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1.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진입작전2) 독립군의 편성(1) 북간도지역
라. 대한북로독군부

 大韓北路督軍部는 1920년 5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대한국민군, 그리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단일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으로, 1920년 6월의 봉오동승첩을 거둔 주역이었다.

 이 군단을 이끈 홍범도는 1907∼8년 경 북청·삼수·갑산·장진 일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의병장으로, 국치 직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국외 의병에 합류하였으며, 1910년대 중반에는 한때 북만 密山府로 들어가 재기 항일전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홍범도는 3·1운동을 겪은 후 독립군 편성에 착수하였다. 즉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한 뒤 연해주에서는 직접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휘하 150여 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북간도에 들어가 정예의 대한독립군을 편성하고 항일전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홍범도는 1919년 여름부터 국내진입작전을 벌이는 한편 독립군단간의 통합운동과 연합작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우선 왕청현의 羅子溝와 蛤蟆塘 등지에서 대한국민회 인물들과 상의한 끝에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하였다. 행정과 재정은 대한국민회가 담당하고 군무의 경우는 대한독립군을 홍범도가, 대한국민군을 안무가 각각 분담해 통솔하기로 약정하였다. 그러나 실전에 임할 경우에는 홍범도가 ‘北路征日第一軍司令部長’의 직함을 가지고 전군을 지휘토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성립된 북로정일제일군은 곧이어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도 군사통일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大韓北路督軍部’414)가 탄생하게 되었다. 통합 군단은 군무도독부의 본영이 있던 봉오동에 전력을 집결시키면서 부단한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하였다. 일제 정보기록에서는 대한북로독군부의 전력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해 놓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한독립군 계통으로는 병력 460명에 소총 200정, 탄약 4만 발, 권총 50정의 전력을 구비하고 있고, 군무도독부와 대한국민군 계통으로는 280여 명의 병력에 소총 200정, 탄약 1만 2천 발, 수류탄 120개, 기관총 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대한북로독군부의 편제와 임원을 보면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를 필두로 북로정일제일군사령부 사령부장에 홍범도, 부관에 朱建, 참모에 李秉埰·吳周爀 등이 선임되어 있었다.415)

414)大韓北路督軍部와 大韓北路督軍府는 그 내용을 달리하는 명칭으로 보인다. 일제가 탐지한 독립군의 한 문서인<國民 第73號 軍務機關組織ノ件>(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3, 原書房), 323쪽에는 ‘大韓北路督軍府’라 하였고, 다른 문서인 ‘大正十年四月;<間島方面에서의 不逞鮮人團의 組織 및 役員 調査書>에서는 ‘大韓北路督軍部’의 조직계통 속에서 ‘大韓北路督軍府’를 기록해 놓았다. 한편 일제측의 봉오동전투 보고서인<安川追擊隊ノ鳳梧洞附近戰鬪詳報>(독립기념관 소장문서)에는 ‘大韓軍務都督府’가 ‘大韓北路督軍府’로 개편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 그리고 대한국민군 등 3개 군단 통합체의 명칭은 大韓北路督軍部이며, 그 조직계통 속에서 대한국민군과 군무도독부군의 합체를 大韓北路督軍府로, 대한독립군을 北路征日第一軍司令部로 불렀던 것 같다.
415)≪獨立軍團名簿≫, 258∼2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