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Ⅰ. 청동기문화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1)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청동기시대의 개념
            • (2)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2) 인골 및 편년
          • 3) 청동유물의 분포와 사회
            • (1) 각 청동유물의 형식과 그 분포
            • (2) 청동유물의 지역적 특성
            • (3)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 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 (3) 영동·영서지방의 유적
            • (4) 영남지방의 유적
          • 2) 청동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무덤
          • 3) 청동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2) 석기
            • (3) 청동기
            • (4) 뼈연모
          • 4) 야금술의 발달과 청동유물의 특징
            • (1) 청동기의 제작 기술
            • (2) 청동유물의 성분분석
          • 5) 토기의 과학적 분석
        • 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1)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 2) 중국
            • (1) 청동거울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2) 청동유물의 동물문양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청동기의 성분분석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일본
            • (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 (2) 한·일 청동기문화의 교류관계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철기시대의 개념
            • (2)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3) 문헌자료와 철기시대
          • 2) 철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주요 철기유적
          • 3) 철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패총
            • (3) 무덤
            • (4) 방어시설
          • 4) 철기시대의 유물
            • (1) 철기 생산기술
            • (2) 철기유물
            • (3) 토기
            • (4) 토기의 과학적 분석
            • (5) 유리공예
        • 2.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3. 주변지역 철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1) 여명기(은·서주시대)
            • (2) 초보적 형성기(춘추∼전국 조기)
            • (3) 형성·보급기(전국 중∼만기)
            • (4) 발전기(전한 이후)
          • 2) 일본
            • (1)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별 추이
            • (2) 한·일 초기 철기문화의 교류관계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세형동검 유적

① 양평 상자포리유적0127)(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417번지)

 1972년 9월 상자포리 남한강의 퇴적층에 있는 고인돌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동검 1점과 방추차·식옥 각 1점이 발견되었다. 표토층을 제거하자 3개의 커다란 돌이 ㄷ자형으로 놓여 있었는데 그 내부의 할석을 들어내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개석으로 생각되는 돌이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그 주변에서 식옥 1점과 점판암제의 紡錘車 1점(지름 6.2∼6.4㎝, 두께 1.0㎝)도 수습하였다. 원래는 고인돌 아래에 부장되었던 것인데 고인돌이 교란되면서 주변에 흩어진 듯하다.

 1호 고인돌의 적석 위에서 발견된 동검은 녹이 짙게 덮여 있었고 동질은 백동질이 아닌 황동색이다. 봉부의 길이는 1.5㎝이고 등대에 세운 稜角이 결입부 이하에 미치지 않고 있으며 검신의 하반부가 호선을 그리며 기부에 연결되고 있다(길이 22.5㎝).

 천하석제 식옥은 반원형에 가까우며 구멍이 한쪽에 뚫려 있고 가운데가 배가 부른 단면을 가지고 있다(길이 2.1㎝, 너비 1.3㎝, 두께 0.5㎝).

② 청원 비하리유적0128)(충북 청원군 강서면 비하리 산 51번지)

 1974년 1월에 매장문화재로 국고에 귀속된 일괄유물이다. 자세한 출토지점이나 상황을 알 수 없다. 백동질의 세형동검 1점(길이 19.2㎝), 黑陶長頸壺 1점(높이 26.8㎝), 粘土帶土器 1점(높이 10.1㎝), 토제 방추차 1점(지름 3.8㎝)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③ 부여 연화리유적0129)(충남 부여군 초촌면 연화리)

 1963년 봄에 사방공사를 하다가 발견하였다. 인부들이 유구를 파괴하였으나 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시 조사하여 석실의 일부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연화리 뒤에 있는 해발 41m의 구릉에서 동쪽으로 연장되는 능선 위에 있었다. 사방공사 당시 지표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석관묘였던 듯하다.

