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와 민요의 비빔밥 - 신민요
‘유행가와 민요의 비빔밥 격’이라고 하는 신민요는 전래민요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신민요는 양악반주 혹은 선양합주 위에 노래되어 음반상품으로 유통된 통속민요와 문화적 맥락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속민요가 민요 양식 그 자체를 담지한 잡가의 한 형태였다면 신민요는 민요양식을 흉내내어 창작된 대중가요라는 점에서는 문화적 맥락이 크게 달라진다.
음반산업이 성장하면서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조선적인 것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진품보다 더 인기있는 짝퉁처럼 가짜 조선적인 음악이 필요하였다. 향토적이며 지방색이 강조되면서도 이것이 당시의 도시적 감성에 의해 재구성되기 위해서는 당시 대중들의 정서에 부합되었던 선양합주 반주에 의해 취입된 전래민요 버전과 같은 형태가 필요하였지만 기존의 전래 민요의 레퍼토리로는 늘어나는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민요 양식을 계승한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할 필요가 대두되면서 가사나 음악에서 창작이 필요하였다.
이렇듯 음반산업과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창작된 신민요는 한마디로 유행가와 전래민요가 이종교배(移種交拜)된 ‘음악적 혼혈 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음악 양식적으로는 전통민요 어법을 일부 계승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행가의 반주 및 편곡 양식과 가창방식을 비롯한 음악 어법을 일부 계승하고 있으므로 요샛말로 ‘퓨전(hybrid music)’가요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민요가 전통민요와 다른 점은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창작된 민요로서 작곡가와 작사자가 있고 특정 가수가 취입한 노래로서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을 따른다는 데 있다. 또한, 신민요가 악곡에서 경기민요의 선율양식을 차용하거나 리듬에서 전통 장단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창작한 작곡가는 양악을 전공하고 유행가를 창작하였던 작곡가들과 중복되었으며 편곡은 국악기와 양악기가 혼합된 편성으로 심지어 일본인 편곡자가 참여하였을 정도로 비(非)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민요들은 음계나 가창에서 기생가수들이 민요를 부를 때 특유의 멋과 맛을 살리기 위해 원음을 꾸미는 시김새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반주에서도 전통악기의 선율적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일본 엔까를 카피한 듯한 유행가와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색깔을 낸다. 공, 소위 ‘조선적 내음새’를 풍김으로써 당시 유행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늘 가튼 소리의 노래 비슷비슷한 멜로듸의 범람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을 주어 어떠한 타개책이 업시는 팬들의 지지를 더 지탱해 나가지 못하게 되엇슬 때 새로히 생각난 노래가 소칭 신민요이다. 조선소리의 고유한 멜로듸를 신가요의 멜로디와 결합식힌 말하자면 조선민요와 신가요의 혼혈아라고 할 노래가 신민요이다.229)
이 기사가 쓰여진 시기는 1937년이고 신민요가 성공하게 된 것은 1934∼1936년 사이이다. 1932년에 <황성옛터>의 성공을 기점 으로 하여 엔까양식의 유행가가 수 없이 창작된 가운데 ‘비슷비슷한 멜로디의 범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다른 기사에서 ‘센치멘탈한 류행가의 멜로듸’로230) 표현되고 있는 단조 트로트 양식을 의미한다. 위의 기사는 3년여 동안 단조트로트의 슬픈 노래가 범람하면서 대중들에게 새로운 타개책이 필요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 신민요로서 신민요가 전통민요와 신가요(센치멘탈한 류행가)와 결합된 혼혈아로 등장하였던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시 신민요라는 장르를 정착시킨 대표적인 곡으로는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의 <노들강변>을 들 수 있다.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총목록』을 보면, 경서도 민요가 기생들에 의해 불려질 때 제일 많이 연주되었던 신민요는 <노들강변>이었고 신민요라는 장르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도 바로 이 곡이었다고 한다. 『경성방송국 목록』에서 나타나는 <노들강변>의 연행양상은 수용과정에서의 문화변용을 함축해 준다. <노들강변>이 대중가요의 하부 갈래였던 신민요로 창작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전통민요권까지 확대하여 유행가와 통속민요의 양쪽 기능을 모두 담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가요의 관행으로는 신민요라 하더라도 일반 유행가처럼 특정 가수의 노래로 독점되어 유통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노들강변>은 박부용 외에 여러 전통민요 가창자들에 의해 불려졌고 이 노래에 대한 갈래명이 ‘신민요’외에 ‘민요’231) 혹은 ‘조선민요’로 통용되면서 다른 전통민요와 함께 불려졌던 것이다. 이는 <노들강변>이 대중가요로서 신민요로 출발하여 당시 신민요 라는 신종갈래의 원형과도 같은 상징성을 가지면서,232)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민요의 전승맥락에도 편입되어 문화적 맥락의 변용을 이룬 예로 볼 수 있다.
