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Ⅰ. 청동기문화1. 청동기시대1)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1)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청동기시대의 개념
            • (2)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2) 인골 및 편년
          • 3) 청동유물의 분포와 사회
            • (1) 각 청동유물의 형식과 그 분포
            • (2) 청동유물의 지역적 특성
            • (3)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 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 (3) 영동·영서지방의 유적
            • (4) 영남지방의 유적
          • 2) 청동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무덤
          • 3) 청동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2) 석기
            • (3) 청동기
            • (4) 뼈연모
          • 4) 야금술의 발달과 청동유물의 특징
            • (1) 청동기의 제작 기술
            • (2) 청동유물의 성분분석
          • 5) 토기의 과학적 분석
        • 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1)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 2) 중국
            • (1) 청동거울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2) 청동유물의 동물문양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청동기의 성분분석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일본
            • (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 (2) 한·일 청동기문화의 교류관계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철기시대의 개념
            • (2)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3) 문헌자료와 철기시대
          • 2) 철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주요 철기유적
          • 3) 철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패총
            • (3) 무덤
            • (4) 방어시설
          • 4) 철기시대의 유물
            • (1) 철기 생산기술
            • (2) 철기유물
            • (3) 토기
            • (4) 토기의 과학적 분석
            • (5) 유리공예
        • 2.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3. 주변지역 철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1) 여명기(은·서주시대)
            • (2) 초보적 형성기(춘추∼전국 조기)
            • (3) 형성·보급기(전국 중∼만기)
            • (4) 발전기(전한 이후)
          • 2) 일본
            • (1)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별 추이
            • (2) 한·일 초기 철기문화의 교류관계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라고 하면 청동기가 제작 사용되는 시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남·북한을 통틀어 그러한 생각이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무문토기시대라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으나 무문토기가 사용됨과 동시에 청동기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남한에서 공렬토기나 화분형토기와 청동기가 공반된 예는 현재까지 없으며,0005) 북한에서는 팽이형토기 유적인 금탄리 8호 집자리에서 청동끌, 신흥동 7호 집자리에서 청동단추가 출토되었으며, 나진 초도에서는 청동방울과 원판형기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북한편년에서는 이들 유적을 대부분 기원전 10세기 이후의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 청동기의 시작이라고 보는 기원전 2000년기 초반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3시기법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청동기가 사용되지 않은 채 무문토기를 사용한 시대는 신석기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철기시대 전기(종전의 초기 철기시대, 이하 철기시대 전기로 용어 통일함)에 세형동검, 주조철부 등과 공반된 점토대토기는 철기시대에 사용된 무문토기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무문토기는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3시기에 걸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청동기시대의 편년도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 및 그 공반유물만 나와도 청동기시대로 볼 것인지, 청동기만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 편년에 큰 차이가 생기게 된다. 아울러 청동기를 전파나 교역에 의해서 수입해서 사용하는 시대도 청동기시대라고 할 것인지, 청동기를 제작하는 용범이 나오고 청동기를 제작, 사용하는 전문적인 집단이 존재한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나오는 시기부터 청동기시대로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청동기가 존재하는 증거가 나오는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청동기 그 자체가 특별한 사회적 변화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청동기는 사용 초기에 장신구나 칼과 같은 소형의 도구에 한정되어 사용되었으므로, 청동기가 철기와 같이 농기구 등의 생산도구로 사용되어서 생산력의 비약적 증가와 같은 사회적 변화를 수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청동기라는 한 요소만이 전 세계에서 다양하게 진행된 청동기시대의 사회발전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청동기시대라고 하는 것은 청동기라는 물질문화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킨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 변화로는 교역·분업·동물의 힘을 이용한 농경, 도시·문명·국가의 발생, 세습적 신분체제, 문자의 사용, 정복전쟁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청동기가 이 시기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청동기시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그 외에도 유물 조합상과 유구의 성격 등에 대해서도 다각적으로 고찰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와 같이 ‘무문토기를 사용한 시대’=‘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이 당분간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부의 주장처럼 ‘무문토기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후기 무문토기가 철기시대에 사용된다는 점과 무문토기라고 했을 때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의 용어와 일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앞으로 연구성과가 계속 축적된다면 우리 나라만의 발전과정에서의 특수성과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개념이 나올 것이다.

