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를 내면서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은 4명의 집필자가 크게 다섯 분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우선, 선사시대 사냥의 문화는 조태섭이 썼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의 사냥의 추이는 정연학이 맡았다. 조선시대의 사냥과 권력, 사냥꾼의 추이와 실체는 심승구가, 사냥의 의례와 놀이는 임장혁이 집필하였다.

우선, 조태섭은 선사시대 사냥의 문화를 통하여 인류가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화되어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핀다. 이를 위해 그는 ‘초기 인류의 삶과 사냥’, ‘구석기시대의 인류와 사냥’,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에 나타난 옛사람들의 사냥’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초기 인류의 삶과 사냥’에서는 최근 화석환경학자 브레인(Brain, 1981)이 초기 인류가 처음부터 도구 사용과 사냥을 했으리라고 본 종래의 가설에 제동을 건 사실부터 다룬다. 브레인은 인류가 살지 않던 동굴 화석에서 어린 아이의 머리뼈에 두 개의 커다란 표범 자국이 나 있는 사실을 통해, 초기 인류가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에서 능동적인 삶을 영위한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인 동물로서 사나운 맹수에게 잡혀 먹히며 살아남아 온 점을 밝혀냈다. 즉, 250만 년 전 초기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여러 짐승을 잡아 생활하는 사냥꾼이 아니라 때로는 사나운 맹수들에게 잡혀 먹히는 사냥감으로 삶을 유지해 온 먼 조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인류의 조상이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구석기시대의 인류와 사냥’에서는 인류가 능동적으로 사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돌을 깨서 석기를 제작한 이후로 추정되며, 이들이 바로 초기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구별되는 현생인류라고 말한다. 즉, 석기의 발달이 곧 본격적인 사냥꾼으로 변모해 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먼저 전기구석기(250만 년∼30만 년)에는 둥근 자갈을 떼어내어 단순히 날을 만들어 쓴 ‘찍개’에서, 점차 대상을 자르고 깎고 베는 ‘주먹도끼’로 발전해 나갔다. 중기구석기(30만 년∼4만 년)에는 르발루아기법(돌려떼기 수법)을 사용하여 ‘찌르개’가 만들어져 무게도 가볍고 날도 매우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였다. 후기 구석기(4만 년∼1만 년)에는 한층 더 기술이 발전하여 ‘돌날떼기’의 방식이 등장하여 찌르개·긁개·밀개·새기개 등 150종이 넘는 다양한 석기가 만들어졌다. 하나의 몸돌에서 수 십개 이상의 석기를 생산하는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도구를 이용한 사냥은 중기구석기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본격적으로는 후기구석기시대부터다. 전기구석기의 사냥은 찍개나 주먹도끼를 이용하고, 동물 화석도 작거나 중간 크기의 짐승들로 확인된다. 이는 전기구석기 사람들의 사냥이 그리 활발하지 못하고 제한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중기구석기의 사냥은 찌르개와 같은 도구의 발달로 짐승 사냥이 본격화되었다. 돌 끝을 뾰족하게 하여 창을 만들어 제법 큰 짐승인 들소·말·큰뿔 사슴 등을 사냥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지형과 지세를 이용하여 절벽이나 낭떠러지로 쫓아 잡는 몰이사냥의 방법도 사용하였다. 이제 사냥에서의 협업과 분업이 등장하였다.

후기구석기의 사냥은 본격적인 사냥꾼을 출현시켰다. 무려 150여 종의 다양한 석기는 앞선 시기보다 한층 더 진일보한 사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사나운 맹수의 사냥도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 길목에 잠복하거나 덫과 큰 함정을 파서 맘모스를 빠뜨리는 방법을 썼으며, 사슴이나 순록 뿔로 위장하는 방법도 사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냥의 대상은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였다. 강가의 많은 유적에서 발견된 뼈와 뿔로 만든 작살은 물고기 잡이가 성행하였음을 알려준다.

