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03. 고려 왕조의 궁궐

정궁(正宮)

고려시대는 일반적으로 4시기로 구분되는데 사회 지배 세력을 기준으로 삼아 호족의 시대(태조∼경종, 918∼981), 문벌 귀족의 사회(성종∼의종, 982∼1170), 무인정권(式人政權) 시대(명종∼원종 11년, 1170∼1270), 권문세족(權門世族)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사회(원종 11∼공양왕, 1270∼1392) 등으로 나누어진다. 정궁은 고려의 태조 2년(919)에 창건(創建)된 이래 4차례 소실되고 4번 중건되었다. 즉, 태조의 창건, 현종(顯宗)의 중건, 인종의 중건, 고종(高宗)∼원종(元宗)의 중건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정궁은 끊임없는 재건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홍건적의 난으로 1362년에 완전 소실된 뒤 복구되지 못하였다. 1392년에는 왕조마저 망하여 조선 건국 후에는 폐허로 버려지게 되었다.

<고려 정궁(만월대) 평면도>   

처음에 지은 궁궐은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현종은 두 차례에 걸쳐 궁궐을 새롭게 고치고 건물과 문의 이름을 개정하여 이후 100여 년 동안 굳건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창건 당시는 후삼국 통일 이전이고 호족 세력은 강성한 반면 왕권은 미약하던 때이므로, 초기 궁궐은 규모도 작고 체재도 덜 갖추어 져 있었을 것이다. 성종 때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모든 법제(法制)가 갖추어졌기 때문에 현종 초기에 새롭게 지은 궁궐은 규모도 커지고 형식과 제도도 더욱 완비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더구나 건물의 이름까지 바꾸어 새로운 궁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때에 지은 궁궐은 1126년(인종 4)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 때 척준경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불타기 2년 전인 1124년에 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1091∼1153)은 웅장하고 화려했던 이 시기의 궁궐에 대하여 상세한 묘사와 아울러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궁전을 다룬 장에서는 먼저 왕부(王府)를 설명하고 궁전 건물 가운데 중요한 것만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거기에 따르면 왕성은 내성과 궁성으로 구분되고, 내성에는 13곳에 문을 내어 각각 방향에 따라 그 뜻을 담은 이름을 현판에 써서 문 위에 걸었다. 정문은 정동쪽의 광화문(光化門)이고 내성 안의 내부(內府)는 상서성을 비롯한 16부로 이루어져 궁성 앞에 배치되었다. 서긍은 궁성의 문을 전문(殿門)이라고 불렀는데 모두 15개로 두 번째 문인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고 하였다.

궁성 안의 전각에 대해서도 그 규모와 형태, 꾸밈새, 기능까지도 밝혀 놓았다. 곧, 회경전은 정전(서긍은 正寢이라고 기록), 건덕전(乾德殿)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 원덕전(元德殿)은 유사시에 왕이 거처하는 침전, 선정전(宣政殿)은 국정을 의논하는 편전, 좌춘궁(左春宮)은 태자의 거처인 동궁이다. 제16권 관부(官府)에서는 내성 안의 관청 및 내성과 외성 사이에 배치된 관청의 성격과 위치를 묘사하고 있다. 물론 『고려도경』의 내용은 1124년 당시의 상황이다.

서긍이 본 궁궐은 1126년(인종 4)에 거의 불타 버렸고, 1132년(인종 10)에서 1138년(인종16) 사이에 중건되었다. 이때 거의 모든 건물의 이름을 개정하였으므로 『고려도경』에 기록된 건물의 이름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표> 고려 정궁 건물의 명칭 변화와 기능
현종 12년
(1021)
개칭 이전
인종 16년(1138) 5월 개칭 기능
이전 이후
세가(世家)
제16
지리지(地理志)/
왕경개성부(王京開城府)
  회경전
(會慶殿)
선경전
(宣慶殿)
승경전
(承慶殿)
제1정전
  건덕전
(乾德殿)
대관전
(大觀殿)
  제2정전
문공전
(文功殿)
문덕전
(文德殿)
수문전
(修文殿)
  便殿
(강학)
경덕전
(景德殿)
연영전
(延英殿)
집현전
(集賢殿)
  내전
(內殿, 學問所)
명경전
(明慶殿)
선정전
(宣政殿)
훈인전
(薰仁殿)
광인전
(廣仁殿)
편전
  응건전
(膺乾殿)
건시전
(乾始殿)
봉원전
(奉元殿)
내전
(王寢 부속)
  장령전
(長齡殿)
봉원전
(奉元殿)
천령전
(千齡殿)
내전
  선명전
(宣明殿)
목청전
(穆淸殿)
  혼전
(魂殿, 제사)
  함원전
(含元殿)
정덕전
(靜德殿)
  내전
  만수전
(萬壽殿)
영수전
(永壽殿)
  대비전
(大妃殿)
  중광전
(重光殿)
강안전
(康安殿)
  내전(왕침)
  건명전
(乾明殿)
저상전
(儲祥殿)
  태자궁
  연친전
(宴親殿)
목친전
(穆親殿)
  내연
(內宴, 연회)
  현덕전
(玄德殿)
만보전
(萬寶殿)
누락  
영은전
(靈恩殿)
명경전
(明慶殿)
금명전
(金明殿)
  내전
(佛法 講修)
  자화전
(慈和殿)
집희전
(集禧殿)
  제사
  오성전
(五星殿)
영헌전
(靈憲殿)
  제사
상양궁
(上陽宮)
정양궁
(正陽宮)
숙화궁
(肅和宮)
서화궁
(書和宮)
태자궁
  수춘궁
(壽春宮)
여정궁
(麗正宮)
  태자궁
  망운루
(望雲樓)
관상루
(觀祥樓)
   
