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Ⅱ. 철기문화1. 철기시대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1)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청동기시대의 개념
            • (2)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2) 인골 및 편년
          • 3) 청동유물의 분포와 사회
            • (1) 각 청동유물의 형식과 그 분포
            • (2) 청동유물의 지역적 특성
            • (3)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 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 (3) 영동·영서지방의 유적
            • (4) 영남지방의 유적
          • 2) 청동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무덤
          • 3) 청동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2) 석기
            • (3) 청동기
            • (4) 뼈연모
          • 4) 야금술의 발달과 청동유물의 특징
            • (1) 청동기의 제작 기술
            • (2) 청동유물의 성분분석
          • 5) 토기의 과학적 분석
        • 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1)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 2) 중국
            • (1) 청동거울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2) 청동유물의 동물문양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청동기의 성분분석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일본
            • (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 (2) 한·일 청동기문화의 교류관계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철기시대의 개념
            • (2)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3) 문헌자료와 철기시대
          • 2) 철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주요 철기유적
          • 3) 철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패총
            • (3) 무덤
            • (4) 방어시설
          • 4) 철기시대의 유물
            • (1) 철기 생산기술
            • (2) 철기유물
            • (3) 토기
            • (4) 토기의 과학적 분석
            • (5) 유리공예
        • 2.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3. 주변지역 철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1) 여명기(은·서주시대)
            • (2) 초보적 형성기(춘추∼전국 조기)
            • (3) 형성·보급기(전국 중∼만기)
            • (4) 발전기(전한 이후)
          • 2) 일본
            • (1)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별 추이
            • (2) 한·일 초기 철기문화의 교류관계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Ⅱ. 철기문화

1. 철기시대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1) 철기시대의 개념

 우리 나라 선사문화의 시대구분은 대체로 톰센(C. J. Thomsen)의 三時期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學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이 3시기법은 일제 관학자들로 하여금 우리 선사시대에 金石倂用期를 설정하는 근거가 되게 하였다.0583)

 우리 나라 철기시대에 관한 연구는 金海貝塚의 발굴로부터 시작되었다.0584)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大正 9년(1920)의 발굴에서는 鐵器를 비롯하여 石器·骨角器·土器·貨泉·炭化米·貝殼·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 발굴은 任那日本府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조사대상 지역을 김해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유역으로 삼았던 것이며, 출토유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 문화의 후진성이나 타율성 등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된 골각기를 제쳐두고 단 2점의 석기, 즉 각 1점씩밖에 출토되지 않은 석부와 숫돌의 출토에 주목하여 우리 선사시대에 금석병용기를 강조하였다.0585) 또한 김해패총을 남긴 종족집단을 任那古墳(伽耶古墳) 축조자들의 직계 조상으로 파악하는 등으로 역사를 왜곡하였다.

