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3. 여성운동5) 근우회의 조직과 활동(2) 근우회의 창립과 이념
나. 근우회의 이념:강령과 선언문

 근우회의 창립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강령에 제시된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다. 근우회는 다음<선언문>에서 이를 보다 선명하게 밝히기에 노력하였다.

<선언문>

역사 있은 후부터 지금까지 인류사회에는 다종다양의 모순과 대립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유동무상하는 인간관계는 각 시대에 따라 혹은 이 부류에 유리하게 혹은 저 부류에 불리하게 되었나니 불리한 처지에 서게 된 민중은 그 설움을 한껏 받았다. 우리 여성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불리한 지위에 서 있어 왔다. 사회의 모순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화하였으며 절정에 달하였다. 사람과 사람 상에는 인정과 의리의 정열은 최후 잔해도 남지 아니하고 물질적 이욕이 전 인류를 몰아 상벌의 수라장으로 들어가게 했다. 전쟁의 화는 갈수록 참담하여가며 확대하여가고 빈국과 죄악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 시대 여성의 지위에는 비록 부분적 향상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환상의 일편에 불과하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일보를 진하여는 전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따로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억울한 인류가 다 한가지 새 생활을 개척하기 위하여 분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며 또 역사는 그 분투의 필연적 승리를 약속하여 주고 있다. 조선여성운동의 진정한 의의는 오직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의 이해에 의하여서만 비로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의 역할은 결코 편협하게 국한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인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안된다(이하 11자 삭제당함). 그러나 일반만을 고조하여 특수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고로 우리는 조선여성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여성의 모든 특수점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갖게 되었나니 이와 같은 조직으로서만 능히 현재의 조선여성을 유력하게 지도할 수 있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여성운동은 세계사정에 의하여 또 조선여성의 성숙도에 의하여 바야흐로 한 중대한 계단으로 진전하였다. 부분부분으로 분산되었던 운동이 전선적 협동전선으로 조직된다. 여성의 각층에 공통되는 당면의 운동목표가 발견되고 운동방침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운동은 비로소 광범하게 또 유력하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단계에 있어서는 모든 분열정신을 극복하고 우리의 협동전선으로 하여금 더욱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 조선여성의 의무이다. 조선여성에게 얼크러 있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것을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이니 이 양시대적 불합리에 대하여 투쟁함에 있어서 조선여성의 사이에는 큰 불일치가 있을 리 없다. 오직 반동층에 속한 여성만이 이 투쟁에 있어서 회피 낙오할 것이다. 근우회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1,000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槿友≫창간호, 3∼4쪽).

 이상 선언문은 좌·우파 여성운동노선이 함께 요구하는 공통 가능한 언어로 조직목적과 활동이념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었던 만큼 조선여성동우회의<선언문>처럼 선명하게 여성운동의 방향·방법론 등을 논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조선 여성운동이 존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곧 조선여성이 처한 가장 불리한 지위인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는 근우회 이념이 反봉건 여성해방과 일제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주의 여성해방론과 더불어 무산계급 착취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으로서의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더불어 포괄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불합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국 여성은 단결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해 가는 것은 “우리 1,000만 자매의 역사적 임무”라고 선언하였다. 궁극적으로 근우회운동은<선언서>중반에 밝히고 있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이는 근우회운동이 조선의 여성해방이라는 편협된 운동이 아닌 세계인류 전체를 위한 운동이 되어야하므로 조선여성의 단결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다음으로 여성의 지위향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선언서>에 “이 시대 여성의 지위에는 비록 부분적 향상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환상의 일편에 불과하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여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다”고 함은 구시대의 유물들이 남아 있는 한 여성 지위는 부분적 향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론은 여성의 경제적 획득론과 지식향상론의 두 논리가 쟁점화되어 있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의 주장에 대하여, 朴敬植은 “구속에 울고 압박에 우는 우리는 먼저 경제적 해결을 얻어야 만족한 생활을 얻을 수 있다. … 서양여자들이 조선여자보다 비교적 해방이 된 것은 그들의 경제적 조건이 우리보다 나은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범죄와 모든 행복이 모두 경제 까닭이오, 여자해방뿐 아니라 사회적 독립 내지 민족적 행복도 경제상 독립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또 박호진은 성차별이 생긴 것은 “여성에게도 있던 경제적 권리가 남성에게로 넘어간 이후부터”이므로 이제 우리는 그것을 다시 쟁취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상은 사회주의 여성운동론자의 주장이었다. 이에 반하여 민족주의 진영의 여성운동자들은 지식향상론을 더 중요시하여, “인습·전통에 매어 있는 우리는 썩은 돈만 찾을 것이 아니라 지식을 향상시켜 하루바삐 해방의 길을 찾자”, “우리 여자가 모든 점으로 보아 남자보다 비열한 것은 지식이 없는 所以이다. 그러므로 여자해방의 급선무는 지식향상에 있다”580)고 하였다. 그런데 좌·우 진영간의 지식향상에 대한 인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다음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자측의 지식향상론이다.