 복원한 유구의 크기는 길이 140㎝, 폭 50㎝, 깊이 55㎝였다. 바닥에는 얇은 판석조각을 깔았으나 벽은 두께 10㎝ 정도 되는 할석을 이용하여 한겹으로 이어붙인 것처럼 쌓아 올렸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석실 위에 구들장만한 판석 5∼6장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현 지표면에서 석실 바닥까지의 깊이는 약 80∼100㎝이다. 석실의 방향은 북북서-남남동이며 인부들이 발견하여 신고한 유물은 세형동검 4점(각 길이 31.0·268·24.2·20.4㎝), 조문경 1개체분(복원지름 12.8㎝)이었고 수습조사 때 식옥 1점(길이 4.2㎝)을 수습하였다. 정확한 유구에서 청동검이 출토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그림 7>).

<그림 7>부여 연화리유적 출토유물

④ 부여 구봉리유적0130)(충남 부여군 구룡면 구봉리)

 1985년 구봉리 공동묘지에서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매장이 끝나고 봉분을 만들고 있는 중이어서 유적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유적은 표고 25m 정도의 언덕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광은 풍화암반을 파고들어가 만들었다. 발견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표면의 부식토 50㎝ 정도 아래에 석비례층이 나왔고 남북 180㎝, 동서 100㎝ 정도의 묘광에 지름 25∼30㎝ 가량의 자연석으로 구축된 석축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설의 깊이는 약 50㎝ 정도이고 남벽에는 1매의 점판암판석이 세워져 있었으며 유물은 남벽에 이어져 남쪽 바닥에 깔려있는 1매의 점판암 판석위에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돌뚜껑이나 특별한 바닥 시설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동검은 11점으로 일괄출토의 예로 최대를 기록하며 그 중 등대의 마연부가 첫째마디까지 나 있는 것이 7개, 基部까지 나 있는 것이 4개이다(19.2∼34.0㎝).

 그 외에 동과 2점(각 길이 26.8㎝, 25.4㎝), 도끼 2점(각 길이 11.9㎝, 110㎝), 거울 2점(각 지름 13㎝, 10.8㎝), 끌 1점(길이 10.0㎝), 조각도 1점, 숫돌, 돌도끼, 흑도장경호, 납작한 호가 각각 1점씩 나왔다.

⑤ 부여 합송리유적0131)(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1구 산 4번지)

 1989년 4월 밭에서 포클레인으로 땅을 고르던 중 지표 아래 1.5m에서 청동기가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곳은 반산저수지 남서편에 해당하며 표고 25m의 얕은 야산의 정상에 가까운 북쪽 경사면에 해당한다.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일괄유물 이외에 수습조사에서 동과 1점, 철제끌(鐵鑿) 1점, 유리관옥 7점, 토기편 등을 흙더미 속에서 수습하였다.

 유구는 이미 파괴되어 흔적을 알 수 없었으며 다만 유구를 구성하였던 할석들을 몇 점 확인하였다. 발견자의 증언에 의하면 유물은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고 하며 구덩이는 장축이 남북방향이었고 구덩이의 흙은 생토와는 다른 회흑색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유적은 단독분묘이고 할석으로 벽체를 쌓은 적석석관묘 계통이거나 또는 묘광과 목관사이의 공간에 할석을 돌린 圍石木棺墓가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신고된 유물은 동탁 2점(각 길이 13.1㎝, 14.4㎝), 동검 2점(각 길이 29.7㎝, 33.7㎝), 圓蓋形銅器 1점(지름 22.2㎝), 세문경 편 1점(복원 지름 26.8㎝), 이형동기 1점(길이 9.5㎝), 철제도끼 2점(각 길이 16.4㎝, 17.0㎝), 유리관옥 7점(5.0∼6.1㎝), 흑색토기 바닥편 1점이고, 수습된 유물은 동과 1점(길이 27.9㎝), 철제끌 1점(길이 16.7㎝), 유리관옥 7점, 토기편들이다(<그림 8>).