 당시 김해패총에 대한 일련의 조사작업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소위 ‘관학 아카데미’로 불리던 東京·京都帝國大學의 학자 및 그 출신자들로서0586) 조선총독부 산하 고적조사위원회 일원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우리 나라 선사문화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연구로는 1940년에 발표된<朝鮮の石器時代>를 들 수 있다.0587) 이 연구에서는 ‘금석병용기’란 독립적인 한 시대가 아니라 석기시대의 한 세분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이 시기는 석기시대 말기에 대륙으로부터의 금속기문화가 전래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문화상은 석기·청동기·철기가 혼재하는데 석기와 철기가 바로 연결되어 있어 서구의 금석병용기와는 다른 특이한 양상을 보이며, 그 연원은 모두 대륙이나 북방계통이므로 결국 조선의 고유문화는 석기문화밖에 남지 않는 바, 조선은 문화적으로 정체된 지역이며 그 발전 또한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금석병용기의 절대연대는 한반도 남해안지역의 여러 패총들에서 출토되는 철제 소도자 등의 금속기, 골각기, 화천 등을 통해 볼 때 기원 전후를 중심으로 하지만 더 이른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므로 한반도 금속기문화의 원류인 대륙이나 북방에서 민족의 이동이 잦아지는 전국시대 말, 즉 기원전 3세기경부터 시작되어 신라·백제 양 왕국이 성립하는 기원후 3세기 이전까지일 것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일본 학자들이 우리 선사문화에 설정한 금석병용기는 현재의 철기시대와 연대상 같은 시간대로서 그 자체 모순을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植民史觀에 입각한 일제 관학자들의 왜곡된 역사해석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보편적인 발달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독립적인 金屬文化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한 작업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금속문화의 존재를 확인하고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선사문화를 해석하려는 작업은 1950년대 북한고고학계의 커다란 과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학자들은 나진 초도유적 발굴(1949년)0588)을 시작으로 회령 오동·은율 운성리·강계 공귀리 등의 발굴을 수행하면서 靑銅器-鐵器時代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계속적인 지표조사 및 발굴을 통하여 우리 나라 원시유적의 분포정형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를 통한 금속문화의 존재 확인 외에도 이 시기에 북한에서는 이미 청동기-철기문화에 대한 이론화 및 토론을 통한 의견 조정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1960년대 이후부터는 古朝鮮에 관한 대토론과 맞물려 나감으로써 문헌기록과의 접합 및 사회구성체에 관해 어느 정도 합의된 논리를 수립하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1960년대 들어서야 철기문화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여전히 발굴조사는 미진하고 유물 수습 또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우리 나라 청동기 및 철기시대를 설정할 근거를 제시하고 그 발달과정과 전파경로 등을 추적할 수 있게 한 기초자료들이 축적되어갔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1964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고고학 개설인<韓國文化의 考古學的 硏究>가 발표되었다.0589) 이 연구에서는 우리 나라의 金屬文化를 기본적으로 비중국계인 北方系 靑銅器文化의 남하와 후에 철기를 공반한 中國系 靑銅器文化의 파급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봄으로써 청동 1기(靑銅器時代前期), 청동 2기(靑銅器時代後期, 혹은 初期鐵器時代 및 鐵器時代 前期)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시대적 한계가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로써 우리 나라 선사시대를 편년함에 있어 독립적인 철기시대 설정이 유보되었고, 고고학적 견지에서는 逸脫的이라 할 수 있는 시대명칭이 사용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현재 우리 니라 선사문화에 대한 시기구분 및 시대명칭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위에서 보듯이 철기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간략하나마 일제시대와 1950∼1960년대의 연구사를 살펴본 것도 그러한 문제점의 시작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의 철기시대는 기존의 시대구분법에 의해서 보면 초기 철기시대와 原三國時代(또는 삼국시대 전기),0590) 즉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600년의 기간에 해당된다. 그런데 사실 두 시대의 설정은 모두 시대적 한계성을 반영한 것으로서 고고학적인 시대구분 명칭으로는 부적당하며 특히 사용도구의 재질을 기준으로 선사문화의 발전단계를 제시하는 톰센의 3시기법을 근간으로 한 우리 나라의 시대구분 체계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철기시대를 전기와 후기의 두 시기로 나누어, 전기는 종래의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300년∼1년)에 해당되며, 후기는 삼국시대 전기(원삼국시대;1년∼기원후 300년)라는 새로운 편년안을 개정해 사용하고자 한다.

 초기 철기시대의 경우, 철기시대 앞에 ‘초기’라는 명칭이 붙게 된 데에는 우선 여전히 청동기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도 살핀 바와 같이 이 시기는 이전에 청동기 2기로 지칭되었을 만큼 청동기 제작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비록 실용성이 상실되기는 했으나 銅劍·銅鏡·銅鉾·銅戈·八鈴具 등 다양하고 정교한 청동제품이 제작되었다. 또한 細形銅劍과 精文式細文鏡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청동기문화는 琵琶形銅劍을 대표로 하는 遼寧地方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韓國化된 것이다. 따라서 철기시대 전기의 표지적인 유물로는 세형동검과 세문경이라는 두 가지 청동기 유물을 들 수 있다.

