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01. 왕의 춤

연산군, 파행적인 춤

연산군(1476∼1506)은 시재(詩才)와 감성이 뛰어났으나, 생모가 윤필상 등 신하들의 충동으로 죽게 된 것을 알고 훈신과 사림을 모두 눌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특히, 연산군은 분방한 언론 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을 싫어하였다. 연산군 4년(1498)에 사림이 지은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영남사림을 몰락시켰다. 또한, 연산군 10년에 생모 폐비윤씨사사(廢妃尹氏賜死)에 관여한 훈신들과 남은 사림들을 처벌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비판 세력을 거의 숙청하였다. 사치와 방탕해서 호화로운 잔치와 사냥을 즐겼으며, 이를 위해 과도한 공물을 거둬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120)

<연산군일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산군에 이르러서 춤은 음탕한 짓의 대명사가 된다. 연산군의 재위(1494∼1506) 기간 동안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춤은 55건인데 연산군이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파행적인 춤을 보인 것은 아니다. 집권 초기에는 “무릇 연향(宴享)의 정재(呈才) 때에, 처용무(處容舞)를 재차 추게 함이 어떠한지 정승들에게 문의하라.”고 승정원에 전교를 내릴 정도로121) 독단적이지 않았다. 지중추부사 김감(金勘, 1466∼1509) 등을 불러 술을 하사하는 자리에서 춤을 추는122) 등 신하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왕이 춤추는 일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 후기에 들어서 연산군은 신하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탈에 가까운 춤을 거리낌 없이 추었다. 연산군은 “불시로 나인들을 뒷뜰에 모아서 미친듯이 노래를 부르고 난잡하게 춤을 추는 것을 날마다 즐거움으로 삼으면서 바깥 사람들이 이를 알까 염려하는”지경에까지 이르렀다.123)

연산군은 대비나 세조의 후궁 앞에서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안겨 주는 춤을 추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특히 처용무를 좋아해서 대비 앞에서 처용 가면을 쓰고 희롱하고 춤도 추었다.124) 연산군은 처용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괜한 트집을 잡아 대비가 두려워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더 나아가서 처용의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앞으로 나갔는데, 소혜왕후는 이 일로 크게 놀라 병을 얻기까지 하였다.125) 세조의 후궁 근빈(謹嬪) 박씨는 나이 80세로 춤추기 어려웠는데, 연산군은 자신이 춤추면서 박씨에게도 춤추라고 명하였고, 박씨는 학대가 두려워 춤을 추었다고 한다.126)

연산군의 춤은 정도를 넘어섰다. 즉위 8∼9년 정도부터 연산군의 정신적인 병증이 심해졌다. 광질(狂疾)을 얻어 때로 한밤에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後苑)을 달렸다. 또 무당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가 와 붙은 형상 을 하였으며,127) 왕이 경복궁에서 대비에게 진연할 때, 술에 취하여 희롱하며 춤추는 것이 배우 같았다고 한다.128)

<『악학궤범』의 처용탈>   
연산군은 처용탈을 쓰고 대비를 희롱하고 두렵게 하였다.
<재현된 처용탈>   
<『무신진찬도병』 오방처용무>   
1848년(헌종 14) 3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60세 생신을 기념한 내연에서 기녀가 오방처용무를 추었다. 오방처용무의 복식은 방위에 따라 동방-청색, 서방-백색, 남방-적색, 중앙-황색, 북방-흑색이다.[국립전주박물관]

연산군이 자신의 파행적 춤 행태에 관해 전혀 자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내리면서 “서문에 ‘정대하지 못한 임금은 오직 성색(聲色)이나 가무만 좋아하여 위아래가 서로 속이므로 정사가 해이해지고,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어 찌 성색이나 가무로 인하여 나라가 꼭 망하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129) 굳이 성색과 가무를 언급하면서 나라의 흥망성세와 관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신하들의 시선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며, 자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식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쪽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변명을 찾는 것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결국 폐비 윤씨의 기일(忌日)에도 종일 나인들을 희롱하고 놀며 노래하고 춤추기까지 하였다.130)

연산군은 신하들과의 관계를 무시한 채 극단적 형태의 전제적 왕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반정(反正)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폐위되었다는 사실은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념에 입각한 유교정치를 지향한 조선 왕정의 특징이 이제는 폭력적 시도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고해졌다는 중요한 증거이다.131) 이러한 정치적인 특징은 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연산군은 극단적 형태의 왕권을 행사하려 한 것만큼이나, 극단적 형태로 춤을 출 권리를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파행적인 춤의 권리는 유교정치를 지향하던 조선시대에 통하지 않는다.

결국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 공고화되고, 왕권과 신권이 공존하는 중종시대부터는 왕이 마음대로 춤을 출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였다. 연산군의 춤을 끝으로 조선시대에 왕이 춤을 추었다는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왕이 춤을 추었어도 실록에 기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연산군이 춘 광란의 춤사위를 끝으로 왕은 춤을 추지 않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필자] 조경아
120) 한영우, 앞의 책, pp.348∼389.
121) 『연산군일기』 권32, 연산군 5년 3월 8일 정묘.
122) 『연산군일기』 권52, 연산군 10년 1월 10일 임신.
123) 『연산군일기』 권46, 연산군 8년 10월 21일 경신.
124) 『연산군일기』 권53, 연산군 10년 5월 22일 신해 ; 권60, 연산군 11년 11월 3일 갑신 ; 권57, 연산군 11년 4월 7일 임술.
125) 『연산군일기』 권60, 연산군 11년 10월 9일 경신.
126) 『연산군일기』 권55, 연산군 10년 9월 4일 신묘.
127) 『연산군일기』 권59, 연산군 11년 9월 15일 병신.
128) 『연산군일기』 권61, 연산군 12년 2월 4일 갑인.
129) 『연산군일기』 권62, 연산군 12년 4월 12일 신유.
130) 『연산군일기』 권63, 연산군 12년 8월 15일 임술.
131) 김범, 「조선 연산군대의 왕권과 정국운영」, 『대동문화연구』53, 대동문화연구원, 2006, p.2.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