<그림 8>부여 합송리유적 출토유물

⑥ 연기 봉안리유적0132)(충남 연기군 장기면 봉안리 안기마을)

 봉안리 안기마을 뒷산에서 무덤을 만들다가 동검(길이 33.1㎝)과 동과 각 1점(길이 26.2㎝)을 수습함으로써 본격적인 조사를 하게 되었다. 해발 30m 정도의 산 정상 가까이 남향한 사면 지하 약 1m 지점에서 부식토가 나오는 윤곽을 따라 유물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토광묘계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⑦ 대전 괴정동유적0133)(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

 1967년 현재의 한국통신 뒷산 과수원에서 발견된 석관묘유적이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쟁기에 걸린 돌을 들어 내던 중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당시로서는 해방후 최대의 일괄 청동기로 기록될 만하였다. 유적은 농부에 의해 파괴되어 유물의 출토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농부가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재조사 과정에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유적은 남북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었는데 남북 길이 3.3m, 동서 폭 2.8m 가량의 풍화암반을 파내려가서 길이 2.2m, 폭 0.5m, 깊이 1.0m 크기의 석관구조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았으며 뚜껑은 돌로 덮지 않았으므로 내부에는 위에서 내려앉은 돌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서 얇은 나무조각의 썩은 흔적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석실 내부에 간단한 목관 흔적이 있었던 듯하다. 이와 같은 석관 위의 빈 공간에는 지표까지 돌로 채웠으며 지상에는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그림 9-①>).

<그림 9-①>대전 괴정동유적 석관묘

 무덤의 북쪽 끝에서 토기 2점이 발견되었으며 그 남쪽에 劍把形銅器와 防牌形銅器 및 銅鐸, 그리고 거울과 원개형동기 등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남쪽 부분에서는 天河石으로 만든 장식옥과 작은 옥들이 흩어져 있었고, 중간 허리부분에서는 동검 1점과 마제석촉이 나왔다. 동검은 자루쪽이 남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장식옥은 1쌍으로 나와 귀거리장식으로 보고 있다. 이들 유물의 위치로 보아 주인공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묻은 듯하였다.

 이 괴정동유적은 세형동검이 나오는 유적으로는 가장 빠른 것이며, 원개형청동기나 흑도장경호는 한국의 청동기문화가 요령지방의 문화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검파형동기는 충청남도 지방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유물로, 섬세한 기하학적인 무늬는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에 달한 청동기 주조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더욱이 충청도 지방이 평양·영암·경주 지방과 더불어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유물은 세형동검 1점(길이 32.4㎝), 거울 2점(각 지름 8.0㎝, 11.3㎝), 검파형동기 3점(각 길이 23.0㎝ 내외), 방패형동기 1점(길이 16.0㎝), 원개형청동기 1점(지름 20.6㎝), 동탁 2점(각 길이 11.2㎝, 11.4㎝), 마제석촉 3점(길이 6.8∼7.4㎝), 천하석제 장식옥(길이 3.4㎝), 흑도장경호 1점(높이 22.0㎝), 점토대토기 1점(높이 17.0㎝) 등이었다(<그림 9-②>).

<그림 9-②>대전 괴정동유적 출토유물

⑧ 대전 탄방동유적0134)(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191번지)

 현재의 世燈禪院 부지이다. 1972년 이 곳에서 작업하던 마을 사람에 의해 유물이 발견되어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신고되었다.

 발견자에 따르면 남북 2.5m, 동서 0.6m, 깊이 3.5m쯤 되는 구덩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유구는 알 수 없다. 증언을 참고로 하면 괴정동의 경우와 같이 무덤은 남북방향이었던 듯하고 석관묘 유적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유물은 세형동검(길이 32.5㎝)과 청동창(길이 19.9㎝), 끌(길이 7.4㎝)이 각각 1점씩이다.

