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Ⅱ. 대외관계의 전개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4) 차라대군에 대한 항전
라. 몽고의 해도 침공과 압해도민의 항전

 유목민족의 체질상 몽고군이 수전에 능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몽전쟁의 장기화는 몽고군으로 하여금 고려의 섬에 대한 침공을 시도하도록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개전 초부터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던 고려의 해도입보책은 몽고로 하여금 이에 상응하는 전략을 시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몽고군에 의해 시도된 가장 대표적인 해도 침공의 사례는 고종 43년 차라대에 의해 직접 지휘되었던 押海島전투이다.

 압해도(전남 신안군)는 목포시와 무안군의 서해안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연안 도서인데 고려시대에는 영광 혹은 나주의 속군이기는 하였으나 押海郡이라 하여 독립적인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섬의 규모 및 육지와의 근접성 때문에 몽고군의 침입을 당한 주변지역에서 많은 입보민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몽고군은 고종 43년 초 전라도 일대까지 진출하였고 차라대의 행방도 4월에는 담양, 7월에는 海陽(광주) 등에 출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는 전라도 남부지역에 군사활동이 집중되어 있었다. 몽고군의 압해도 침공은 이러한 과정에서 시도된 것이다.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척에 깃발을 늘어 세우고 압해도를 치려 하여 尹椿과 한 관인을 시켜 배를 타고 督戰케 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윤춘 등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배를 옮기어 치게 하였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몽고인들이 드디어 수공의 장비를 모두 파하고 말았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韓洪甫).

 고종 43년 차라대의 전라도 남부지역 침공시 시도되었던 이 압해도 침공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끈다. 하나는 적장 차라대의 직접적 지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몽고군들이 동원한 수군 70척이라는 선단의 규모이다. 적어도 몽고군은 압해도 공략을 통해 당시 고려의 대통전략의 중심이었던 해도에의 입보책을 분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선례를 만들고자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해도 입보민의 조직적 저항은 몽고의 수공작전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것이다.

 몽고군이 고려의 입보문제에 대응, 이를 적극적으로 분쇄하고자 하는 전략을 가지게 된 것은 야굴의 침략 이후였다. 야굴군은 고종 41년 2월 철수 과정에서 북계의 葛島를 7척의 병선으로 침공, 사람들을 잡아간 사실이 있을 뿐 섬에 대한 직접적 공세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몽고의 해도 침공은 차라대군에 의해 본격적으로 기도되었던 것이다.

 차라대에 의한 해도 침공의 첫 시도는 압해도전투 바로 전년인 고종 42년 12월“몽병이 배를 만들어 槽島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279)는 기록이다. 이 전투의 규모나 정확한 위치 등은 알 수 없지만「배를 만들어」해도를 공격한 것은 몽고의 적극적 전략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러한 작전이 이듬해 전라도 서해안의 압해도 침공작전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몽고군의 조도 침공은 압해도 침공의 예행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차라대의 수공작전이 압해도 입보민의 용전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간 이후 그처럼 많은 병력이 동원된 조직적 작전은 시도되지 않았지만 소규모 병력에 의한 연안 해도 침공은 계속되었다. 고종 43년 10월 북계 艾島를 침구한 몽병 60인을 별초군이 모두 사로잡은 일, 고종 44년 8월 몽병에 의해 神威島가 함락당한 일, 몽고 병선 6척이 서해도의 昌麟島에 침입하였다가 甕津縣令 李壽松이 거느린 별초군에 의해 격파당했던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특히 신위도와 창린도에는 당시 내륙 군현의 수령들이 관내 주현민을 이끌고 집단으로 입보하여 있었다. 결국 여·몽전쟁의 말기인 고종 말년, 차라대군 침입기에 전투는 이제 연안 도서지역까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280)

279)≪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2년 12월 임진.
280) 尹龍爀,<高麗의 海島入保策과 蒙古의 戰略變化>(≪歷史敎育≫32,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