후기구석기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동물 화석은 옛코끼리·쌍코뿔이·하이에나·원숭이·맘모스 등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지 않는 동물들이 있고, 사슴·노루·호랑이·너구리·말·소 등도 확인된다. 특히, 옛 코끼리·하이에나·원숭이의 존재는 더운 기후에 살던 동물이고, 맘모스·털코뿔이·들소 등은 추운 기후에 살던 동물들이 다. 이는 구석기시대에 우리나라가 매우 춥거나 덥지 않은 온대성의 기후가 계속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동물은 사슴이었다.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에 나타난 옛사람들의 사냥’에서는 유럽의 동굴 벽화가 후기구석기시대의 산물이자 생활모습을 암시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소개한다. 함정과 그물, 그리고 울타리 등을 통한 다양한 사냥의 방법이 드러나 있다. 또한, 벽화 속에는 비교적 사냥하기 쉬운 순록이나 사슴보다는 사냥하기 어렵고 힘든 대형의 말과 맘모스·들소 등 큰 짐승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사냥감을 잡고자 하는 기원의 의미가 컸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구석기 동굴 벽화와 짐승의 뼈에 새겨진 그림은 단순히 사냥의 사실적인 묘사에 그치지 않고, 주술적 신화적 의미가 큰 정신세계가 담겨있는 구석기인들의 삶의 기록이자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이와 같이 조태섭의 글은 사냥을 통해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구석기시대의 인류의 변천과정을 흥미롭게 정리하고 있다. 한국 선사시대에 관해서는 다루어지지 않아 아쉽지만, 인류 전체의 역사 속에서 사냥의 계보학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정연학은 ‘사냥은 왕조의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역사문헌 속에 나타난 수렵문화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삼국시대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백제·신라의 수렵 기록을 통하여 수렵의 다양한 용어, 대상과 방법, 시기와 장소, 진상과 제사, 수렵 반대 움직임 등을 다루었다. 수렵과 관련한 용어로는 기종의 연구를 바탕으로 전(田), 전(畋), 수(狩), 순(巡), 순수(巡狩), 전렵(田獵), 대열(大閱) 등으로 구분하고, 특히, 엽(獵)자가 가장 많이 등장하며, 주로 이를 통해 잡은 동물로는 사슴·노루·멧돼지·기러기 순 으로 많다. 당시 수렵 방법으로는 활사냥·매사냥·몰이사냥·사냥개 등을 이용하였고, 사냥 시기는 주로 2∼4월 및 7월∼10월에 집중되었고, 기간은 짧게는 5일 이내에서 많게는 몇 달씩 한 경우도 있다. 수렵으로 잡은 동물은 왕이나 외국의 진상품, 그리고 제사용 제물로 사용하는 한편, 잦은 국왕의 사냥에 대한 폐단이 지적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고려사』에 나타난 수렵 기사를 통하여 왕과 수렵, 수렵시기와 기간, 진상과 진급, 매사냥, 수렵금지와 소송, 고려 궁궐에 나타난 동물들을 소개한다. 『고려사』에 왕들의 수렵기록은 원나라 간섭기인 원종 때부터 보이고, 충렬왕·우왕·충숙왕·충혜왕 순으로 사냥이 많았다. 특히, 사냥에 몰두한 왕들은 국정 운영의 소홀과 민생의 이반 등으로 짧은 정치 생명을 갖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려의 왕들은 여름을 제외하고 사냥을 하되, 2월과 10월에 집중되며, 주로 도성과 인접한 지역에서 1∼2일 이내로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지방관리가 사냥감을 진상하여 진급하는 사례가 보이며, 매와 사냥개의 진상이 빈번하였다. 응방의 설치로 인한 폐단이 컸으며, 호랑이·표범·노루·사슴·여우·삵·승냥이 등이 궁궐에 출몰하였는데, 특히 ‘노루가 성안에 들어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금기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왕들의 수렵에 대해 기록이 상세하다고 전제한 뒤, 기존의 연구성과에 의거하여 세종·세조·성종 태종 순으로 수렵의 빈도가 높다고 전한다. 다만, 세종 때의 사냥 기록은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의 기록이 더해져서 많은 것이며, 수렵에 능한 군주로 태조·태종·세조·성종·연산군을 들고 있다. 이어 수렵의 목적이 종묘에 천신하기 위함이며, 수렵의 방법으로 덪, 창과 그물, 매, 사냥개 등을 소개하였다.