 일찍이 즐문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바닷가나 강가에서 거주하였으며, 무문토기를 사용한 사람은 구릉지대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다른 생업경제를 영위한, 같은 계통의 사람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0006) 그러나 이와 달리 우리 나라 무문토기와 즐문토기가 다른 계통의 주민이 남긴 것이라고 주장된 이래0007) 무문토기와 즐문토기간에는 문화 및 민족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중국기록에 보이는 濊貊族에 착안하여 즐문토기인을 예인으로, 무문토기인을 맥인으로 본 학자도 있다.0008) 그러나 이는 즐문토기와 무문토기를 같은 시기의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허점이 있는 견해이다. 이후 즐문토기인=고아시아인, 무문토기인=예맥족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0009) 이러한 일련의 주장은 두 문화 사이에 문화적·종족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교체론’에 대한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0010) 즐문토기에서 무문토기로의 점진적인 발전 가능성을 암시하는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요동 및 압록강지역의 우가촌과 쌍타자유적에서는 층위적 변화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즐문토기에서 무문토기로의 이행이 아니라 龍山末期文化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요동반도의 용산문화 흔적은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통해 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장산열도의 신석기 말기 유적에서 보이는 채도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압록강유역의 신암리 청등말래나 두만강유역 서포항과 호곡동의 층위적인 증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요동지방의 후기 신석기시대와 같은 채도계의 타래무늬가 보이고 있어서 북부지방 무문토기의 도입에서의 일정한 보편성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강유역에서 두 토기문화가 층위적으로 공존하거나 순차적으로 교체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矢島나 內坪에서는 무문토기계의 태토를 가진 즐문토기가 발견되었으며 여러 무문토기 주거지에서 즐문토기가 발견되고 있어 두 토기문화간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강화도 삼거리에서는 지석묘 발굴시에 주위에서 작은 석괴들이 깔려있는 유구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점토질계의 횡주어골문이 그어있는 토기가 발견되었다.0011) 내평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형 부석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역시 횡주어골문이 새겨진 즐문토기와, 공렬문과 돌대문이 돌아간 토기가 발견되었다.0012) 시도패총에서도 신석기시대 최말기에 속하는 1지구에서 적석유구가 발견되었는데 비록 유물은 즐문토기 1점만 나와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위의 적석유적과 그 성격이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0013) 이 밖에 대동강변의 청호리에서도 적석유구가 발견된 바가 있으며,0014) 휴암리에서도 무문토기 주거지에 의해 파괴된 적석유구 내에서 즐문토기가 발견된 적이 있다.0015)

 아직까지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 힘드나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요동지방, 두만강 및 한강유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것이 순동시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점진적인 발전과정 속에서 즐문토기가 무문토기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요동지방이나 두만강유역에서 채도계의 문화가 무문토기로의 이행과정에 개입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문화의 변천에 중국의 문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강유역에서는 즐문토기에서 곧바로 무문토기로 이행한 것으로 보여져, 이 과정 역시 지역적인 특색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북한에서는 기원전 2000년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요동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부계씨족제도가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그 증거로 이 시기의 매장법이 집합식 장법에서 독립식 장법으로 전환되었으며 주거지를 이루는 단위가 소가족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0016) 적석총을 사용한 집단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지석묘가 지배적인 묘제가 되는 기원전 12세기에 이전의 공동체적인 기구가 해체되고 ‘소국’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보았으며, 이후에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토기가 쓰이는 기원전 11∼10세기 정도에는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0017) 또한 북한은 고조선에 들어서면서 노예제사회로 발전하였다고 보는데,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에 국가의 발생과 함께 노예소유자 사회가 등장한다는 것이다.0018) 이러한 증거로 崗上무덤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서 나타난 순장의 증거를 통해 당시의 노예소유자들이 피지배계급인 노예들을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권력기구인 국가를 성립시켰다고 주장하였다.0019) 근래에 쏟아지는 요동지역의 발굴성과를 통해서 요하유역이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급속한 사회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지속적인 발전이 고조선의 성립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0020) 고조선이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리라는 것은 학자간에 별 이견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문화를 기반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고조선의 강역과 그 중심지의 문화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지석묘사회의 경우 족장사회라고 여러 차례 주장된 바 있다.0021)

