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유적의 분포
가) 세죽리유적0154)
평북 영변군 세죽리에서 동남 방향으로 약 10㎞ 떨어진 청천강 연안 일대 400∼500m의 폭을 갖는 하안 충적층에 위치한다. 이 곳 細竹里遺蹟에서는 모두 27기의 집터가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집터는 7기였다. 이들 가운데 18호 집터는 원형, 10호 집터는 타원형, 16·27호 집터는 방형, 11·13호 집터는 장방형이었으나 28호 집터는 크게 파괴되었다. 집의 모습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화덕은 3면에 돌을 돌린 형식이고, 11·13·16·18호 집터는 바닥에 기둥구멍이 없는 형식이었다.
나) 서포항유적0155)
함북 웅기군 서포항 동마을 동북쪽 산기슭의 수 만㎡에 걸쳐 있는 이 西浦項遺蹟은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유적이 중첩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문화층은 신석기시대 문화층 위에 상·하 두 층의 문화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층에서 발견된 집터는 5기이며 이 가운데 그 모습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5·6호 집터였다. 이들은 장축을 남북으로 한 장방형으로 길이 4.8m, 폭 3.6m로서 깊이는 현재 남은 것이 0.5m 정도이다. 집터 바닥은 흙과 패각을 섞어서 다지고 불을 피워 굳히고 그 위에 다시 진흙을 5㎝ 정도 깔았다. 화덕은 한쪽으로 치우쳐 바닥을 파고 주위에 돌을 돌렸으나 다른 집터에서 화덕 바닥에 돌을 깐 것, 돌을 돌리지 않는 것 등이 있다. 기둥구멍은 모든 집터에 있었으나 무질서하게 남아 그 배치를 알 수 없다.
상층에서는 4기의 집터가 나타났으나 모두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한 변이 3.6∼5m 정도였다. 집 바닥은 패각을 섞은 흙으로 다졌고, 화덕은 원형이며 대부분이 바닥에 돌을 깔았다. 기둥구멍은 집터마다 달랐으나 그 수가 적었고 가장 작은 집터(24호)는 유독 40여 개로 많이 발견되었다.
다) 호곡동유적0156)
함북 무산군 두만강 상류 城川 양쪽 언덕의 절벽 위 대지에 위치한 이 虎谷洞遺蹟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따라서 5차에 걸쳐 1,200㎡를 조사하였으나 그것은 이 유적 전체의 4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발견된 집터는 43기이고 다른 공사에 의해 나타난 집터를 합하면 50기가 넘었다. 이들 집터는 시기적으로 선후관계가 있고 서로 중복되어 남았기 때문에 집터 모습을 제대로 남긴 것은 많지 않다. 제대로 남은 집터 가운데 시기가 빠른 것이 4기, 늦은 것이 12기였다.
시기가 빠른 것은 모두 평면이 장방형으로 1기(40호)를 빼고 모두 장축을 남북으로 잡았으며, 큰 것은 47㎡, 작은 것은 19㎡ 정도였고, 다른 1기(20호)를 빼고는 모두 4열의 기둥구멍이 있었다. 늦은 시기의 것은 기둥구멍이 매우 적어 일부 기둥을 바닥에 직접 세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4·19호)과 기둥구멍과 초석을 4열로 배치한 것(30·31호;<그림 1>), 그리고 초석을 주로 사용한 것 등이 있었다.
라) 석탄리유적0157)
황해도 송림시 서북쪽에서 약 6㎞ 떨어진 석탄리 부락의 시우지골 서남쪽 경사면에 집중되어 있는 石灘里遺蹟의 일부는 황주군 석정리 상동에서 청운리까지도 걸쳐있다. 총면적은 10만㎡에 달하고 100여 기의 집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가운데 30여 기가 조사되었다.
집터는 모두 장방형이었으나 바닥 전면이 평탄한 것(제1류)과 바닥의 반정도를 좀 깊게 판 것(제2류)의 두 종류가 있다. 제1류에 속하는 것이 17기, 제2류에 속하는 것이 14기였다. 제1류는 대부분 불에 탄 집터로서 바닥에 유물이 많고, 기둥구멍이 없는 것이 많았다.
제2류는 불에 타지 않고, 유물이 적으며 바닥의 반정도를 15∼30㎝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그 중심부에 큰 화덕을 만들었고 이 반대쪽 바닥에도 불땐 자국이 있었다. 이 유형의 집터에는 중심축상에 큰 기둥구멍 2∼3개가 있고, 장벽가에 작은 기둥구멍이 서로 대칭되게 있었다(<그림 2>).
