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집터의 특징
청동기시대 집터는 대부분 상당한 규모의 취락을 이룬 상태로 발견되고, 한 지역에 정착하여 거주했기 때문에 서로 겹친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집터의 평면형태는 방형·장방형·원형·타원형 등 매우 다양하나, 한강유역을 포함한 북쪽으로는 거의가 장방형이며 방형 집터도 더러 발견된다. 한강유역을 제외한 이남지역, 특히 한반도 서남부지역에도 장방형 집터가 적지 않으나 원형·타원형 또는 모가 큰게 둥근 방형과 장방형 집터가 많다. 그리고 한강유역 이북의 집터는 이 시대 일반적 집터의 특징을 갖는 것이고,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는 집안에 화덕이 없고 중앙에 타원형 구멍이 있는 형식, 즉 휴암리형 집터에 속하는 것이 많았다.
수석리와 흔암리유적에서 발견된 집터는 경사면에서 집 바닥을 수평으로 파들어가서 만든, 따라서 앞쪽에는 벽이 없고 좌우벽이 직각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집터는 일상생활을 위한 집의 터가 아니고 계절에 따라 어로작업을 위해 일시적으로 거주한 막사로 생각된다.
竪穴로 된 집터의 깊이는 1m가 넘는 것도 있었으나, 집터의 원래 어깨선이 그대로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에 그 깊이를 정확히 알 수 없고, 보통 60∼30㎝ 정도로 생각되나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차 얕아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이들 집터의 특징을 一般型 집터와 休岩里型 집터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들의 변화와 특이한 부분을 갖는 집터 등을 보완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
가) 일반형 집터
일반형 집터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새롭게 한반도에 도입되어 정착한 장방형 수혈주거가 그대로 청동기시대에 계승된 형식이다.0204) 이 형식의 집은 평면을 장방형으로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집의 면적은 가장 작은 것이 10㎡ 내외이며 가장 보편적인 것이 20㎡ 내외이다. 보통 10㎡를 단위로 확장되고 있는데 큰 집의 경우는 70㎡가 넘는 것(공귀리 1호·호곡동 8·24호)도 있다.
집 출입을 위한 시설이 없는 것이 많으나, 단벽에 2단의 넓은 대상계단을 만든 것(무진리 집터), 단벽 한쪽에 치우쳐서 돌출부를 만들어 출입한 것(심귀리 1호·영흥 10호·오동 8호), 단벽에 ㄱ자형 돌출부를 만들어 출입구로 한 것(중리 3호) 등이 있으나 매우 드문 것이다.
집 바닥에 기둥을 세우는 방법은 기둥구멍이나 바닥에 직접, 또는 원시적인 초석 위에 세우는 등 여러 가지이며 이들 방법 가운데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쓰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기둥을 세우는 방법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기둥을 세우는 방법의 발생 순서는 기둥구멍 → 바닥 → 초석의 순서일 것이며, 그것은 시기가 내려오는 것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둥 배치는 장벽에 평행으로 3렬 또는 4열로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벽가에 있는 기둥구멍의 경우는 벽에 붙어서 작은 구멍이 많이 있는 것과 벽에서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좀 큰 구멍이 있는 것이 있다. 앞의 것은 벽면을 긴 풀 등으로 덮어서 이것을 받친 지주들 가운데 어떤 것이 기둥 역할을 한 것이고, 뒤의 것은 독립된 기둥을 세운 것인데 이 때에는 기둥을 서로 대칭되게 세우는 일이 많았다.
집 바닥에는 화덕을 설치하나 화덕을 한 곳에 만드는 경우와 두 곳에 만드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경우에도 바닥 중심에서 한쪽으로 치우쳐서 만들지만 드물게 중심에 만든 것(서포항 1·2호, 주암리 1호, 오동 4호, 석탄리 22호)과 두 곳의 화덕 가운데 하나를 중심에 만든 것(대평리 2호)도 있었다. 화덕이 한 곳에 있는 것이 두 곳에 있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앞서는 형식임은 틀림없을 것이다(대평리유적).
화덕은 바닥을 파서 그 주위에 길쭉한 돌을 돌려 타원형 또는 장방형으로 만든 것이 많으나, 때로는 한쪽 변에 돌을 놓지 않은 경우(세죽리유적)도 있고, 화덕 바닥에 돌을 까는 경우(서포항유적)도 있다. 비교적 많은 집터에서 화덕 주위에 돌을 돌리지 않고 있으나, 이것은 시기가 내려와서 나타나는 형식이다.
이 시대 집터에는 바닥에 큼직한 돌을 놓아 석기 제작 등의 작업대로 사용한 것(공귀리 4호, 입석리 1·2호, 주암리 2호, 석탄리 5호)이 있다. 그러나 작업대가 없는 경우에도 집안에서 석기 제작 등의 작업을 한 경우(옥석리 집터)도 많다.
집터 바닥이 풍화암반이나 단단한 맨땅일 때는 그대로 집바닥으로 쓴 것 같으나, 모래바닥이나 단단하지 못할 경우에는 흔히 바닥에 진흙을 깔고 불을 때거나 진흙과 패각을 섞어서 다지고 불을 때 굳히는 경우가 많았다. 또 화덕 부근에만 진흙을 깐 경우(대평리유적)도 있었다.