 청동기시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편년은 청동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 편년은 기본적으로 비파형동검의 출토시기를 전기로, 세형동검의 출토시기를 후기로 보는 것이다. 동검에 대한 최초의 견해로, 일제시대에 발견된 비파형동검이 일본출토 廣形銅矛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세형동검의 퇴화한 형태로 간주한 것이 있다.0022) 그러나 1960년에 十二台營子墓가 발굴되면서 이러한 인식은 바뀌어 비파형동검의 연대를 기원전 6∼5세기 정도로 편년하기에 이르렀다.0023) 그러다 다시 우리 나라의 청동기문화는 2차에 걸쳐 유입되었는 바, 1차는 시베리아지역의 북방계 청동기문화이며, 2차는 철기와 같이 들어오는 중국계 청동기문화로 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북방지역에서만 일부 존재한 것으로 보았다.0024) 하지만 이후 그 의견을 일부 수정하여 타가르-오르도스와의 연계성을 주장하며 기원전 700년경을 상한으로 잡았다가 다시 기원전 10세기설을 주장하되, 이것은 만주지역을 포함한 것으로서 실제로 한반도 내에서는 기원전 7세기 정도가 확실할 것으로 보았으며, 기원전 300∼0년 사이의 청동 2기를 철기시대로 분리시키기에 이르렀다.0025)

 한편 이와 달리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는 시베리아의 카라수크문화에서 전파되었으며, 그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이전(구체적으로 기자의 동래와 관련하여 기원전 13세기로 봄)임을 주장하면서 문화의 주체를 예맥으로 상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0026) 여기서 기원전 13세기는 요동지방에 한정된 연대이며 청동기문화가 반도에 본격적으로 파급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즉 예맥 2기의 문화로 보았다. 이는 유물의 분석보다는 주변문화의 전파를 상정함에 따른 연구결과였다.

 이외에도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구체적으로 비파형동검이 유입되는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보아서 비파형동검은 기원전 4세기 정도로 보고, 세형동검은 1기가 기원전 4세기 말∼기원전 2세기 초, 2기가 기원전 2세기 후반∼기원전 1세기 말, 그리고 3기는 제2식 세형동검(절대가 검의 하반부까지 내려오는 식)이 사용된 시기로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1세기 말경까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무문토기를 청동기시대로 곧바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무문토기가 신석기시대에 속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0027) 또한 송국리 석관묘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이 요서지방 남산근유적의 것과 같은 형식인데 그 연대가 기원전 9세기인 점을 들어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연대를 기원전 9세기 이상으로 소급한 경우,0028) 동검을 4식으로 분리하고 그 연대를 기원전 1000년기 초기에서 기원전 1세기로 추정한 경우도 있다.0029)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를 북쪽에서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과는 달리 중국의 화중지방에서 건너왔다고 보고, 다뉴세문경의 편년안과 중국식동검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유입 시기를 기원전 6세기라고 보기도 한다.0030) 이와 달리 기존에 주장되어 오던 시베리아 유입설을 반대하고 발해연안이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이라고 보고 요동지방의 청동기시대를 기원전 1500년경으로 본 견해도 있다.0031)

 남한의 연구성과와 관련하여 일본의 견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요령성 대련에 위치한 누상묘에서 명도전이 출토된 점을 들어서 비파형동검의 사용 상한을 기원전 5∼4세기로, 하한을 기원전 3세기로 보거나,0032) 동검문화를 5기로 분리하고 그 1기를 춘추시대 중기(기원전 6세기)로 보고 전한대인 4기에 철기가 출현하였다고 보기도 한다.0033) 이외에도 무문토기는 청동기라는 설에 반대하고 순수 청동기의 연대를 기원전 8∼7세기로 보기도 하는데,0034) 이처럼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연대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해방 전부터 고수해 왔던 그들의 청동기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야요이시대의 청동기 추정연대가 기원전 4∼3세기를 넘어가지 못하며, 상대편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하여서 한반도의 청동기연대도 기원전 5세기 정도 이상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0035)

