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Ⅰ. 초기국가의 성격3. 초기국가의 성격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1. 한국 고대의 정치발전 단계론
        • 2. 국가 형성 이론의 한국사 적용문제
        • 3. 초기국가의 성격
          • 1) 국가 기원 및 형성이론
          • 2) 군장사회와 국가
      • Ⅱ. 고조선
        • 1. 고조선의 국가형성
          • 1) 고조선의 건국신화
          • 2) 동이족과 그 문화권
            • (1) 지석묘문화
            • (2) 비파형청동단검문화
          • 3) 고조선의 주민과 예맥
          • 4) 고조선의 건국연대
          • 5)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 (1) 고조선의 위치문제
            • (2)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역
        • 2. 고조선의 변천
          • 1) 고조선사회의 국가적 성장
          • 2) 위만조선의 성립과 변천
            • (1) 위만조선의 성립
            • (2)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 3)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 4) 한사군의 설치와 그 변천
            • (1) 한사군의 설치와 구성
            • (2) 한사군의 성격과 변천
        • 3. 고조선의 문화와 사회 경제
          • 1) 고조선 전기와 청동기문화
            • (1) 비파형동검 이전의 청동기문화
            • (2) 비파형동검시기의 고조선문화
          • 2) 후기 고조선과 철기문화(기원전 4∼2세기)
            • (1) 기원전 4세기 고조선지역
            • (2) 기원전 3∼2세기의 철기문화
          • 3) 고조선의 사회경제
            • (1) 사회성격
            • (2) 경제성격
      • Ⅲ. 부여
        • 1. 부여의 성립
          • 1) 부여사의 성격
          • 2) 부여의 기원과 건국설화
            • (1) 부여 명칭의 기원
            • (2) 부여족의 기원
            • (3) 부여의 선주민문화와 한대 부여문화
            • (4) 건국 연대
          • 3) 부여의 영역과 지리적 특성
            • (1) 3세기 부여의 영역
            • (2) 부여국 왕성의 위치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1) 부여의 성장
            • (1) 부여의 기원(부여·북부여·동부여)
            • (2) 부여의 성장
          • 2) 부여의 대외관계
            • (1) 고구려와의 관계
            • (2) 중국과의 관계
            • (3) 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1)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통치조직
          • 2) 사회와 경제
            • (1) 신분제도
            • (2) 법률과 형벌
            • (3) 경제생활
        • 4. 부여의 문화
          • 1) 신앙과 제의
          • 2) 생활 풍습
          • 3) 예술-건축, 공예, 기타
      • Ⅳ. 동예와 옥저
        • 1. 동예의 사회와 문화
          • 1) 동예의 위치와 변천
          • 2) 동예의 사회와 문화
        •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 1) 옥저의 위치와 변천
          •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 Ⅴ. 삼한
        • 1. 삼한의 정치와 사회
          • 1) 진국과 삼한
          • 2) 삼한의 정치
            • (1) 소국의 정치권력
            • (2) 소국연맹체의 형성
          •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 (1) 농경생활
            • (2) 교역활동
            • (3) 계층 분화
        • 2. 삼한의 문화
          • 1) 삼한의 생활과 풍속
          • 2) 삼한의 유적과 유물
            • (1) 철기
            • (2) 토기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군장사회와 국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국가라는 정치체를 상정할 때에는 한자문화에 속하는 일반적인 관행으로 나라를 뜻하는 ‘國’자와 王이라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나라를 뜻하는 국자는 원래 邦으로 표시하다가 漢代 이후에 국으로 표현이 바뀌었으므로 ‘國’자가 붙어 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오늘날의 국가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 나라의 고대사를 기술한 중국측이나 우리측의 사료를 보면 분명 국가의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국’이라고 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고, 또한 ‘국’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많은 사회도 실은 국가의 단계로 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같은 사실은 삼한사회의 70여 개 국명으로 나타나는 존재들의 단계가 君長社會에 해당하고 여기에서 한층 발달된 사회, 예컨대 目支國이나 斯盧國 같은 집단이 뒤에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065) 즉≪三國志≫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小國 또는 大國이라는 표현은 규모를 나타낼 뿐 국가라는 의미가 아니므로 ‘국’자가 붙어 있다고 해서 전부 국가라고 보는 것은 발전 단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국’이란 국가 이외에도 지역이라든가, 또는 지역의 정치 집단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066) 따라서 한국사에 존재한 여러 정치체들의 구체적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정치체들이 반영하고 있는 사회조직의 내용과 규모 등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한국사의 초기에 존재한 여러 정치체들에 관한 자료는 중국측 자료가 대부분으로 이들 자료에서는 각 사회의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왕과 군장으로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다. 즉 다음 사료에서 보는 것처럼 王·侯·君王·君長 등으로 칭호가 세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칭호가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 발전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에 관한 기사로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濊貊朝鮮 후기 단계와 위만조선 관련 기록 및 부여와 삼한 관련 자료이다.