 청동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사실 이외에도 철기시대의 설정에 조심스러운 이유로 철기 사용이 시작된 시기가 남·북부간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현재의 고고학적인 연구의 결과로 볼 때, 북부지역에서 철기문화가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4∼3세기경 정도로 보이며 더욱 올라갈 가능성도 논의되고 있다.0591) 반면 남한지역의 경우, 최근 들어 唐津 素素里·扶餘 合松里·長水 南陽里 등에서 수습된 일괄 유물들이 북부지역의 細竹里(평북 영변군)-蓮花堡(遼寧 撫順市)類型과 연결되고 있어 중부지방의 철기시대의 연대가 기원전 2세기 중엽경으로 약간 상향 조정되는 등 북부지역과의 폭이 줄어지고 있으나, 남부지방의 경우 현재로서는 기원전 2세기 말엽에서 1세기 초를 상회할 만한 철기의 출토 사례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철기 사용시기의 개시에 관한 한 남부지역과 북부지역간에는 3세기 이상의 시간적 괴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이미 국가라는 정치적 실체가 등장할 정도로 문화변동이 가속화된 단계에 있어서는 상당히 큰 시간폭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상과 같이 철기사용의 개시가 기원전으로 올라가는 것도 최근의 일이고 보면 종래까지 인지되어 오던 남북간 시간폭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 등으로 인해서 우리 나라 선사시대의 시기구분에 있어서 어느 시대에도 붙지 않던 ‘초기’라는 접두어가 철기시대에만 붙게 되는 모순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른 시대의 예를 보면 그러한 모순은 쉽게 드러난다. 신석기시대의 경우,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를 설정하는 기준이 석기의 마제나 타제의 가공 여부보다는 토기의 존재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도 신석기시대 초기의 유적에서 마제석기보다는 타제석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된다는 점은 철기시대 초기에 청동기가 성용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 나라 선사문화의 변동과정이나 편년체계에 있어 한반도 전체가 동일한 문화발전 단계에 있을 수는 없으며, 또한 일정기간을 한 시대로 설정할 경우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간의 철기시대 개시에 차이가 있더라도 같은 시대로서 설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한 사항들이 지나치게 고려된다면 그것은 문화발전의 과정을 단선적이고 균일적으로만 파악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문화요소를 수용하여 변화해 가던 고대사회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철기시대 초기란 의미로서의 ‘초기 철기시대’는 ‘철기시대’의 일부로 파악되고 명명되어야만 사용된 도구의 재질을 기준으로 발전 단계가 인식되고 있는 우리 선사문화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문화발전의 한 단계로서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原三國時代는 이전에 城邑國家時代·三韓時代·部族國家時代·金海時代·熊川期 등으로 지칭되어 오던 서력기원 개시 전후부터 기원후 300년의 기간에 대해 문헌사학과 고고학의 이중적 명칭사용을 지양하고자 ‘三國時代의 原初期’ 혹은 ‘原史段階의 三國時代’란 의미에서 제창된 시대명이다.0592) 그런데 이러한 시대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 때문이다.

 첫째, 역사시대 이전을 다루는 고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원삼국시대는 시대구분의 순서가 반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1∼3세기대’라는 특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시대개념을 부여하고 고고학적 문화상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한 지역에 고고학적인 문화상의 등장과 소멸을 기준으로 文化段階를 설정하고 여기에 연대를 부여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통합된 문화단계를 한 시대로 인식하는 고고학적 시대구분과는 정반대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原史段階의 적용과 관련하여 이 시대개념은 문헌사학이나 고고학 모두의 영역에 있어서 일탈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고고학에서 논의되는 원사시대란 선사시대의 한 부분인 바, 선사문화를 다룸에 있어 역사시대 이전에 대해 도구의 재질을 위주로 하여 이루어지던 시대구분이나 그 명칭체계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또한 문헌사학의 입장에 있어서도 선사시대의 일부로서 원사단계와 역사시대의 명칭인 삼국을 결합시키는 것 또한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이 된다.

