 파거나 나무를 심어두기도 한다. 이와 같은 원리로 삼태기나 키 형국의 마을에서는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나무를 일렬로 심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 형국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을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장군형에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시장이나 학교 등을 세운다. 장군이기에 호령할 많은 부하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좋은 터는 영원하지 않다. 땅의 생기가 끝나면 그 터는 쇠퇴하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한다. 도성의 천도설이 나오는 것이나 새로운 집터를 미리 장만해 두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섯째, 한 마을에는 서로 상극되는 형국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하나의 형국이 지나치게 강하면 오히려 마을이나 집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지역 중 어느 마을에 지네형[蜈蚣形]이 있으면 이와 천적 관계인 닭형이 있기 마련이다.

여섯째, 많은 형국들은 자체 내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지네의 많은 발과 금가락지는 부자, 매화의 열매는 다산과 풍요, 붓형·필통형·야(也)자 터는 학자나 문장가, 띠형과 품(品)자형에서는 관직, 신선형에서는 태평성대 등의 의미가 있다.

집은 개인에게는 작은 우주와 같아 ‘소우주(小宇宙)’라고 달리 표현 하기도 한다. 우주를 나타내는 한자에 집 ‘우(宇)’자를 쓴 것도 이러한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집에는 다양한 신들이 좌정을 하고 맡은 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신들 사이에 서열은 있으나 신들끼리 싸움을 하거나 다투지는 않는다. 이처럼 집에 깃든 신을 ‘가신(家神)’·‘집지킴이’라고 한다.

집의 우주관은 집의 배치에서도 보인다. 즉, 집의 배치는 평면적인 우주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고, 건물의 입면이나 형태는 수직적인 우주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즉, 집을 3등분하여 지붕은 하늘, 아래 몸통은 땅, 처마 밑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종종 집 대문은 사람의 얼굴에 빗대어 언급하기도 한다.

나무는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건축 재료로 기둥, 대들보, 대문, 지붕, 벽면 등 집의 골격을 만들었고, 산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강원도 삼척, 인제 등 산간 지역에서는 지붕도 나무와 나무의 껍질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너와와 굴피가 바로 그것이다. 지붕 재료를 따서 그 집을 ‘너와집’과 ‘굴피집’이라고 부른다.

<너와집>   
삼척 도계읍 신리에 있는 강봉문 가옥으로 약 150년 전에 지어졌다.

너와는 ‘느에’ 또는 ‘능에’로도 불리며, 200년 이상 자란 직경이 40㎝ 이상의 소나무를 톱으로 70㎝ 정도의 길이로 토막을 낸 다음 이를 세워놓고 도끼로 3∼5㎝의 두께로 쪼갠 널판을 말한다. 너와는 70장을 ‘한 동’이라 하고 보통 한 칸 넓이의 지붕에 한 동 반 내지 두 동이 소요된다. 너와집이란 이 너와로 지붕을 덮은 집이라는 말이다. 너와는 끝을 조금씩 물려가며 놓고 큰 돌로 지질러놓았으므로 비가 새는 일은 없으나 부엌에서 불이라도 지피면 연기는 반은 굴뚝으로 나가지만 나머지는 바로 천장의 너와 사이사이로 새어나가서 집이 온통 연기에 휩싸이고 지붕으로 연기가 뿜어나온다.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지역과 낭림산맥 및 강남산맥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산간 지역,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다. 이는 대체로 화전민 분포 지역에 속한다. 지붕을 이을 때는 처마 부분에서 위 방향으로 서로 포개며 이어 올리고, 너와가 바람에 날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거운 돌을 얹어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으로 지붕면에 눌러놓기도 하는데, 이런 통나무를 ‘너시래’라 부른다. 너와의 수명은 10∼20년 정도 간다고 하나, 이은 지 오래되면 2∼3년마다 부식된 너와를 빼고 새것으로 바꾸는 부분적인 교체작업을 해야 한다.

산간 마을의 지붕은 너와로 덮는 일이 많으나 너와의 재료인 적송이 귀한 곳에서는 굴피로 대용하기도 한다. 상수리나무의 껍질이나 참나무의 껍질을 두께 0.5치 정도, 폭 1척, 길이 3척 정도로 벗겨낸 것이 굴피인데 보통 수령이 20년 이상 된 나무의 수간에서 3∼4척 높이로 떠낸다. 대개 음력 7∼8월에 뜨는데 나무의 속껍질을 놓아두고 겉껍질만 떠내기 때문에 4∼5년이 지나면 떠낸 자리에 겉껍질이 재생되어 다시 뜰 수 있다. 떠낸 굴피는 곧게 펴기 위해서 차곡차곡 포개어 쌓고 맨 위에 두껍고 무거운 돌들을 얹어 짓눌러 놓는다. 대개 한 달 이상 지나면 적당한 크기로 끊어서 지붕을 이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굴피의 수명은 10∼20년 정도이긴 하지만 5년에 한 번씩은 바꿔야 하는데, 안에 들어갔던 부분을 밖에 나오게 자리를 옮겨 주어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굴피도 너와와 같이 두 겹으로 끝을 겹쳐가면서 덮는다. 그리고 굴피는 습기에 예민해서 일광을 받아 날씨가 건조할 때는 바싹 말라서 하늘이 보일 만큼 오그라들고, 비를 맞고 습도가 높아지면 늘어나서 벌어진 틈을 메운다. 굴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수명이 길어서 ‘굴피 천 년’이라는 말도 있다.

집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환경과 생활양식, 가치관에 따라 변화되고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의 집은 개항 이후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강제적, 타의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집에 대한 가치관도 바뀌어 생활처가 아닌 재물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집 안에서의 생활방식도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뀌어 침대나 소파는 이미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구들을 그리워하고, 집 안에서는 신발을 벗고 생활하며, 거실을 마루처럼 집안의 중대사를 치루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집의 전통이 우리 생활 속에 계승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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