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2. 해외민족운동3) 중국 관내지역(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다. 신한혁명당과 입헌군주론의 제기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한인독립운동의 국제환경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11월 일본은 독일에 선전을 포고하고, 독일의 조차지인 靑島를 점령하였다. 북경 袁世凱政權의 친일정책과 일본의 21개 조 요구는 중국민들의 반일운동을 자극하였다. 한인세력은 이러한 국제관계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파악하였다. 일부 한인은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중국과 독일의 연합으로 일본이 패배하리라는 기대섞인 전망을 하였다. 新韓革命黨의 결성과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수립 시도는 이같은 정황을 배경으로 하였다.

 신한혁명당은 成樂馨 등에 의해 1914년 말 상해에서 결성되어, 러시아정부의 탄압을 피해 이동해 온 이상설을 중심으로 이듬해 3월 경 조직의 정비를 마쳤다. 이들은 대열강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노선, 국내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계, 무장투쟁노선 등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다. 본부장(李相卨)·재무(李春日)·교통(柳東說)·외교(성낙형)·감독(박은식) 등의 부서를 갖추고, 상해(지역책임자;신규식)·漢口·심양·장춘(李東輝)·안동·延吉(李同春) 및 서울·원산·평양·회령(朴定來)·나남(姜載厚)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대한제국의 망명정부 수립이었다. 이들은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하였고, 성낙형이 국내에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황제를 뵙고 중국정부를 상대로 한<中韓宜防條約>체결의 위임장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신한혁명당은 광무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에서, 독립쟁취를 위해서는 국내외세력 간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국내에서의 실력은 동지의 단체로 하되, 단체란 비밀무형 중에 공고한 정부이며, 정부의 조직 방법은 해외운동자의 책임이고, 이는 곧 대세를 관찰하는 인망을 규합할 조직의 요건”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망명정부의 조직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상설 등은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조성환은 서간도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구상은 독일정부의 보증하에 북경정부와 한국망명정부 간의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장래의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한국혁명 발발 시 중국과 독일이 이를 지원하며, 혁명성공 후 중국 및 독일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독일의 지원은 국채로 30년에 걸쳐 상환하며, 중국에게는 세관·철도사업상의 이권을 부여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들의 국제정세 분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즉 독일은 유럽전에서 승리한 다음, 일본에 빼앗긴 청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진출할 것이며, 이로 인해 일본의 고립화가 초래될 것이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 이후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내몽고를 점령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미국과 동맹하고 독일과는 간접동맹체제를 갖추고 미국과 독일은 연합군을 편성하여 동해를 봉쇄한 후, 러시아로 하여금 극동의 주인으로서 역할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러시아와 연방조약을 체결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국제연대 위에서 러시아는 연길지역으로부터 회령으로 침입하고, 중국은 營口를 방어하고 山海關支線 및 奉天支線 철도를 단절한다. 미국과 독일은 해양으로 진입하며, 영국은 비록 일본의 동맹국일지라도 중립을 지킬 것이다. 결국 각국의 연합체제가 구축되고, 일본은 고립화되어 일본의 패배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각국과 연합하여 독립쟁취의 길을 모색코자 한 것이 신한혁명당의 국제정세 판단에 근거한 독립운동 계획이었다. 이같은 판단 위에서 “자유국민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外援內應의 힘이 필요하며”, 이는 “在外者와 在內者가 함께 기회를 포착하여 협조체제를 이룸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고,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연계 추진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만주·시베리아·미주지방을 통할하여 단일부대를 편성하고, 이를 근거로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즉 중국과 독일이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국·영국·러시아도 이를 원조할 것이다. 이때 독립군부대가 일본군의 운송로를 차단함으로써, 일본군을 패배시키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 5월 중국이 21개 조를 수락함에 따라, 중일개전의 기대감은 무산되었고, 전황도 독일의 패전과 일본의 연합국 합류 국면으로 진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7월이래 성낙형이 체포되고 국내조직이 붕괴됨에 따라 이들의 제1차 세계대전의 국제정세를 이용한 외교활동 노력은 좌절되었다. 이처럼 이들은 중국·독일 등의 지원을 통해 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한 토대 위에, 만주와 노령의 독립전쟁 역량을 결합시키려 하였다. 광무황제를 최고지도자로 하는 망명정부의 수립 구상은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 한 의도와 함께, 연대 상대인 중국·독일의 帝政體制가 고려된 결과로 이해된다.448)

 신규식 중심의 상해지역 공화주의세력과 이상설 등 만주·노령지역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는 인물의 연합을 의미하는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몇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먼저 노령·북간도·미주지역과 상해·북경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던 해외독립운동세력이 연계하는 한편, 국내조직과의 연결을 시도한 사실은 독립운동진영의 통일과 단결에 대한 공감대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이는 1917년의<大同團結宣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시도는 1910년대 국제정세 및 중국정세에 대한 판단의 미숙성을 드러낸 것이었지만, 일면 국제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독립지상의 기회포착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1913년 3월 원세개정부에 의한 송교인암살 및 혁명파 탄압은 중국혁명파에 의한 공화주의정부 수립 가능성을 반감시킨 반면에, 원세개에 의한 제정의 수립 가능성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에는 이러한 중국혁명에 대한 우려와 기대감이 함께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 상해 한인사회의 경우, 중국혁명세력의 원세개 토벌운동에 대한 반응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으며, 상당수의 한인들은 적극적인 지지를 유보하고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였다.449)

 신한혁명당의 존재는 중국혁명세력과의 한·중연대 형성이 한인독립운동의 국제적 기반 조성에 유리하다는 판단의 연장선상에서, 혁명파 이외 여타 중국정치세력과의 연대에도 적극적인 입장이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었다. 즉 한국독립운동을 중심가치로 설정한 관점에서 비롯된 주체적인 국제연대의 한 표현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448) 신한혁명당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강영심,<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윤병석,<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증보 이상설전≫, 일조각, 1998).
449) 배경한, 앞의 글, 50∼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