이와 같이 정연학의 글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사에 기록된 수렵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수렵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살 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수렵이 중요한 생업수단이자 군사훈련, 종묘천신, 유희, 왕들의 체력단련을 위해 실시되고, 매사냥과 개사냥이 활발하였음도 강조한다. 당시 민간에서의 사냥 실태가 다루어지지 않은 점이 아쉽지만 사냥에 대한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심승구는 역사적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수렵문화를 대상으로 국가 권력과 사냥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사냥꾼의 종류와 실제를 살핀다.

우선, 권력과 사냥에서는 삼국 이래 국가 주도로 발달해 온 사냥문화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왕실의 안정과 집권체제를 합리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제도로 정비된다. 조선왕조의 통치기반이 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1394)에 따르면, 전렵(畋獵)이 ‘강무(講武)’와 ‘천신(薦新)’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 운영의 원리로 제시되었다. 사냥은 국가의 무비를 갖추고 종묘를 받들어 국가 권력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기반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민본(民本)과 덕치(德治)를 기치로 내건 조선왕조는 가축과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맹수를 제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국왕이 친림하는 사냥을 군례(軍禮)의 하나로 의례화함으로써 통치 행위의 절제와 조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도덕적 교화를 표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왕조가 통치원리를 규정한 『국조오례의』에 천금(薦禽)의식과 강무의식을 별도로 마련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냥의 어원은 15세기의 ‘산행(山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 세간에서 엽(獵)을 산행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산행을 가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예 중종대에 편찬한 『훈몽자회』(1527)에 수(狩)를 ‘산행 슈’, 엽(獵)을 ‘산행할 렵’이라고 기록하였다. 산행이 아예 수렵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진 것이다. 산행이 ‘사냥[山行]’으로 바뀐 것은 아마도 18세기 이후로 짐작된다. 즉, 산행→산앵→사냥으로 모음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군사와 사냥에서는 조선 건국과 강무제의 확립, 16세기 이후 강무제의 추이, 강무제의 운영과 실제를 다루었다. 특히, 조선의 강무제가 평소에 무비를 갖춘다는 원칙 아래 『국조오례의』의 군례로 정비되는 과정과 16세기 이후 강무제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제사와 사냥에서는 조선왕조가 유교이념의 비중에 따라 국가 사전을 대사·중사·소사로 정비하였는데, 그 가운데 천신(薦新)은 대사(大祀)에 해당하는 사전에 올려지는 제물이다. 그 내용이 『국조오례의』의 길례로 정비된다.

조선시대 군사체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호랑이 사냥부대의 창설과 활동이다. 고려와 달리 조선왕조는 정규군 이외에 별도로 호랑이 사냥을 위한 전문 부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호환(虎患)’이라고 불리는 호랑이(범)나 표범의 피해를 막기 위해 호랑이 사냥부대를 만들어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爲民除害)’함으로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민본과 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호환의 발생은 산림정책으로 산림이 우거진 반면에 농지개간으로 호랑이의 서식지가 줄어든 것이 배경이 되었고, 호환이 발생할 때 이를 잡는 착호정책의 실행여부에 따라 달랐다.