 셋째, 기원후 300년이라는 원삼국시대의 하한에 대해서 볼 때 문헌사학의 입장에서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정비작업를 가장 늦게서야 달성하는 新羅가 왕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奈勿王代(359∼401년)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며, 고고학의 입장에서는 고총고분의 발생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三國史記≫에 나타나는 신라(기원전 57년)·고구려(기원전 37년), 백제(기원전 18년)0593)의 초기 기록을 신뢰한다면0594) 기존의 연대관은 대폭 수정되어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발생은 시기는 약 4세기 가량 상향조정되게 되며 원삼국시대라는 것은 그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비록≪삼국사기≫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더라도 고구려는 태조왕(기원전 57년∼기원후 146년?)대에 이미 국가체계를 갖추었으므로 ‘원삼국’이라는 시대명칭은 중·남부지역만을 중시한 것이며 결국 우리 나라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는 부적당한 일면이 있다.

 따라서 종래의 초기 철기시대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선사 또는 원사 단계의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또한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만은 아니다. 기원전 2세기대에 성립된 위만조선(기원전 194∼108년)이 이미 族長社會(Chiefdom society)단계를 넘어 中心地 貿易(Central place trade)을0595) 경제적 기반으로 한 정복국가의 성격을 띠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古代國家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바, 우리 나라 역사시대는 그 시작이 점차 올라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문제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사회들을 어떠한 단계에 편입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 매우 복잡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는 모두 한국 선사시대 시대구분 체계의 일관적인 흐름에서 이탈한 것이며 이러한 시대개념으로는 우리 나라 철기문화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한계를 지니게 된다. 그러한 원인의 또 다른 한 부분은 문헌기록과 접하고 있다는 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정치체를 중심으로 고고학적 자료를 해석하려는 연구경향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선사문화를 한반도 및 주변지역이라는 공간 속에서 연속적으로 발전해 간 문화들의 집합체로 파악하려면 당시의 이 지역주민들이 이룩해 놓았던 사회경제적 발전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선사문화를 주로 다루는 고고학에서는 이러한 발전의 양상을 현재 남아 있는 물질문화를 창조했던 당시 사회의 기술력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철기시대의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이러한 측면에 중요한 점을 제시해 주고 있는 한 연구0596)에서는 청동기시대 또는 철기시대 등의 명칭은 문명의 어떤 국면을 나타내주기 편리한 이름이므로 비록 그들이 포괄할 수 없는 매우 많은 양상들이 있지만, 보다 나은 이름을 찾아낼 때까지 이들을 잠정적으로 계속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러한 해명이 구조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힘들 것이지만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확연히 구분하던 3시기 구분법과는 달리 양시대를 단지 도구의 재질이 아닌 제조공정이나 처리법에 주안하여, 즉 기술사적인 측면에서의 문화발전 또는 사회변화를 의식하면서 문화단계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0597)

 그러한 점에 주목하다 보면 특정지역의 문화명이나 사서에 나타나는 특정 정치체의 명칭을 문화명으로 전환시켜 그 단계의 우리 나라 전지역의 문화를 포괄하려하는 시도와 배치되는 점이 생긴다.0598) 다시 말해 한 유적의 발굴로부터 비롯되는 소규모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상에 대한 인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표지유물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 나라 전체의 문화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표지유물로 동시기 상이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상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자칫 다른 지역을 문화적 공백지대로 만들 우려가 있기도 하는 등, 전국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 즉 지역적 편파성, 지역간의 시간적 괴리, 문헌기록과의 성급한 접합에서 야기되는 이견들을 최소화하고 선사문화의 일관된 흐름속에 철기문화를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포괄적인 개념일 것임과 동시에 고고학의 시대구분에서 일관적인 기준이 적용된 ‘철기시대’ 혹은 ‘철기문화’로 파악해야 한다.

 고고학적인 문화상에서 ‘철기시대’ 또는 ‘철기문화’의 시작을 철기의 존재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족하다. 비록 서남아시아 일대에서 기원전 3000년기 후반부터 철기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이 시기를 철기시대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기술적인 측면에서 철기라는 도구가 이전의 도구들이 가지는 이상의 성능을 가짐으로써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첨단의 도구로 기능할 때부터를 철기시대라고 할 수 있다.0599)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나라 철기문화의 경우, 이미 안정된 중국계(燕國)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되었고 그 시작단계부터 현지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어 철기의 존재가 곧 철기시대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

0583)西谷正,<朝鮮考古學の時代區分について>(≪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集≫ 考古學論考, 平凡社, 1982).