⑨ 대전 문화동유적0135)(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 까치고개)

 1970년 까치고개 산꼭대기에서 토지를 개간하던 중 마을 사람에 의해 동검 1점이 발견되었다. 지하 30㎝ 정도의 깊이에서 땅에 꽂힌 채 발견되었다고 할 뿐 자세한 유구나 출토상황을 알 수 없다. 주변에서는 약간의 민무늬토기 파편이 흩어져 있었는데 석관묘 유적이 아닌가 추측된다.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청동검은 鋒部가 길고 예리하지만 날 부분의 돌기부가 하나라든지 하반신이 둥글게 내려오면서 등대와 만나는 점 등은 요령식동검이 퇴화한 것처럼 보인다. 등대의 마연부분은 첫째마디까지만 발달해 있는 고식동검이다(길이 24.2㎝).

⑩ 아산 남성리유적0136)(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성리)

 1976년 표고 30∼40m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과수원에서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이 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재발굴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일종의 석관묘인데 화강암의 풍화암반에 깊은 묘광을 팠으며 바닥까지의 깊이는 약 2m에 달하고 있다.

 묘광의 크기는 현 지표면에서 동서 장경 3.1m, 남북 단경이 1.8m의 부정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나 하반부에서 면적이 좁아졌으며 동서길이 약 2.8m, 남북너비 80∼90㎝이다.

 주체부인 석관은 이미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잔존한 벽석들을 조사한 결과 내부의 규모는 길이 235㎝, 너비는 50∼70㎝, 높이는 1m로 추정하고 있다. 네 벽에는 두께 약 10㎝ 정도의 할석을 한 겹으로 쌓아올렸고 바닥에는 판돌을 깔았다. 바닥돌 위에는 회청색의 고운 점토가 1㎝ 가량이 되는 두께로 전면에 깔려 있었다. 뚜껑돌은 없고 그 대신 나무뚜껑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묘광의 상반부에는 많은 石塊(40㎝ 내외)들이 채워져 있었다. 대전 괴정동유적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이 곳에서는 바닥돌이 깔려 있었고 침향은 유물의 출토상태로 미루어 보아 東枕이었다고 판단되고 있다(<그림 10-①>).

<그림 10-①>아산 남성리유적 석관묘

 발굴된 유물은 동검 9점(완형 길이 20∼31.5㎝), 검파형동기 3점(각 길이 24.8㎝, 25.0㎝, 25.4㎝), 방패형동기 1점(길이 17.6㎝), 동착 1점(길이 6.5㎝), 동부 1점(길이 4.5㎝), 천하석제식옥 1점(길이 4.1㎝), 동경 2점(각 지름 18.1, 19.6㎝), 흑도장경호 1개체분(추정 높이 21.0㎝), 점토대토기 파면, 소형의 관옥 103점 등이다(<그림 10-②>).

<그림 10-②>아산 남성리유적 출토유물

⑪ 아산 궁평리유적0137)(충남 아산군 선장면 궁평리 산 11-1)

 1982년 무덤을 이장하다 유물이 발견되어 신고되었다. 그러나 신고자가 발견된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여 조사는 불가능하였다. 이 일대에는 해발 30m 미만의 얕은 구릉들이 펼쳐져 있고 작은 강들이 사이를 지나고 있어 좋은 입지를 갖고 있다. 신고된 유물은 동검 1점(길이 31.0㎝), 동과 1점(길이 26.5㎝), 도끼 1점(길이 4.3㎝), 세문경 파편 1점(지름 10.0㎝) 등이 있다.

⑫ 당진 소소리유적0138)(충남 당진군 합덕면 소소리 전 64-27)

 1990년 3월에 신고된 매장문화재이다. 밭을 갈다가 지하에서 청동기 일괄유물을 수습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후에 신고하였는데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이 주변에는 동서리·휴암리·궁평리 등 청동기 내지 철기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이다.