A-①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자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② 그 때 朝鮮王 否가 왕이 되었다… 否가 죽자 그 아들 準이 왕위에 올랐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인용≪魏略≫).

③ 그 후 40餘世가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을 칭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

④ 準이 이미 왕을 僭稱한 후에 燕의 亡人인 衛滿의 공격을 받아 왕위를 빼앗기고 좌우의 宮人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韓地에 살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⑤ 朝鮮王 滿이라는 사람은 옛날 燕지역 사람이다(≪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위의 사료에 조선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전국시대 燕과의 대결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기원전 4세기 경의 일로 이해되고 있다. 또 조선왕 否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왕을 칭하였다는 것은 중국과의 대결 과정에서 성장하는 조선의 정치 역량을 나타내주는 좋은 자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자료를 보면 왕호를 칭하게 된 상황이 “스스로 왕이라 이름하였다”라든가 또는 “함부로 왕이라 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즉 중국적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칭왕 사실은 중국에 복속되거나 포섭되어 그 대가로 왕호를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성장을 통하여 自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 문화기반을 통하여 정치적 성장을 이룩한 이들이 나름의 역량을 확보한 상태에서 중국과 대등한 정치·군사적 수준에서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朝鮮侯의 自稱爲王과 否, 準으로 세습되면서 僭號稱王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통치하고 있는 사회의 역량이 왕을 칭할 수 있는 수준의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같은 사실을 중국사회가 인정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정변을 통해 準王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衛滿에 대해서도≪史記≫朝鮮傳에 ‘朝鮮王’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이같은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한편 준왕이 위만의 공격을 피해 南奔하여 삼한지역에 와서 ‘自號韓王’하였다는 기사를 위의 사정과 연결시켜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준왕이 칭왕하였다는 기사는 앞에서 보았거니와 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해 와서 스스로 韓王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피난해 오기 이전의 자기가 칭왕한 것을 마한지역에 와서 그대로 따른 관행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삼한 지역과 관련된 왕으로는 辰王이 대표적 존재이다

⑥ 辰王이 目支國을 다스렸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⑦ 弁辰韓은 24國이다… 그 12國은 辰王에게 속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弁辰).

 사료 ⑥의 진왕은 목지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나오고 있어≪後漢書≫동이전에 나오는 ‘三韓의 總王’이라는 기록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삼국지≫의 기록이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결국 이러한 진왕과 결부된 나라가 삼한의 군장사회에서 국가로 나아가는 모습의 일부라고 여겨진다.

 한편 부여의 경우 君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있다.

⑧ 나라에는 君王이 있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⑨ 戶數는 5千이다. 大君王은 없지만 대대로 邑落에는 각각 長帥가 있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위의 사료에서 부여의 경우 군왕이 있음에 비해 동옥저에는 大君王이 없고 단지 長帥들만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君王’이라는 존재가 곧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이라는 표현이 결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적 발전 수준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며, 이들 사회가 국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왕과 관련된 기사와 달리 君長 관계 기사는 예가 많아 훨씬 분명한 뜻을 전해 주고 있다. 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B-① 遼東太守는 곧 滿을 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蠻夷의 君長이 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② 馬韓은 서쪽에 있고… 각각 長帥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 臣智라고 이름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③ 그 풍속은 기강이 없어서 國邑에 비록 主帥가 있어도 邑落에 섞여 있어 능히 잘 제어하지 못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④ 弁辰 또한 12國인데 또 여러 작은 別邑들이 있다. 각각 渠帥가 있는데 큰 자를 臣智라 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弁辰).