마) 대평리유적0158)
평남 북창군 대평리마을 동쪽 삼각주에 위치한 大坪里遺蹟에서는 15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층위관계로 선후와 집터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11기였다. 이 가운데 층위관계로 앞서는 화덕이 한 곳에 있는 집터가 5기, 늦은 화덕이 두 곳에 있는 것이 6기였다.
화덕이 하나인 집터 가운데 제대로 남은 것은 5호와 105호 집터이며 모두 장축을 남북에 둔 장방형이었다. 그러나 105호 집터는 남·북에 출입구가 있고, 남벽 양끝에 장방형 돌출부가 있는 특이한 모양의 집이었다.
5호 집터는 남북 8m, 동서 45m, 깊이 0.3m이며 서벽에 반월형으로 출입을 위한 돌출부가 있었다. 바닥에는 북쪽에 치우쳐서 돌을 돌린 방형 화덕이 있는데, 그 부근만 진흙을 깔고, 그 밖에는 풀을 깐 흔적이 있었다. 기둥구멍은 벽가에 1∼2개 있고, 네 귀에는 불에 타서 숯이 된 기둥이 남아 있었다.
두 곳에 화덕이 있는 집터 가운데 보존상태가 좋은 것은 2호와 103호 집터였다. 2호 집터는 장축을 남북에 둔 길이 10m, 폭 5.3m의 장방형이며 벽은 10∼15㎝만 남았다. 바닥에는 화덕 부근만 진흙을 깔고 그 밖은 모래바닥이었고 한 줄에 4개씩 세 줄로 초석을 배치하고 있었다. 화덕은 바닥 중심과 북쪽에 있었고 주위에는 장방형으로 돌을 돌렸다(<그림 3>).
103호 집터는 2호 집터보다 좀 작았으나 바닥에 기둥구멍이나 초석이 없는 것 이외에는 2호 집터와 비슷했다.
바) 흔암리유적0159)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상류의 강을 등진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한 欣岩里遺蹟에서는 15기의 집터가 조사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일반형인 장방형 집터였으나, 경사면에서 바로 바닥을 깎아낸 장방형 집터가 많았다.
일반형인 8호 집터는 동서 7.4m, 남북 3m, 깊이 0.2m이며, 바닥에는 10㎝정도 진흙을 깔고, 서남편에 치우쳐서 바닥을 10㎝ 정도 파고 그 위에 20㎝ 정도 진흙을 덮어서 U자형으로 만든 화덕이 있었다.
기둥구멍은 7개 나타났는데 중심축에 주 기둥과, 벽선을 따라 작은 기둥구멍이 있다. 경사면을 깎아서 바로 집바닥으로 만든 집터로는 14호 집터가 대표적인 것이다. 남북 10m, 동서 4.2m로서 서쪽에 폭 1m로 20㎝ 정도 바닥을 높인 선반형 시설이 있다. 바닥에는 10㎝ 두께로 진흙을 깔았고 화덕은 없으며 기둥구멍이 여러 곳에 있었다. 또 집안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칸막이로 보이는 길이 2m, 높이 0.9m, 폭 0.6m의 흙담이 있다.
사) 휴암리유적0160)
충남 서산군 해미면 휴암리와 고북면 용암리 경계인 구릉에 위치한 休岩里遺蹟에서는 11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집터는 모가 둥근 장방형 또는 타원형이며, 특이하게도 화덕이 없다. 바닥 중앙에는 장경 1m 내외, 단경 0.7m이며, 깊이 20㎝ 내외의 타원형 구멍이 있으며 구멍 안쪽 양 끝에는 직경 25㎝, 깊이 40㎝ 내외의 기둥구멍이 있었다. 규모가 큰 집터(2·3호)에는 중앙의 중복된 구멍을 중심으로 서로 2m 간격으로 대칭되게 4개의 기둥구멍이 더 있었다. 그 밖의 작은 기둥구멍들은 주로 벽 가까이에 있고 바닥에도 무질서하게 있었다. 이와 같은 집터는 한반도 서남부 여러 곳에서도 발견 조사되었다(<그림 4>).
아) 송국리유적0161)
충남 부여군 송국리에 위치한 松菊里遺蹟에서는 39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그 대부분이 휴암리유적의 집터와 같은 유형의 직경 5m 내외의 원형 집터와 모가 둥근 방형 집터였다. 원형 집터 가운데 3기(50-2·50-3·56-6호)는 집 바닥에 광을 파고 저장시설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유형의 집터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그림 5>).