 수습 신고된 일괄유물은 15건 19점으로, 철기시대의 유물이 10건 13점이고 고려시대 유물이 5건 6점이다. 철기시대 유물은 동검 1점(길이 32.7㎝), 劍把頭飾 1점(길이 3.6㎝), 細文鏡 2점(각 복원 지름 16.8㎝, 9.5㎝), 동과 1점(길이27.5㎝), 鐵斧 1점(길이 15.3㎝), 鐵鑿 2점(각 길이 10.2㎝, 16.0㎝), 유리관옥 2점(길이 5.6∼5.8㎝), 석촉 1점(길이 2.5㎝), 숫돌 1점(길이 11.9㎝), 흑색토기 1점이며 고려시대 유물은 花形銅鏡 1점, 方形銅鏡 1점, 靑銅盒 1점, 숫가락 2점, 토기 1점 등이다.

⑬ 예산 동서리유적0139)(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청동기 출토 유적으로서는 예외적으로 표고가 150m나 되는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1978년 사방공사에 필요한 석재를 채집하기 위하여 출토지점에 쌓인 돌무더기를 들어내자 그 밑에서 고운 흙이 나오고 이 흙을 30㎝ 가량 파내려갔을 때 다시 그 밑에서 장방형의 석관이 나왔으며 그 내부에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풍화된 화강암반에 만들어진 묘광은 장축이 동서를 향하고 있었으며 길이 180㎝, 폭 90㎝인데 재조사 당시 남아 있던 광벽의 높이는 20㎝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높이는 60㎝ 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길이 30∼40㎝, 두께 5∼8㎝ 되는 표면이 고른 할판석으로 구축된 석관 위에는 나무뚜껑 시설이 갖추어졌던 것 같고 바닥과 광벽에는 회백색 흙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유물의 출토상황은 잘 알 수 없지만 동검떼가 동쪽에서 나왔고 다시 조사할 때 서쪽에 버려진 흙 속에서 玉類가 수습된 것으로 미루어 침향이 서향이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출토 지점의 둘레는 주위의 경사면과는 달리 낮은 墳丘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발견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분구형의 정상 부근에 크기 20∼30㎝의 할석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으며 이 적석의 범위는 바닥 지름 2m, 높이 60㎝ 가량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온 유물은 동검 8점(길이 25.1∼36.8㎝), 거울 5점(각 복원길이 7.0·8.1·9.4·9.5·13.6㎝), 원개형동기 1점(지름 20.5㎝), 나팔형동기(높이 25.9㎝), 검파형동기 3점(길이 11.0∼11.6㎝), 마제석촉 7점, 흑도장경호 1점(높이 25.5㎝)(이상<그림 11>) 점토대토기 1개체분, 관옥 104점(길이 0.9∼3.0㎝), 작은옥 22점(길이 0.25∼0.3㎝) 등이다.

<그림 11>예산 동서리유적 출토유물

⑭ 익산 다송리유적0140)(전북 익산군 함열면 다송리)

 1975년 일명 말무덤이라 불리는 언덕의 남쪽 경사면 지하 1지점에서 양돈장 공사를 하던 민간인에 의해 장축이 동서방향인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뚜껑돌 위에서도 돌들이 쌓여 있었다고 하는데 석관의 크기는 약 1.8m 정도로 추산된다. 이 곳에서 발굴된 청동 일괄유물은 粗文鏡 1점(지름 10.7㎝)과, 銅泡 2점(지름 9.0㎝), 圓形裝飾具편 1점(복원지름 8.4㎝), 王類 11점, 약간의 토기편 등이었다.

⑮ 익산 평장리유적0141)(전북 익산군 왕궁면 평장리 관동마을)

 1987년 9월 주민의 신고로 조사되었다. 관동마을 남쪽의 서향한 언덕 위에서 유물이 노출되어 수습하였는데 토광의 깊이는 지표에서 10㎝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보고서에 돌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석관유구가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는지 아니면 토광이었는지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다. 세형동검 2점(각 길이 29.4㎝, 29.9㎝) 동모(길이 21.6㎝)와 동과 1점(길이 15.0㎝), 前漢鏡(복원지름 13.4㎝)의 파편이 몇 점 수습되었다.