⑤ 大君長이 없고 邑落에는 각각 大人이 있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挹婁).

⑥ 廉斯鑡은 辰韓 右渠帥이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所引≪魏略≫).

 ①의 자료는 위만이 外臣으로 있으면서 여러 蠻夷의 군장들이 천자를 뵙고자 할 때 이를 금지하지 않토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의 군장들은 주변 사회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다음 사료의 내용과 연결된다.

眞番 옆의 여러 나라들(衆國)이 글을 올려 天子를 알현코자 하였으나 또 막혀서 통하지 못하였다(≪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이것은 한나라가 위만조선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운 내용으로서 남쪽의 여러 나라(衆國)들이 천자를 뵙고자 할 때 길을 가로막았다는 뜻이다.067) 이러한 점에서 이 문구는 B-①의 문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경우를 대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오랑캐의 君長들이 (中國에) 들어가 天子를 알현코자 하였다.

眞番 옆의 여러 나라들(衆國)이 글을 올려 天子를 알현코자 하였다.

 위에 보이는 여러 오랑캐의 군장이라는 대상 속에는 진번 옆의 여러 나라들도 포함되는 광의의 해석이 가능하고, 범위를 좁힌다 하더라도 진번이나 衆國도 역시 군장이라는 지도자가 이끄는 단계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도 사회의 규모와 세력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왕이 존재한 나라도 있었지만 대체적인 추세는 군장이 지배하는 가운데 점차 왕이 출현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B-②에서 ⑥까지의 자료는 각 지역 사회의 정치 지도자를 어떻게 명명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명칭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국가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을 개별적으로 표현한 渠帥·長帥 등이 포괄적으로 군장이라는 표현으로 망라되고 있음을 사료 ①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삼한사회가 국가 형성을 지향한 여러 정치체의 복합체임을 감안할 때 이 사회들의 정치적 성격에 부응하는 지배체제는 국가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이와 유사한 통치형태를 예상할 수 있다. 즉 目支國을 통치하는 辰王과 같은 존재는 특수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아직 왕에 이르지 못한 거수라는 존재가 통치하였다. 이들의 명칭을 馬韓의 경우 큰 자를 臣智, 그 다음을 邑借라 하였으며068) 辰弁韓의 경우에도 큰 자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을 險側, 그 다음을 樊濊, 그 다음을 殺奚, 그 다음을 邑借라 하였다.069) 즉 삼한의 대부분 ‘국’에는 거수로서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으로 지칭되는 존재가 지배체계를 형성하여 누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070)

 따라서 삼한 각국의 내적 통치체계는 적어도 신지를 정점으로 하고 읍차에 이르기까지 몇 개의 서열화된 단계가 있었으므로 이는 정치조직의 발전단계에 있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의 체계가 중국세력에 의해 인정되어 그들의 위상에 대응하는 작호가 사여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서열화된 명칭이 실질적인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정과 관련하여≪삼국지≫동이전 濊條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자료가 있다.

C-① 大君長은 없다. 漢나라 이래로 그 관작은 侯와 邑君과 三老가 있어 下戶를 통할하였다.

② 그곳의 渠帥를 봉하여 侯로 삼았다. 지금 不耐濊는 모두 그 種族이다.

③ 正始 6년 樂浪太守 劉茂가… 군대를 일으키자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④ 正始 8년 다시 조공을 바쳤으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불내예왕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