자) 장천리유적0162)
전남 영암군 장천리에 위치한 長川里遺蹟에서는 12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집 모습이 제대로 남은 것은 7기, 다른 1기는 3칸×1칸의 高床건물의 터였다.
7기의 집터는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된 휴암리유적과 같은 유형의 것이나, 중앙의 타원형 구멍만 있는 것과 집 바닥에 돌을 깐 부석 집터도 있었다(<그림 6>).
차) 대곡리유적0163)
전남 승주군 대곡리에 위치한 大谷里遺蹟에서는 많은 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이 72기나 되었다. 이 중에는 휴암리유적과 같은 유형의 집터와 그의 변형인 중앙의 타원형 구멍의 양 끝 밖에 기둥구멍이 있는 것, 그리고 중앙의 타원형 구멍만 있고 이에 따른 기둥구멍이 없는 것 등도 있었다.
그러나 집터 평면은 앞의 것과 같으면서 중앙의 타원형 구멍이 없고, 화덕도 없는 집터가 많았다. 이것은 휴암리유적과 같은 유형의 집터에서 심하게 변화되어 중앙의 타원형 구멍이 없어진 형식의 집터인 것으로 보인다(<그림 7>).
카) 대야리유적0164)
경남 거창군 대야리와 인접한 무릉리 산포에서 발견된 2기를 포함하여 모두 15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이 大也里遺蹟의 집터 평면은 원형 또는 모가 둥근 장방형과 방형 등이다. 원형집터의 반은 중앙의 타원형 구멍 안쪽 양 끝에 기둥구멍이 있는 형식이고, 반은 타원형 구멍 양 끝 밖에 기둥구멍이 있는 형식이었다. 장방형과 방형 집터는 화덕과 불씨를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있어 앞의 것과는 다른 계통의 집터로 보인다(<그림 8>).
타) 기타 유적
위의 주요 유적 이외에도 함북의 오동0165)·중리0166)·영흥0167)유적, 자강도의 심귀리0168)·토성리0169)유적, 평북 공귀리유적,0170) 평남 태성리유적,0171) 황해도의 심촌리0172)·신흥동0173)·석교리0174)·주암리0175)유적, 평양의 금탄리0176)·입석리0177)·원암리0178)·강노리0179)·무진리0180)·남경0181)유적, 경기도의 수석리0182)·옥석리0183)·교하리0184)유적, 서울의 가락동0185)·역삼동0186)유적, 강원도의 내평리0187)·신매리0188)·방내리0189)유적, 충남의 대로리0190)·교성리0191)·고남리0192)·청당동0193)유적, 충북의 광의리0194)·양평리0195)·계산리0196)·내수리0197)유적, 전북의 보화리0198)·여의동0199)유적, 광주의 송암동0200)유적, 전남의 복교리0201)유적, 대구 월성유적,0202) 경남의 진양 대평리·동천리 양동·저포리유적 등이 있고 경기도 미사리유적0203)에서도 많은 집터가 발견되었다.