집터 바닥에는 대부분 짚이나 긴 풀 또는 돗자리 등을 깔고 벽에도 긴 풀 등으로 덮어서 생활한 것으로 믿어지나, 이와 같은 내용을 집터 조사에서 뚜렷이 밝힌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바닥에 짚이나 긴 풀을 깔았다는 보고는 대평리 5호와 옥석리 집터 등이며, 호곡동 8호 집터에서는 바닥에 폭 40㎝, 길이 150㎝의 나무판자를 깔았고, 영흥 10호 집터에서는 돗자리를 깔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집터 벽 밑에 작은 구멍들이 비교적 조밀하게 나타날 경우 그것은 벽면에 긴 풀이나 짚 등을 덮고 아래위에 옆으로 가는 나무 등으로 누른 후 이 나무를 가는 기둥으로 얽어매어 받친 흔적으로 보아야 하며, 이것은 대부분 수혈 어깨 위로 올라가서 벽체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앞의<그림 3>의 대평리 2호 집터와 같이 폭 15∼30㎝, 길이 250㎝의 판자를 옆으로 벽에 붙인 경우에는 벽이 수혈 어깨보다 높게 올라갔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이 형식의 집터 가운데 특이한 것은 오동 8호 집터(<그림 9>)와 공귀리 4·5호 집터(<그림 10>)이다. 오동 8호 집터는 면적 20㎡를 조금 넘는 표준적 장방형 집터였으나 한쪽 장벽에 밖으로 돌출된 두 개의 감실형 시설이 있었다. 주거에서 분리되기 이전의 과도적인 저장시설인 듯하다. 공귀리집터는 땅을 파서 만든 긴 교통호에 작은 지호로 연결된 집터였다. 이와 같이 교통호로 연결된 집터는 여름의 장마나 호우 때 빗물이 교통호를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당연히 그 속에서의 주거생활이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비가 적은 겨울철에 사용한 집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 휴암리형 집터
休岩里型 집터는 흔히 ‘松菊里型 집터’라고도 한다. 이 유형에 속하는 집터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집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이 유형의 집터는 대부분 면적이 20㎡ 내외 이하의 것이 많고, 40㎡를 넘는 것은 1기(대야리 14호)밖에 보고되지 않았다. 둘째로는 이들 집터의 벽이 대부분 곡선, 즉 원형이나 타원형 또는 모가 크게 둥근 방형이나 장방형이며 그 가운데서도 원형이 가장 많다. 셋째로 이들 집터에는 화덕이 없다. 또 화덕이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집터 바닥 중앙에 작업괭 또는 작업공이라고 부르는 타원형의 얕은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가장 빠른 시기의 집터로 보는 휴암리나 송국리유적에서는 장경 1m 내외, 단경 0.5m, 깊이 0.2m 정도이나, 시기가 늦은 대야리나 대곡리유적에서는 깊이는 비슷하나 장경 1.3∼1.5m, 단경 0.5∼0.7m 내외로 커지는 경향이 있다.
또 이들 집터에는 뚜렷한 기둥구멍으로 보이는 구멍은 앞의 타원형 구멍의 안쪽 양끝에 한 개씩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규모가 조금 큰 집터에서는 이 복합된 구멍을 중심으로 서로의 간격이 2m쯤 되는 위치에 대칭으로 4개의 구멍이 더 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기둥구멍 이외에도 집터 바닥 또는 벽가에 작고 얕은 구멍이 무질서하게 있으나 이들 모두를 기둥구멍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유형의 변화된 형태는 집터 중앙의 타원형 구멍 안쪽 양끝에 있던 기둥구멍이 양끝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있다. 또 대야리와 대곡리유적에서는 중앙에 있던 타원형 구멍이 없고 화덕도 없는 집터가 적지 않다. 이것 역시 이 유형이 극도로 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송국리유적에 발견된 3기의 집터에는 바닥에 수혈로 된 저장시설이 있었는데 이는 다른 집터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휴암리형 집터에서의 주생활 양상은 집에 화덕이 없다는 사실과 아직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소위 ‘작업공’과 아울러 앞의 수혈식 저장시설 등을 감안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쉽지 않다. 어쩌면 집은 순수한 휴식과 수면을 위한 장소로만 사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휴암리형 집터의 원류에 관해서는 주로 토기형식 검토를 통해 한강유역의 민무늬토기의 전통이 남하한 것이라는 견해0205)와 집터의 조형을 합천 봉계리 유적의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7호 집터로 보는 견해0206)가 있다. 그러나 이들 견해는 모두 화덕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거 내의 화덕의 유무는 주거문화의 기본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강유역의 토기문화 전통의 남하는 토기만을 비교하여 말한 것으로 주거형태와는 무관한 것이다. 봉계리 7호집터는 단순히 외관상 유사한 것일 뿐, 화덕이 있는 집터와 휴암리형 집터와는 주거로서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형식의 집은 겨울에 난방이 필요없는 온화하고 더운 지방에 알맞는 집 형태이다.
이와 같은 기후 조건을 갖는 어느 지역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海美부근에 표류 또는 이주하여 그들이 살던 집, 즉 휴암리형 집을 정착시켜 점차 남쪽으로 전파시킨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다만 그 시원지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선사시대 문화에 많은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주거문화는 우리와 전혀 다른 전통을 갖는 일본에서도 키타규슈(北九州)를 위주로 한 西日本지역에서는 얼마간 이 유형의 집터와 그 변형집터가 발견된다. 이것은 역시 이 주거양식에서 살던 사람들이 일본으로도 건너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金正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