(16) 전주 여의동유적0142)(전북 전주시 여의동)

1985년 4월 여의동 용정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에서 석개토광묘 1기가 발견되었다. 마을 주민이 나무를 심기 위하여 구덩이를 파던 중 지하 0.7m 되는 곳에서 뚜껑을 발견하면서 유물을 수습하였다.

 토광은 장축이 동서 방향이었고 짧은 벽에 돌을 깔고 그 위에 개석을 덮었는데 토광의 길이는 1.0m, 폭 0.35m, 깊이 0.3m에 지나지 않는다. 조문경 2점(각 지름 13.2㎝, 15.3㎝)과 끌 1점(길이 5.8㎝), 도끼 2점(길이 5.8㎝)이 수습되었다(<그림 12>).

<그림 12>전주 여의동유적 토광묘와 출토유물

(17) 장수 남양리유적0143)(전북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 전 171번지)

 1989년에 신고된 매장문화재로, 발견지점은 해발 360m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긴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다. 발견자가 파헤친 많은 양의 돌들로 보아 석관묘로 추정되고 있다.

 신고된 유물은 동검 1점(길이 35.2㎝), 동모 1점(길이 15.1㎝), 세문경 1점(지름 10.5㎝), 철부 1점(길이 12.3㎝), 철착 1점(길이 17.5㎝), 석촉 2점(각 길이 3.4㎝, 4.2㎝), 석도 1점(길이 18.0㎝)과 토기 파편이 나왔으며 수습조사 때 검파두식 1점을 수습하였다.

(18) 완주 상림리유적0144)(전북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 3구)

 1975년 12월 초 주민이 묘목을 캐다가 동검 26점을 발견하여 신고하였다. 발견된 유적의 상황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며 지표하 약 60㎝ 정도 되는 지점에서 봉부가 동쪽을 향하여 가지런히 수평으로 놓여있는 것만 확인하였을 뿐이다.

 동검 26점 모두 크기와 무게가 다르며 붉은색이 도는 황동질이다. 주조했을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부분적으로 일부분이 탈락한 것도 있다. 자루와 검신 모두가 한꺼번에 주조되었는데 검신의 단면은 각변이 오목한 扁菱形이며 여기에 좁은 날부분을 갈아 만들었다. 칼코 부분은 역V자형이며 자루부분에는 2개의 환상돌기가 있고 자루 끝에는 삿갓형 꼭지가 붙어 있다. 자루의 단면은 타원형이다(길이 44.4∼47.2㎝;<그림 13>).

<그림 13>완주 상림리유적 출토 도씨검

(19) 화순 대곡리유적0145)(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1971년 영산강의 상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기슭의 낮은 언덕 위에서 발견되었으며, 민가를 둘러싼 담 밖에서 도랑을 파다가 유물들을 수습하였다. 분묘의 구조는 풍화된 암반에 이중으로 된 장방형의 묘광으로서 외곽 부분을 동서 길이 330㎝, 남북 너비 180㎝이며 중심부분은 길이 210㎝, 너비 80㎝, 깊이 60㎝로 한층 깊게 팠다. 바닥에 이르러 동쪽 부분에서 길이 90㎝, 너비 45㎝의 두꺼운 나무토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위 벽면에서부터 바닥에 걸쳐서는 강바닥에서 채굴해온 진흙을 10㎝ 내외의 두께로 발랐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무덤은 본래 그 내부에 목관과 같은 시설물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그림 14-①>).

<그림 14-①>화순 대곡리유적 석관묘

 출토된 유물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낙동강 상류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4개의 이형동기들이며 그 외에 동검, 동경들이 함께 출토된 사실이 학술적으로 더욱 귀중하다고 할 수 있다.