0154) | 김정문,<세죽리유적발굴 중간보고>(≪문화유산≫19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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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5) | 김용간·서국태<서포항원시유적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4, 1972). |
0156) | 황기덕,<무산 범의구석유적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6, 1974). |
0157) | 박석훈·이원근,<석탄리 원시유적발굴중간보고>(≪고고민속≫ 1965-8). |
0158) | 정찬영,<북창군 대평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
0159) |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편,≪欣岩里住居址≫(1∼4)(서울大 考古人類學叢刊 4·5·7·8, 1974∼1978). 崔夢龍,≪驪州欣岩里先史聚落址≫(三和社, 1986). |
0160) | 國立中央博物館,≪休岩里≫(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22, 1990). |
0161) | 國立中央博物館,≪松菊里≫(Ⅰ∼Ⅳ)(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18·19·23, 1978∼1991). |
0162) | 崔盛洛,≪靈岩長川里住居址≫(Ⅰ·Ⅱ)(木浦大學 博物館·全南 靈岩郡, 1986). |
0163) | 全南大 博物館 編,≪住岩댐水沒地域 文化遺蹟發掘調査 報告書≫Ⅷ∼Ⅶ(全南大 博物館·光州, 1989·1990). |
0164) | 東義大 博物館 編,≪大也里住居址≫(Ⅰ·Ⅱ)(동의대 박물관 학술총서 2∼3, 1988·1989). |
0165) |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회령오동원시유적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7, 과학원출판사, 1960). |
0166) | 안영준,<북청군 중리 유적>(≪고고민속≫1966-2). |
0167) | 서국태,<영흥읍유적에 관한 보고>(≪고고민속≫ 1965-2). |
0168) | 정찬영,≪압록강·독로강유역 고구려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3, 1983). |
0169) | 정찬영, 위의 책, 99∼135쪽. |
0170) |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강계시공귀리원시유적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6, 1959). |
0171) | 전주농,<대성리 저수지 건설장에서 발견된 유적정리에 대한 개보 (1), (2)>(≪문화유산≫1958-2·3). |
0172) | 황기덕, 리원근,<황주군 심촌리 청동기시대유적발굴보고>(≪고고민속≫1966-3). |
0173) | 서국태,<신흥동팽이그룻집자리>(≪고고민속≫1964-3). |
0174) | 황기덕,<황해남도룡연군석교리원시유적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3, 1963). |
0175) | 백룡규,<린산군 주암리 원시 유적 발굴 간략 보고>(≪고고민속≫1966-2). |
0176) | 김용간,≪금탄리 원시 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0, 1964). |
0177) | 리원근·백룡규,<평양시승호구역립석리원시기유적발굴간략보고>(≪문화유산≫1962-4). |
0178) | 정백운,<강남원암리원시유적발굴보고서>(≪문화유산≫1958-1). |
0179) | 申鉉東,≪朝鮮原始古代居住址と日本の影響≫(雄山閣, 1993). |
0180) | 申鉉東, 위의 책. |
0181) | 석광준·김용간,≪남경유적에 관한 연구≫(1984). |
0182) | 金元龍,<水石里 先史時代 聚落居住址>(≪美術資料≫11, 國立中央博物館, 1966). |
0183) | 金載之·尹武炳,≪韓國支石墓硏究≫(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6, 1967). |
0184) | 金載元·尹武炳, 위의 책. |
0185) | 金廷鶴,<廣州可樂里住居址發掘報告>(≪古文化≫2, 大學博物館協會, 1963). |
0186) | 金良善·林秉泰,<驛三洞住居址發掘報告>(≪史學硏究≫20, 1968). |
0187) | 文化財管理局,≪八堂·昭陽댐水沒地區 遺蹟發掘綜合調査≫(1974), 427∼507쪽. |
0188) | 翰林大 博物館,≪新梅里 支石墓 住居址 發掘報告書≫(한림대 출판부, 1986). |
0189) | 白弘基,<溟州郡連谷面坊內里遺蹟>(≪江原嶺東地方의 先史文化硏究(Ⅰ)≫(江陵大 博物館, 1991). |
0190) | 國立中央博物館,≪中島≫Ⅴ(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6, 1984). |
0191) | 國立扶餘博物館,≪保寧校成里집자리發掘調査中間報告書≫(1987). |
0192) | 金秉模·安德任,≪安眠島古南里貝塚:2次發掘調査報告書≫(漢陽大 博物館, 1991). |
0193) | 徐五善·權五榮,<天安 淸堂洞 遺蹟發掘調査報告>(≪休岩里≫, 國立中央博物館, 1990), 171∼224쪽. |
0194) | 忠北大 博物館,≪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綜合報告書≫(忠淸北道, 1984). |
0195) | 忠北大 博物館, 위의 책. |
0196) | 忠北大 博物館, 위의 책. |
0197) | 趙由典·洪成彬,<淸原內秀里無文土器散布地發掘調査報告>(≪文化財≫18, 1985). |
0198) | 洪潤植,≪井邑普化里百濟石佛立像周邊發掘調査報告書≫(圓光大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85). |
0199) | 全榮來,≪全州如意洞 先史遺跡發掘調査報告書≫(全州大 博物館, 1990). |
0200) | 崔夢龍,<光州松岩洞住居址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4, 1978). |
0201) | 全南大 博物館, 앞의 책. |
0202) | 慶北大 博物館,≪大邱 月城洞 先史遺蹟≫(1991). |
0203) | 任孝宰,<渼沙里遺蹟緊急發掘調査>(≪韓國考古學年報≫6, 서울대 박물관, 1990). 渼沙里先史遺蹟發掘調査團,≪渼沙里先史遺蹟址發掘調査略報告≫(1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