특히, 18세기 초·중반에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호랑이가 서식지의 이동으로 한반도 내의 호랑이 개체 수를 크게 증가시켰다. 또한, 조선왕조는 착호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착호갑사, 착호군은 물론이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삼군문의 포수로 하여금 착호분수제도를 시행하여 지역책임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호환의 피해가 극심해지면서, 조선왕조가 종래까지 군사를 동원하는 제도를 바꿔 먼저 호랑이를 잡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하자, 조선시대에 반란을 도모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조선왕조에 국가의례로 정비된 강무의는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의 성격과 함께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가의식으로 확립되 었으며, 철저히 유교적 예법에 의거한 사냥법으로 체계화되었다. 강무는 경기·강원·황해·충청·전라·평안도 등을 순행(巡幸)하면서 군사를 훈련하는 형태로서 지역을 위무하고 전국의 감사들에게 문안을 하게 함으로써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포수와 설매꾼에서는 사냥꾼의 추이와 함께 사냥꾼의 종류와 실제로 크게 나누어 살폈다. 사냥꾼은 ‘엽자’·‘엽인’·‘전렵자’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다가 총포의 등장 이후 포수로 바뀌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사냥꾼하면 포수를 지칭하게 되었고, 민간 포수를 사포수, 국가에 소속된 포수를 관포수라고 불렀다. 사냥꾼의 종류와 실제에는 매사냥꾼으로서 응사·응사계·엽치군이 있었음을 밝히고, 그물로 사냥하는 망패, 사복시 소속의 사복렵자, 멧돼지를 잡는 엽저군 등을 소개하였다. 이외 민간사냥꾼으로 산척·산행포수·썰매꾼도 소개하였다.

이와 같이 심승구는 주로 한국 사냥의 발달을 염두하면서도 주로 조선시대의 사냥이 당대 권력질서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체계화되었음을 천착하였다. 조선의 사냥정책이 유교이념의 바탕 아래 강무제와 천신제로 확립되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그 구체적인 살상을 파악하였다. 특히, 사냥의 어원이 15세기 군사들의 산행에서 비롯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에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조선시대의 다양한 사냥꾼의 실체를 드러낸 점에 사냥문화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

임장혁은 민속학의 관점에서 ‘사냥의 의례와 놀이’를 다룬다. 선사시대 이래 지속되어 온 사냥 의례가 청동기 농경문화의 정착으로 수렵 및 채취활동이 쇠퇴했으나 농경사회에서 사냥은 산지민에 의해 전승되고 사냥 의례도 사냥꾼들에 의해 맥이 이어져 왔다. 또한, 농경 생활의 정착과 벼농사의 확대로 민중들의 사냥 활동이 거의 사라졌으나 가축을 의례적으로 활용하면서 굿과 놀이 형태의 모의 사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사냥 의례를 크게 ‘사냥에서 행하는 산신제’와 ‘굿과 놀이에서의 모의 사냥’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냥에서 행하는 산신제’는 사냥꾼이 중심이 되는 사냥 의례이다. 사냥에는 개인 사냥과 집단 사냥으로 구분되며, 세계 어느 민족이던 사냥은 여성의 참여가 금기시되고 남자만이 참여한다. 그 까닭은 수렵민들이 산신을 여성으로 여기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고대인들이 음양의 조화를 통해 다산과 풍요를 이루기 위한 관념 때문이다. 사냥에서 행하는 산신제는 ‘사냥을 하기 전 산신제’, ‘사냥을 마친 후 산신제’, 그리고 ‘사냥이 안 될 때 지내는 산신제’,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지내는 산신제’ 등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사냥을 떠나기 전 의례는 금기와 고사로 이루어진다. 산에서 잡은 짐승은 산신의 소유인 동물이다. 제사의 대상은 산신으로 사냥 의례는 곧 산신제를 말한다. 이를 위해 금욕, 상가(喪家) 출입금지, 목욕재계, 심지어 산에서 눈 배설물도 받아 나오며, 산신이 싫어하는 철로 된 숟가락이나 식기도 피하며, 산신이 알아듣지 못하게 은어를 사용한다. 집단 사냥을 할 때 몰이꾼과 사냥꾼의 인원을 양수(陽數)인 홀수로 짜는데 홀수가 겹치면 잡귀가 달아나 복을 얻기 때문이다. 사냥을 떠나기 전의 산신제는 전날에 전원 또는 각자 지낸다. 사냥 당일 새벽에 산속에서 손 없는 방향(1∼2일 동쪽, 3∼4일 서쪽, 5∼6일 남쪽, 7∼8일 북쪽, 9∼10일 모든 방향가능)에 제물을 차리고 드리는데,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둘째, 사냥터에서의 산신제는 곧 사냥을 한 이후에 바치는 감사 제사였다. 짐승의 신체 일부를 떼어내어 산신에게 바친다. 산신제를 지낼 때 죽은 짐승에 대해 애도를 표하기도 한다. 원한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만일 짐승이 잘 잡히지 않을 때 지내는 의례는 산신이 사냥감을 내어 달라는 의미를지 닌 제사이다. 넷째,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지내는 산신제는 사냥감 다리를 묶어 운반하지만 머리 위에 이지 않는다. 이를 여성의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금기하는 것이다.