 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지역적인 편년에 치중하였을 뿐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 토기의 전반적인 편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각 지역간에 토기 형태상의 차이가 크며 상호 비교할 만한 유물 내지는 확실한 체계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 예로 혹자는 각형토기를 4기로 나누고 기원전 10∼9세기에서 기원전 4∼3세기로 편년하지만,0036) 이와 달리 남한지역의 무문토기문화가 공렬토기로 대표된다고 보고 그 연대를 기원전 10세기(조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후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0037)

 그런데 최근 이러한 무문토기시대 초기에 청동기가 공반되지 않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새로운 시대구분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0038) 여기서는 기존의 청동기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어 첫번째는 ‘無文農耕-遼寧靑銅文化期’로 설정하여 한반도의 무문토기 定着農耕文化와 요령지방의 半農半牧 청동문화와의 共存接變期로 약 기원전 1500∼600년으로 잡았다. 두번째는 ‘韓國式農耕靑銅文化期’로서 위의 이질적인 두 문화가 한반도에서 서로 융합되어 한반도 최초의 계급적 복합사회가 출현한 시기이며 대략 기원전 600∼300년의 시기로 보았다. 이 견해는 기본적으로 무문토기와 청동기라는 요소가 서로 이질적인 문화배경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밖에 14C 연대에 신뢰성을 부여하여,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1300년 정도로 올라갈 수 있음을 주장한 견해도 있다.0039)

 한편 북한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인식의 변천과정은 크게 3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보여진다. 첫번째 시기는 ‘조선 금속문화의 기원에 관한 토론회’를 중심으로 금석병용기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처음의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이론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시대를 설정한, 다분히 관념적인 것이다.0040)

 두번째 시기는 청동기시대의 설정이 구체화되는 시기이다. 지탑리에서 즐문토기와 무문토기가 층위를 이루면서 퇴적된 채로 발견되자 무문토기문화층의 각형토기가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같은 종류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각형토기와 거석문화를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표지적인 문화로 간주하게 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파론적 관점에서 동남아시아, 중국 장성지대, 남부시베리아 등지의 유물들과 비교하여 편년을 시도하였다.0041)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서북지방 각형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상한을 기원전 2000년기 말까지로 소급하는 견해도 있다.0042) 그런데 이 때까지의 연구는 주로 개개의 유물을 대상으로 편년한 것이다.0043)

 세번째 시기는 대상지역이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요동지방과 두만강유역으로 확대되면서 편년이 더욱 올라가게 되는 단계이다. 1965년 한·중 공동 고고학 발굴대에 의한 중국 동북지역 발굴을 통해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2000년기 전반기에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기인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까지 이어진다고 보았다.0044) 청동기 자체의 출토보다는 전체 문화상에서 보이는 변화를 사회적인 변천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변화가 기원전 2000년기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이후로 연대나 지역적인 편년은 커다란 변동을 보이고 있지 않으며, 지역에 따라 상대연대를 중심으로 편년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북한의 각 지역에 대한 편년을 살펴보자.0045) 기원전 2000년기 전반기의 문화에 대해서는 신석기시대 전통의 연속인 새김무늬·홍도·신석기시대의 마제석기가 존속한다는 점 등으로 보아 아직은 완전하게 청동기시대로 바뀌지 않았다고 보았다. 기원전 2000년기 후반기 및 1000년기 전반기가 되면 비로소 신석기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지며 청동기가 출토되는 사례가 증가한다.

 요동반도 지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기 전반기의 주거유적으로 쌍타자 2문화층이 있으며, 채색무늬나 새김무늬가 사라지고 무문토기와 흑도가 나오는 경향이 강해진다. 무덤유적으로는 장군산(요동반도 남쪽 노철산 북쪽의 위치)의 돌무지무덤과 단타자의 움무덤을 들었는데, 모두 쌍타자 2문화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의 문화로는 쌍타자 3문화층·양두와·대대산 적석묘 등이 있다.

 두만강유역은 서포항·오동·범의구석(호곡동) 등의 문화유적을 중심으로 편년된다. 서포항 청동기 1기층→오동 청동기 1기층(기원전 2000년기 전반기)→범의구석 2기→초도유적 홍도 출토층(기원전 2000년기 후반기)→오동유적 2·3기층(기원전 2000년기 말∼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 초)→범의구석 4기층(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 초)의 순으로 발전되었다고 본다.