盧爀眞,<時代區分에 대한 一見解>(≪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I, 一志社, 1987).
0584)우리 나라 철기시대 연구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大正 9년(1920)에 이루어진 김해패총의 발굴부터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는 김해패총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04년 八木奘三郞 등의 조사에 의해서이며, 발굴 또한 1913년부터 1917년까지 해마다, 1920년, 1922년, 1934년 등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단지 그 가운데 1920년도의 발굴이 정식보고서(1923년)를 통해 잘 알려졌을 뿐이다.

崔夢龍,<韓國 鐵器時代의 時代區分>(≪國史館論叢≫50, 國史編纂委員會, 1992), 23∼61쪽.

―――,<鐵器時代-最近 15年間의 硏究成果>(≪韓國史論≫23, 國史編纂委員會, 1993), 113∼166쪽.
0585)朝鮮總督府,≪大正九年度古蹟調査報告≫(1923).
0586)당시 조사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今西 龍·鳥居龍藏·黑板勝美·關野 貞·濱田耕作·梅原末治·藤田亮策 등이다.
0587)藤田亮策,<朝鮮の石器時代>(≪東洋史講座≫18, 東京;雄山閣, 1940;≪朝鮮考古學硏究≫, 京都;高桐書院, 1948).
0588)나진 초도유적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게된 것은 1960년대 초 지탑리유적 층위별 문화상이 파악되면서부터이다(도유호,≪조선원시고고학≫, 1960 및 한창균,≪도유호와 북한고고학≫, 백산자료원, 1994).
0589)金元龍,<韓國文化의 考古學的硏究>(≪民族文化硏究≫1, 고려대, 1964;≪韓國文化史大系≫I, 고려대, 1964).
0590)현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三國史記≫초기 기록을 신뢰할 만한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문헌사학에서도 이를 역사시대에 편입시키려는 경향이 농후한 바, ‘원삼국시대’(삼국시대 전기)는 당연히 역사시대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고고학적 문화상에 대한 설명은 철기시대에서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이를 철기시대로 하고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다루기로 한다.
0591)현재 상태로 근거는 미약하나 북한학자들은 회령 오동의 철기나 吉林·長春지구 교외 騷達泃遺蹟 등의 철기가 기원전 7∼5세기로 올라갈 것으로 보고 있다.
0592)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一志社, 1973).
0593)≪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始祖溫祚王條에 나타나는 稱王, 非血緣的 社會組織, 東明王廟 등과 같은 國祠나 城柵, 궁궐의 건립, 右輔職과 같은 행정 관제, 河南慰禮城과 같은 도읍지의 존재, 15세 이상에 부과된 築城負役, 王位世襲制, 騎兵을 중심으로 하는 靺鞨과의 빈번한 전쟁 기사 등은 백제가 초기부터 완전한 국가체제를 가졌음을 시사해 준다(崔夢龍,<漢城時代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震檀學報≫60, 1985).
0594)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 초기기록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면서 종래 원삼국시대를 삼국시대 전기로 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다(崔夢龍,<韓國考古學의 시대구분에 대한 약간의 提言>,≪崔永禧先生華甲紀念史學論叢≫, 探求堂, 1987).
0595)崔夢龍,<古代國家成長과 貿易-衛滿朝鮮의 例->(≪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歷史學會, 1985).

崔夢龍·崔盛洛 編,≪韓國古代國家形成論≫(서울대 출판부, 1997).
0596)Forbes, R. J., Studies in Ancient Technology Ⅷ·Ⅸ, 1971·1972.

崔夢龍, 앞의 글(1993).
0597)崔夢龍, 위의 글.
0598)이러한 명칭의 예로 ‘三韓時代’, ‘金海時代’, ‘熊川期’ 등이 있다.
0599)崔夢龍,<人類와 鐵>(≪鐵鋼文明發達史 硏究報告書≫, 浦項綜合製鐵株式會社, 1989).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