‘굿과 놀이에서의 모의사냥’에서는 농경의 정착으로 민중들의 사냥 활동이 사라졌으나 가축을 의례적으로 활용하면서 굿과 놀이 형태의 모의 사냥으로 이어진다. 굿에 나타난 모의 사냥은 ‘황해도 대동 굿’과 ‘우이동 삼각산 도당제’를 예로 설명한다. 황해도 평산의 대동 굿에는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마을 축제로 행해지는데, 그 가운데 사냥놀이가 굿거리로 전승된다. 모두 15거리로 이루어진 대동 굿 가운데 사냥거리는 8번째 순서로 진행된다. 사냥 거리는 동물을 제물로 받치되 활·화살·삼지창·칼을 가지고 매 타령을 하면서 사냥을 가는 과정을 골계와 재담으로 진행한다. 이어진 타살군응거리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며 타살을 하여 피를 먹으며 전쟁터에서 죽은 군웅을 푸는 형식이다.

특히, 사냥 거리는 실제 사냥이 아니라 모의극으로 진행하는데, 신과 인간의 매개로 제물을 가축으로 쓰면서 모의 사냥을 통해 산신의 소유인 산짐승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타살군웅거리에서의 도살된 제물은 원혼이 되어 원한 맺힌 군웅의 신령과 접한다고 믿는다. 사슬세우기는 군웅에게 바치는 육신을 삼지창에 세워 바침으로써 군웅에게 공물을 제공하며 원혼을 풀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수용하였음을 확인하는 의례이다. 동물 공희의 과정은 수렵신앙이나 의례와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놀이에 나타난 모의 사냥은 제주도 굿의 산신놀이와 강원도 황병산 사냥놀이에서 찾아진다. 두 지역에서는 실제 수렵이 행해졌을 때의 모습을 재현한다. 제주도 산신놀이에는 여성에 대한 금기와 사냥감 분배방식이 나타난다. 황병산 사냥놀이는 사냥의 방법, 도구제작, 사냥의 관행, 사냥제의 등 전통적 산간 수렵문화가 반 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냥놀이는 오늘날 이루어지지 않지만, 산신을 모시고 사냥놀이를 통해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위와 같이 임장혁의 글은 민속학의 관점에서 사냥 활동이 변화되고 사라지면서 사냥 의례가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냥꾼에 의해 전승되는 사냥 의례들은 사냥 문화의 옛 모습과 실상을 생생하게 잘 보여 준다. 사냥 활동이 사라졌으나 민중들이 굿과 놀이 형태의 모의 사냥으로 이어나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냥은 인류의 생존을 영위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던 만큼, 사냥 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동시에 풍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원하는 것이다. 사냥 의례는 단순히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허구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연에서 얻은 사냥감을 감사해 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는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이 책에서는 한국 사냥의 기원부터 변천까지를 다루지만 주로 조선시대까지로 한정하였다. 한국의 사냥문화사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일제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다루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이를 포함하지 못하였다. 또한, 사냥을 다루면서 사냥 도구와 방법, 기술에 대한 현장적인 내용들이 충분하게 다루어지지 못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하지만 이 글의 의미가 적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 사냥의 기원과 변천을 종합적으로 다룬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고고학·역사학·민속학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 한국 사냥의 역사와 문화를 큰 틀에서 정리한 사실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사냥의 문화사가 이 정도로 마무리될 문제는 전혀 아니다. 아무쪼록 이 연구가 향후 사냥의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작은 초석이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이 글이 나오는데 여러 모로 도움을 주신 장득진 선생님께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2011년 10월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필자] 심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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