 대동강유역의 문화는 팽이형토기문화로 대표될 수 있는데, 주거유적인 금탄리유적 제3문화층의 집자리의 평면윤곽은 장방형이며 집 내부에 특별한 화덕자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석기에서는 도끼·대패날·끌 등의 공구류와 반월형석도가 보인다. 신흥동유적 역시 금탄리와 비슷한 특징의 주거 유물로는 청동단추·돌돈·곤봉 등의 석기가 있다. 이 밖에 100여 개의 대규모 주거지군이 발견된 석탄리도 있다. 이상의 유적에서 보이는 대동강유역의 팽이형토기 주거지의 특징은 화덕을 집 외부에 설치하고 기둥은 지상에 설치하고 가는 기둥을 벽에 세워서 벽의 골조를 겸하게 하며 지붕은 용마루를 걸고 경사를 이룬 반 움집의 형태를 갖고 있다.

 이 시기의 묘제로는 고인돌과 석관묘를 들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고인돌을 침촌형(종래의 변형 고인돌)과 오덕형(전형 고인돌)으로 나누었는데, 침촌형(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 고인돌의 경우 1유형은 뚜껑돌과 돌관이 결합된 양식이며, 2유형은 돌곽은 두꺼운 판석으로, 좌우의 열린 쪽은 얇은 판석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유물상은 팽이그릇을 비롯하여 기원전 2000년기 후반기에 이 지역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흡사하다. 오덕형(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 고인돌의 경우 첫째 유형은 높이가 낮고(50∼60cm) 무덤구역 시설이 잔존해 있으며, 둘째 유형은 무덤구역 시설이 전혀 없고, 돌곽의 규모가 커진 형태라고 본다. 북한에서는 이상의 유형들이 시차를 반영한다고 보고, 청동기시대의 사회관계가 발전해가면서 집단적인 묘역에서 독립적인 장제로 발전해갔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0046)

<표 1>대동강유역 청동기시대의 편년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경우 공귀리 하층→공귀리 상층→심귀리의 순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한편 압록강 중상류에서 북으로 멀지않은 송화강유역의 경우에는 서단산자 유형과 망해둔 유형이 있다. 서단산자의 경우 미송리형의 변형 또는 조형으로 보이는 토기가 부장되었으며 묘제로는 석관묘가 대표적이다. 망해둔은 즐문토기·승석문·홍도·무문토기 등 다양한 토기군이 복합된 것으로 보아 다양한 문화층이 존재한 것으로 생각되며 기원전 2000년기가 상한으로 여겨진다.

 함경남도에서는 홍도·흑요석 석촉 등이 나오는 강상리 유형(2000년기 후반기)과 흑도·비파형동모·도끼·방울·거푸집 등 청동기의 사용 증거가 비교적 명확한 금야유형(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 등이 있다.

 이상의 남·북한 청동기시대에 관한 견해를 정리하면 대체로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청동기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자간의 연대차가 큰 이유로 다음의 요인들을 들 수 있다.

 첫째로 위에서 서술한 시대구분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어떤 학자는 청동기만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토기만으로 하나의 유물을 중심으로 편년을 할 뿐 두 가지 이상의 문화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 비파형동검=청동기의 상한으로 보는 견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남한의 편년에서는 비파형동검=청동기의 출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금탄리의 팽이토기 주거지에서 발견된 청동칼이나 신암리에서 발견된 청동촉·청동단추 등 많지는 않지만 동검이 아닌 소형 청동기가 발견되는 유적이 있다. 실제로 비파형동검은 매우 발달된 청동기로 청동기시대 시작부터 이렇게 갑자기 발달된 청동기술을 사용한 도구가 출현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0047) 이러한 소형 청동기가 나오는 유적을 하나의 시기로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연대 차이가 많이 날 것이다.