 출토유물로는 동검 3점(각 길이 24.7㎝, 29.5㎝, 32.8㎝), 동경 2점(각 지름 14.6㎝, 17.8㎝), 八珠鈴 1쌍(길이 14.6㎝), 雙頭鈴 1점(길이 17.8㎝), 동사 1점(길이 11.8㎝), 동부 1점(길이 7.8㎝) 등이 있다(<그림 14-②>).

<그림 14-②>화순 대곡리유적 출토유물

(20) 함평 초포리유적0146)(전남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사촌마을 산 383-4)

 1987년 사촌마을 주민들이 마을 도로를 만들기 위해 흙을 채취하던 중 돌덩이를 들어내다가 유물들을 발견, 매장문화재로 신고하였다. 당시 발견된 유물은 동검 1점과 청동기 14점, 숫돌 2점, 철칼 1점(유적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짐)이었다. 그 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긴급히 조사하였다.

 유적이 발견된 일대는 해발 20∼30m 가량의 평지성 구릉지대로 동쪽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영산강의 지류인 海保川과 羅山川이 합류하여 흘러가고 있다. 세립질인 斑岩과 화강암지대로 석비레층들이 풍화하여 비옥한 농토를 형성하고 있다. 유적은 토광을 파고 북동-동서 방향을 장축으로 하고 있는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차츰 좁아지게 팠다. 지표면의 평면은 장축이 260㎝, 단축이 90㎝ 정도의 부정형 장방형인데 무덤의 주체부는 현재 지표하 55㎝ 정도에 두었다. 내부바닥의 크기는 길이 190㎝ 정도, 폭이 55㎝로 남서쪽이 넓은 頭寬足狹의 형태이다. 이 곳에서는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할석들이 100여 개 이상이나 나왔는데 구조를 추정해 보면 할석으로 묘광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은 적석 석관묘였거나, 목관묘 주위 토광과의 사이에 할석을 채워넣고 적석한 적석목관묘일 듯하나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충청도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청동기를 반출하는 석관묘계통 유적의 지역적 특성을 띠고 있는 한 예이다(<그림 15-①>).

<그림 15-①>함평 초포리유적 석관묘

 조사 때 출토한 유물은 위치로 보아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묘광의 내부 바닥에서는 천하석제 식옥 1쌍, 검파두식을 갖춘 동검 2자루 및 거울 3점이 출토되었는데 식옥은 남서 단벽 가까이에서 나왔고 동검과 거울은 동남의 장벽에서 1렬을 지은 채 발견되었다. 또 할석과 묘광벽 틈 사이에서 나온 것으로는 柄附銅劍과 쌍두령이 나왔고 유물은 없었으나 둥근방울 흔적이 한두 군데에서 보였다. 이들은 피장자 머리의 좌우에 해당하는 곳이다. 내부 퇴적토에서도 동검 1점이 봉부가 위쪽으로 향한 채 발견되었다. 출토상태로 보아 매장이 끝난 후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는, 흥미있는 유물이다. 이 외에 이미 신고된 것도 주민들이 돌덩이를 제치면서 뽑아냈다고 하므로 이를 참조로 하면 관과 묘광 사이의 적석, 또는 관 상부의 적석에서도 유물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토품은 모두 26점으로 검파두식을 완비한 2점의 동검(각 31.3㎝, 32.7㎝) 외에 별도로 동검 2점(각 길이 25.8㎝, 28.5㎝), 중국 桃氏劍 1점(길이 35.0㎝), 동과 3점(각 길이 20.5㎝, 26.0㎝, 27.5㎝)(이상<그림 15-②>), 동모 2점(각 길이 26.1㎝, 27.9㎝), 동부 1점(길이 9.7㎝), 동사 1점(길이 7.6㎝), 동착 2점(각 길이 5.3㎝, 10.0㎝), 竿頭鈴 2점(길이 14.5㎝), 조합식 쌍두령 1점(길이 15.0㎝), 쌍두령 1점(복원 길이 15.9㎝), 병부동령 1점(길이 17.0㎝), 동경 3점(각 지름 9.7㎝, 15.6㎝, 17.8㎝), 식옥 2점(길이 3.8㎝), 숫돌 2점(각 길이 7.9㎝, 20.6㎝) 등이다.