‘신민요의 전통민요화’라는 문화변용의 첫번째 사례가 바로 <노들강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노들강변>은 대중가요로 출발하였지만 전통민요와 별 다르지 않게 수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경기명창들에 의해 민요로 불려졌다. 이어 교과서에 경기민요로 소개될 정도로 전통민요화된 것은 음악텍스트의 양식적인 특징 때문이다. 이 곡을 분석해 보면 해방 이후 경기민요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어 경기 명창들에 의해 불려질 만큼 음악적 내용이 경기민요 양식에 매우 근접한 곡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노들강변>보다 늦게 창작되었던 <울산타령>(울산아가씨)이나 <태평연>(태평가)이 경기 명창들에 의해 전통민요의 하나로 전승되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당시 600여 곡에 해당하는 신민요 중에서 이렇게 전통민요 양식과 매우 유사한 곡들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며 나머지 대부분의 곡들은 유행가와 민요의 비빔밥격인 특성을 띠고 있다. 또한, 신민요의 많은 곡들은 향락적이거나 희망적인 정서를 노래하고 있어서 유행가의 비극적 정서와 대별된다.
또한, 신민요에는 <조선타령>, <복되어라 이강산>, <금강산이 좋을시고>, <명승의 사계>, <백두산 바라보고> 등 소재면에서 국토 예찬을 노래하고 있는 곡들이 많다. 신민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부의 견해에서는 이러한 노래들이 순수하게 조선의 국토에 대한 찬양이라고 해석하면서 이를 ‘선취된 미래의 어법을 활용하여 화자의 간절한 염원을 담는 충족의식’이 담긴 장르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당시 암울하였던 식민지 현실에서, 더군다나 사전검열로 인한 일제 당국의 통 제가 엄격하였던 음반 시장에서 삼천리 강산을 축복하는 노래가 상업적 목적으로 유통되었을 때 그 노래들이 과연 관제적이며 체제친화적인 어용적 성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식민지 현실에 대한 반성적 고뇌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현실을 미화시키는 일방적 왜곡이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민요에 나타나는 ‘향토성’과 ‘조선적인 것’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에 대하여 후대 학자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탈정치화된 순진한 역사해석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게 된다.
년도 | 신문 | 분류 | 곡명 | 가창 및 연주 |
1935.10.30.(수)20:30∼ | 매일 | 노들강변 외 | 단가, 노들강변, 밀양아랴랑, 청춘가, 사발가, 노래가락 |
김얀숙/ 이일선(가야금) |
1935.11.10.(일)20:40∼ | 매일 | 노들강변 외 | 이별가, 노들강변, 사발가. 닐늬리야, 밀양아리랑, 어랑타령 |
임명월/강학수(세적)/ 이중선(해금) |
1935.12.1.(일)22:30∼ | 매일 | 조선민요 (조선으로부터 중계) |
영변가, 노들강변, 밀양아리랑 | 성금화/지용구(해금) |
1935.12.31.(화)20:20∼ | 매일 | 신민요 | 관서천리, 압강물, 노들강변. 京怨曲, 伍峰山 |
손경란/강학수(세적) |
1936.2.6.(목)20:00∼ | 매일 | 방아타령 외 | 방아타령, 도라지타령, 노들강변, 사발가, 月下懷抱, 노래가락 | 이진홍/고재덕(세적) |
1936.4.9.(목)20:00∼ | 동아 | 리별가 외 | 이별가, 노들강변, 밀양아리랑, 어랑타령, 노래가락 | 임명월 |
아무튼 당시 조선의 대중들이 신민요를 통해 조선적인 것과 향토적인 것에 탐닉하였던 모습이 적어도 일본 ‘제국’의 시선이 조선인들에게 스스로 내면화되고 그 속에서 강제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조선에 대한 왜곡된 갈구와, 일본 제국과 분리되어 조선 고유의 것을 찾으려는 탈(脫)식민주의적 관점이 모호하게 혼재된 표현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일본 ‘제국’의 전체 지도 속에서 관광과 명승지, 지방색과 향토성을 강조하면서 제국의 재(再)영 토화를 위하여 사용된 로컬리티(locality)로서의 ‘조선적인 것’을 후대의 민족주의 잣대로 신화화시킨 측면은 없는지 면밀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229) | 『매일신보』 1937년 4월 1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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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 『매일신보』 1933년 12월 29일자. |
231) | 1937년 3월에 나온 <4월 신보>에는 <노들강변>이 민요로 소개되고 있고, 『동아일보』 1938년 12월 28일자의 「힛트 傑作盤」소개에도 <노들강변>이 민요로 소개되어 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p.757 참조). 이에 대해 단순히 신민요와 민요가 혼용된 사례로 보기보다는 <노들강변>이 지속적인 인기를 끌면서 1934년으로부터 3∼4년이 지나는 동안 창작 신민요로서 당대 유행가적인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전통 민요권에 편입된 민요로 인식되고 있는 변화과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232) | 최창호에 의하면, 신민요의 생성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초반 이면상의 <꽃을 잡고>에 신민요라는 갈래명이 붙여지고 이 라벨명을 폴리돌 회사에서 마케팅 전략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음단에서 ‘민요로서의 갖춤새나 예술적 품격, 완성미 등을 볼 때’ <노들강변>을 신민요의 첫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이는 <노들강변>이 신민요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이다(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p.33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