 둘째로 유용한 절대연대가 많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에 대한 탄소연대측정치는 그리 많지 않으며 또 그 연대에 완전한 상대편년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고고학계에서 전적으로 이들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방사선탄소연대와 같은 과학적 이용 방법 이외에 銘文이 있는 중국자료도 있으나 이것은 그 유적의 상한연대만을 말한다는 한계 이외에 후세에 교란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0048)

 셋째로 극단적인 전파론적인 시각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는 주위의 특정지역에서 왔다는 가정에서 그 문화를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상한연대로 잡고 그 지역과 멀고 가까움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시기를 분기한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어느 지역을 기원지로 잡느냐에 따라 학자간에 연대가 달라지며 그 지역과 우리 나라의 지리적인 거리에 대한 인식에 따라 분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기원형식이 무엇인가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외래형식이 우리 나라의 형식으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 바꾸어 말하면 교역 혹은 운반 등으로 유입된 것이 어떻게 각 지방의 실정에 맞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0049) 또한 그러한 청동기의 사용이 그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가 고고학적 유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지역적인 범위, 즉 한반도에 국한시킬 것인지, 아니면 요동 및 길림지역을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요서지방의 하가점 하층문화의 경우 청동기 출현 연대가 기원전 24세기 정도로 올라가서 중국에서도 가장 초기의 청동기시대에 속한다. 또한 요동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는 학자에 따라 기원전 13세기까지도 올려보며 청동기의 출현은 기원전 16∼15세기로 보기도 한다. 이들 지역을 우리 나라의 영역에 포함시킬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많은 견해 차이가 있게 된다.

 이상의 네 가지 견해차의 극복이 앞으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연구과제가 되겠다.

<崔夢龍>

0005)최근에 전남지방의 지석묘에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동검에 관해 본다면, 요동지방의 것을 기원전 12세기까지 올려보기 때문에 이들 동검의 연대도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남지방의 경우 대부분 2차 가공품이며 이 지역의 전반적인 편년을 고려해 볼 때 기원전 5세기 이상은 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0006)鳥居龍藏,<朝鮮の有史以前に於ける朝鮮と北鮮>(≪有史以前の日本≫, 磯部甲陽堂, 1918), 364쪽.
0007)藤田亮策,≪朝鮮考古學硏究≫(東京;高桐書院, 1948).
0008)三上次男,<朝鮮における有文土器の分布とその文化の擴かりについて>(≪朝鮮學報≫ 14, 1959).
0009)金貞培,<한국민족문화의 원류와 문제점>(≪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3).
0010)대표적인 비판으로 李鮮馥,<신석기·청동기시대 주민교체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韓國古代史論叢≫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1)를 들 수 있다.
0011)金載元·尹武炳,<三巨里遺蹟>(≪韓國支石墓硏究≫, 國立中央博物館, 1967), 65∼78쪽.
0012)崔夢龍 외,<소양강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八堂·昭陽댐水沒地區 遺蹟發掘綜合報告書≫, 文化財管理局, 1974).
0013)韓炳三,≪矢島貝塚≫(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8, 국립중앙박물관, 1970).
0014)笠原烏丸,<櫛目文土器を發見せる北朝鮮淸湖里遺蹟に就いて>(≪人類學雜誌≫51-5, 日本人類學會, 1936).
0015)尹武炳·韓永熙·鄭俊基,≪休岩里≫(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22, 1990).
0016)황기덕,<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사회관계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87-2 및 1987-4,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0017)박진욱,<고조선의 성립에 대하여>(≪조선 고대 및 중세 초기사 연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1970년대까지는 비파형동검의 편년을 소급해 보아 고조선 이전의 ‘소국’의 주민에 의해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으나(박진욱 외,≪비파형동검문화에 관한 연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7), 근래에는 ‘소국’단계를 석관묘 이전의 지석묘로 보고 비파형동검의 초기형태부터 고조선으로 진입했다고 본다.
0018)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조선전사≫2:고대편(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0019)권오영은 이러한 북한의 견해에 대해서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고 崗上墓와 樓上墓는 순장의 증거라기보다 계층화된 사회의 증거라고 보았다(권오영,<강상묘와 고조선사회>,≪考古歷史學志≫9, 東亞大, 1993).
0020)한창균,<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國史館論叢≫33, 國史編纂委員會, 1992).
0021)최몽룡,<전남 지방 지석묘사회의 계급과 발생>(≪韓國史硏究≫35, 1981).

―――,≪A Study of the Yŏngsan River Valley Culture≫(동성사, 1984).