<그림 15-②>함평 초포리유적 출토 동검·동과

(21) 소록도유적0147)(전남 고흥군 금산면 소록도)

 1934년 소록도 남동부 해안 언덕의 갱생원 부지 신축공사를 하던 중 지하 약 1.5m 정도의 깊이에서 발견되었다. 유구는 특별히 눈에 띄는 구조가 없으나 토광 안에서 높이 30㎝ 정도의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석촉과 돌도끼가 들어 있었고 조문경을 뚜껑으로 덮었다. 토기는 현장에서 부스러져 수습하지 못하였다.

 이 곳에서 나온 유물은 거울편 2점(복원 지름 14.4㎝), 석촉 6점(길이 4.7∼6.4㎝), 돌도끼 1점(길이 10.4㎝) 등이 있다.

0127)秦弘燮·崔淑卿,<楊平郡 上紫浦里 支石墓 發掘報告>(≪八堂·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綜合調査報告≫, 文化財管理局, 1974).
0128)韓國考古學會,<淸原 飛下里出土 一括遺物>(≪考古學≫3, 1974), 150∼152쪽.
0129)金載元·尹武炳,<扶餘·慶州·燕岐出土 銅製遺物>(≪震檀學報≫26·27, 1964).
0130)李康承,<扶餘 九鳳里出土 靑銅器一括遺物>(≪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一志社, 1987).
0131)李健茂,<扶餘 合松里遺蹟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2,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0).
0132)安承周,<公州 鳳安出土 銅劍·銅戈>(≪考古美術≫136·137, 韓國美術史學會, 1978).
0133)李殷昌,<大田槐亭洞 靑銅器文化의 硏究>(≪亞細亞硏究≫11-2, 高麗大, 1968).

國立中央博物館,≪靑銅遺物圖錄≫(國立博物館 學術資料集 1, 1968).
0134)成周鐸,<大田地方出土 靑銅遺物>(≪百濟硏究≫5, 忠南大, 1974).
0135)成周鐸, 위의 글.
0136)韓炳三·李健茂,≪南城里石棺墓≫(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0, 국립중앙박물관, 1977).
0137)李健茂,<牙山 宮平里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1, 1989).
0138)李健茂,<唐津 素素里遺蹟 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3, 1991).
0139)池建吉,<禮山 東西里 石棺墓出土 靑銅一括遺物>(≪百濟硏究≫9, 1978).
0140)全榮來,<益山 多松里 靑銅遺物出土墓>(≪全北遺蹟調査報告≫5, 全州市立博物館, 1975).
0141)全榮來,<錦江 流域 靑銅器文化圈 新資料>(≪馬韓百濟文化≫10, 圓光大, 1987).
0142)全榮來, 위의 글.
0143)池健吉,<長水 南陽里 出土 靑銅器·鐵器 一括遺物>(≪考古學誌≫2, 1990).
0144)全榮來,<完州 上林里出土 中國式銅劍에 關하여>(≪全北遺蹟調査報告≫6, 全州市立博物館, 1976).
0145)趙由典,<全南和順 靑銅遺物一括出土遺蹟>(≪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通川文化社, 1984).
0146)李健茂·徐聲勳,≪咸平 草浦里 遺蹟≫(國立光州博物館·全羅南道·咸平郡, 1988).
0147)榧本龜生,<南鮮小鹿島發見の多鈕細文鏡其他>(≪考古學≫6-4, 日本考古學會,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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