  의춘루
(宜春樓)
소휘루
(韶暉樓)
   

1171년(명종 1)에 발생한 화재는 후원의 정자 몇 채만을 남기고 모든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이리하여 귀족 문화가 난숙하게 꽃피었던 시기의 궁궐 건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무신의 집권으로 왕의 권력이 크게 위축되자 궁궐의 중건도 부진하였다. 1179년(명종 9)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196년(명종 26)까지 강안전(康安殿)과 대관전만이 중건되었으며 정전인 선경전은 1203년(신종 6) 무렵에야 지어졌다.

이때 지어진 선경전에 대해서는 상량문이 남아 있는데, 이 상량문을 지은 최선(崔詵, ?∼ 1209)은 건축을 담당한 관청인 장작감(將作監)의 우두머리를 역임한 적이 있다. 그는 이때의 공사에 대하여 “땅은 음양의 마땅한 곳을 택하였고 때는 좋은 날을 택하였으며, 토목 비용을 줄여 써서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선경전과 대관전은 각각 정전, 편전으로서 내부의 왕좌(옥좌, 보좌 등으로도 부름) 뒤에는 병풍을 둘렀는데, 이 의병(倚屛)에는 조선시대의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과는 달리 『서경(書經)』의 홍범(弘範)편과 『시경』의 무일(無逸)편을 썼다(『고려사』 희종 2년 4월 갑자).

불에 탄 지 30여 년 뒤에야 겨우 정전을 지었을 정도로 이 시기의 궁궐은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었는데 그나마 1225년(고종 12)에 저상전·봉원전·목친전·함원전 등과 낭무 137칸이 연소되는 큰 화재를 당한다. 게다가 계속되는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그곳에 궁궐을 짓고 40년 동안이나 개경을 버려 두었기 때문에 몽골병의 말발굽 아래 놓였던 궁궐은 거의 폐허처럼 변한다. 몽고에게 굴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에는 궁궐을 창건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무신 집권기에 축소된 왕권을 반영하듯 궁궐 건축도 앞 시기보다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1270년에 중건된 궁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 궁궐이 1362년(공민왕 11)에 홍건적의 침략으로 소실될 때까지 지속된 듯하다. 이 시기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왕실이 그들과 혼인을 하고 심지어는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궁정 문화의 성격도 많이 변화되었다. 따라서 궁궐 건축도 일부는 원나라에서 수입한 건축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공민왕(재위 1351∼1374) 이후에 원나라의 문물 전반을 배격하고 우리 것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은 뒤 대부분 사라졌다. 어쨌든 이때의 궁궐 건축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줄 유물 자료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앞서 언급한 여러 건물은 본래의 기능인 정치나 생활의 장으로 활용되었음은 물론, 불교나 도교의 종교적 행사를 치르는 데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고려왕조의 정치 체재가 유교를 근간으로 한 것인 반면, 종교 의식이나 의식주 생활 곳곳에 불교가 배어 있어서 궁궐 안 여러 곳에서는 다양한 불교 의식이 자주 거행되었다. 심지어 제1정전인 회경전이나 제2정전인 건덕전에서도 불교 행사가 거행될 정도였다.

<개성 회경전 터 만월대>   
<경령전 터(2008년의 고려 궁성 발굴)>   
<고려 정궁 모형>   

궁성 안 궁궐의 배치에 대해서는 정문으로부터 북쪽으로 계속되는 주요 건물군과 그 서북쪽 건물군이 알려져 있는 정도이다. 최근 남북공동 발굴조사로 서북 건물군터를 발굴 조사하였으며, 그 가운데 고려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경령전(景靈殿) 터가 확인되기도 하였다.92)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明堂) 자리를 궁궐터로 선정하였기 때문에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그대로 활용하여 높은 기단을 쌓아 높이 차이를 극복하고, 정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은 4면에 행각(行閣)을 둘러 폐쇄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정전 뒤쪽의 건물군은 지형상의 이유로 정전의 남북 중심축으로부터 약간 동쪽으로 벗어나 배치되어 있다. 터의 현황을 기초로 짐작해 보더라도 웅장한 건물들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모습은 송악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 이강근
92)국립문화재연구소, 『開城 高麗宮城 試掘調査報告書)』, 2008.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