崔寧龍·崔盛洛 編著,≪韓國古代國家形成論≫(서울大 出版部, 1997).
0022)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 (奈良;養德社, 1947).
0023)金元龍,<十二台營子의 靑銅短劒墓-韓國 靑銅器文化의 起源問題->(≪歷史學報≫16, 1961).
0024)金元龍,<한국문화의 고고학적 연구>(≪韓國文化史大系≫I,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6).
0025)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一志社, 1973), 68쪽.
0026)金貞培,<韓國 靑銅器文化의 史的考察>(≪韓國史硏究≫6, 1971).
0027)尹武炳,<韓國 靑銅遺物의 硏究>(≪白山學報≫12, 1972).

―――,<無文土器 型式分類 試攷>(≪震檀學報≫39, 1975).
0028)金永培·安承周,<扶餘 松竹里 遼寧式銅劍出土 石棺墓>(≪百濟硏究≫7·8, 公州師大, 1975).
0029)金廷鶴,<韓國 靑銅器文化의 編年>(≪韓國考古學報≫5, 韓國考古學硏究會, 1978).
0030)全榮來,<韓國 靑銅器文化의 系譜와 編年>(≪全北遺蹟調査報告≫7, 全州市立博物館, 1977).

―――,<韓國 靑銅器文化의 年代上限問題>(≪全北遺蹟調査報告≫8, 1978).
0031)李亨求,<渤海沿岸 石墓文化의 源流>(≪韓國學報≫50, 一志社, 1988), 314쪽.
0032)秋山進午,<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文化の樣相>(上·中·下)(≪考古學雜誌≫53-4·54-1·54-4, 東京;考古學會, 1968∼1969).
0033)岡內三眞,<朝鮮における銅劍の始原と終焉>(≪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集≫, 平凡社, 1982).
0034)西谷正,<朝鮮考古學の時代區分について>(≪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集≫).
0035)이청규,<遼寧地方 청동기 연구의 몇가지 문제>(≪博物館紀要≫7, 檀國大, 1991), 51쪽.
0036)韓永熙,<角形土器考>(≪韓國考古學報≫14·15, 1983).
0037)李淸圭,<南韓地方 無文土器文化의 展開와 孔列土器文化의 位置>(≪韓國上古史學報≫1, 韓國上古史學會, 1987).
0038)盧爀眞,<時代區分에 관한 一見解>(≪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叢≫Ⅰ, 一志社, 1987).

―――,<韓國 先史文化 形成過程의 時代區分>(≪韓國上古史學報≫15, 1994).
0039)崔盛洛,<放射性炭素測定年代 問題의 檢討>(≪韓國考古學報≫13, 1982).
0040)대표적인 견해로 이여성은≪조선미술사개요≫(1954)에서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5세기라고 주장했으나 그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청동기시대를 삼국시대로 보거나, 적어도 서북지방에는 청동기시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0041)도유호,<조선 거석 문화 연구>(≪문화유산≫1959-2,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0042)김용간·황기덕,<기원전 천년기전반의 고조선 문화>(≪고고민속≫1967-2, 사회과학원출판사).
0043)장호수,<북한고고학의 시기구분론>(≪白山學報≫40, 1992).
0044)김용간·황기덕,<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고고민속≫1967-4).
0045)이하의 편년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청동기시대>(≪조선고고학개요≫,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7) 및 황기덕,≪조선의 청동기시대≫(사회과학출판사, 1984)를 주로 참조하였다.
0046)황기덕,<무덤을 통하여 본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사회 관계>(≪고고민속≫1965-4).
0047)비파형동검 이전의 청동기 시기를 설정한 대표적 예로 박순발의 견해를 들 수 있다. 그는 요동지방과 한반도 일대에 ‘선동검기’라는 단계를 설정하고 조그만 청동기가 나오거나 청동기가 나오지 않는 무문토기시대를 청동기시대에 포함하였다(박순발,<한강유역의 청동기·초기철기문화>,≪한강유역사≫, 民音社, 1993).
0048)실제로 秋山進午가 비파형동검의 연대 추정에 중요한 절대연대의 근거로 제시한 明刀錢의 출토에 대해 북한학자들이나 이형구는 후세에 혼입된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李亨求,<旅順後牧城驛樓上 第3號墓出土渤海沿岸式 靑銅短劍 年代檢證>,≪韓國上古史學報≫10, 1992).
0049)이청규, 앞의 글(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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