근우회가 학교인가? 아니다. 근우회는 결코 학교가 아니다. 칠판 밑에서 엄숙한 제한을 받아가면서 특정한 교과서에 의하여 그것을 가르치며 그 가르치는 것을 억지로 실행시켜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자는 이 세상의 모든 학교와는 전연 딴 것이다. 그러나 우리 1,000만이나 되는 조선여자, 아니 온 세계 모든 여자가 압박받는 계급이 되어 있는 것을 깨우치게 하며, 그래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자유를 찾는 것이 곧 이 세상 영원히 압박을 없애버리고 우리 여자도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온갖 힘을 다하여 가장 높고 귀한 문화를 창조하여서 행복 있고 광명 있는 생활을 만들고자 힘쓰는 뜻으로 이 근우회는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학교라 할 것이다(<槿友會討論會를 보고서>,≪朝鮮之光≫, 1927년 11월호, 70∼71쪽).

 근우회운동은 여성으로 하여금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찾게 함으로써 영원한 해방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진영의 여성지도자들은 한국 여성이 안고 있는 지식향상의 최대과제는 문맹퇴치로 여성을 계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진지회원 金貞媛은 “1,000만 여성의 지위향상을 도모하려면 무엇보다 급무가 문맹퇴치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 근우회운동의 지방적 역할은 농촌여성의 계몽운동에 전력을 집중하여야 되겠습니다”581)라고 주장하였으며, 근우회 중앙간부이자 정신여학교 교사인 김영순은 “조선여성으로 하여금 완전한 조선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당한 지도와 교양은 오로지 우리 근우회에 있을 줄 알며 이것이 우리의 목적인 줄 안다”582)고 했다. 또 김활란은 “조직과 기관에만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떠나 개인적으로 일반 조선여성의 요구인 교양사업에 주력 계속할 것”583)이라고 했다.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여성운동을 새롭게 출발시킨 근우회는 운동의 추진과정에서 이념의 차이로 인하여 운동의 방법론상에서도 상당한 거리를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더 강하게 부각되어 그들이 근우회의 헤게모니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였고 민족진영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의한 여성운동을 추진하고자 근우회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위기에 처한 근우회는 1929년 7월 25일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근우회운동의 재정비를 위하여 다음 7항의 행동강령을 새로 제정하였다.

①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② 일체 봉건적 민습과 미신타파.

③ 조혼폐지 및 결혼의 자유.

④ 인신매매 및 공창폐지.

⑤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옹호.

⑥ 부인노동의 임금차별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지불.

⑦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폐지.

 (≪朝鮮日報≫·≪東亞日報≫, 1929년 7월 25일,<槿友會大會에 行動綱領과 議案>).

 이상 행동강령은 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문제를 총체적으로 집약한 것이다. 강령 ①은 여성차별적 모순으로서의 현실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이며, 강령 ②∼④는 가부장권적 구습에 의한 전통적인 여성차별과 억압에 대한 도전과 극복이며, 강령 ⑤∼⑦은 여성에 대한 경제적 불이익으로서의 차별을 논한 것이다. 이 중 ④의 “인신매매 및 공창폐지”는 사회주의적인 경제적 성차별론에 의한 것이다. 독립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교육도 훈련도 없는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성상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580)≪東亞日報≫, 1927년 10월 22일.

朴容玉,<1920年代 韓國女性團體運動>(≪한국근대여성연구≫, 숙명여대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 1987), 268쪽.
581) 金貞媛,<啓蒙運動의 努力>(≪槿友≫창간호), 60쪽.
582) 金英淳,<우리 本位의 敎養을 普及하자>(≪槿友≫창간호), 61쪽.
583) 金活蘭,<事業을 꾸준히 하자>(≪槿友≫창간호), 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