 C-①에서는 濊에는 君長이 없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고, ②에서는 渠帥를 侯로 임명하였다는 것이며 ③에서는 不耐侯의 한 단면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④에서는 不耐濊王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하여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지배자의 호칭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다른 집단의 정치발전 단계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참고가 된다. 앞에서 본 準侯·準王에 관한 기사를 참조하면 이와 같은 성격의 선상에서 유사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侯나 王의 칭호는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해서 융통성있게 운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계질서가 서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장이라는 칭호는 왕이나 후와 동일한 선상에 올려놓고 대비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에서 문헌 자료를 통해 정치적 단위를 추정할 수 있는 지배자의 칭호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제가 고고학의 입장에서 검토되고, 또 고고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문헌 사료의 결핍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의 발달 단계를 구체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夫租薉君의 印章은 이러한 문제를 푸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1958년 평양 貞柏洞의 목곽묘에서 ‘부조예군’이라는 銀印이 나온 바 있는데 함께 반출된 유물로는 銅劍·銅鉾·鐵劍·馬具·車具·土器 등이 있다.071) 이 유물들을 보면 곧 토광묘 계통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검과 철검이 동시에 나온다는 것은 철기 위주의 토광묘가 아니라 지난날 청동기문화 일부를 답습하고 있던 시대의 문화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장이 출토된 무덤이 단순한 토광묘가 아니라 곽이 있는 토광묘라고072) 알려지고 있어 문화의 계통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하튼 토광묘에서 부조예군이라고 쓰여진 은인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부조예군임이 분명하고, 또한 함께 출토된 유물로 보아 그가 韓人이었다는 것도 거의 틀림없는 사실로 보여진다.073) 그러므로 이 인장은 부조의 군장이 어떤 문화 단계의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夫租라는 이름은≪漢書≫지리지에 보이는 낙랑 동부7현 가운데 하나인 夫租縣 그것이며 시기는 대개 기원전 1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위의 사실과 연관되는 유물이 1961년 정백동 목곽분에서 나온 바 있다. ‘부조예군’이라는 인장이 나온 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夫租長印’, ‘高常賢印’이라는 은인이 나온 바 있는데, 이 인장은 이 시기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이 무덤에서는 鏡·馬面·車馬具·黑漆蓋 등이 細形銅劍과 함께 출토되었다. 夫租長印은 夫租縣長의 의미이고 高常賢印은 고상현의 인장을 뜻하므로 이 무덤은 고상현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이 무덤에서 세형동검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채로우며 여타의 중국계 유물과 혼재하고 있는 것은 더 검토할 여지가 있다. 고상현을 낙랑 토호인 중국인으로 보는 의견이 있지만 세형동검이 반출되었다는 사실과 부조예군의 경우를 참조하여 더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고고학의 처지에서 기원전 1세기 경의 유물의 종류와 성격을 이해하고 문헌에 보이는 군장 단계의 사회를 연결해 보면 군장사회와 국가의 단계를 어떻게 어느 선에서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삼한사회에 존재하였던 여러 정치체들은 국가 성립 직전의 정치체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앞서 언급하였던 국가(State)의 개념을 감안할 때 삼한사회에 존재한 78개의 ‘國’들은 대부분이 국가사회를 형성하기 전단계의 정치적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074) 그런데 이들 삼한사회의 국들에 대해서는 인구구성과 관련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즉 馬韓의 경우 “50여 국으로 大國은 萬餘家 小國은 數千家로 총 십여 만 호”075)라고 하였고, 辰弁韓의 경우 “弁辰은 12국으로 또 여러 작은 別邑이 있다. 대국은 四五千家 소국은 六七百家로서 총 四五萬戶이다”076)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는 해당 정치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추론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서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도 국가의 기원문제를 언급할 때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077) 또한 인구수는 해당 지역의 규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치체의 전반적 규모를 확인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078)

 사료에서 보듯이 마한의 소국 수천 가의 규모는 辰弁韓의 대국 사오천 가의 규모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정치체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삼한사회에 존재한 여러 정치체는 일단 人口構成면에서 적어도 내용을 달리하는 네 개의 정치체의 양상을 가정하게 한다. 이같은 양상은≪삼국지≫동이전과≪三國史記≫등의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정치체의 규모와 성격을 구분한 내용과 연결된다.079)

 우선 가장 선진적인 정치발전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단계에 해당하는 정치체는 마한의 대국 규모의 존재로서 만여 가의 인구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사회이다. 삼한사회의 1家의 규모는 삼한지역의 주거지 발굴을 통해 구성인원이 약 5명 내외임이 밝혀져 있다.080) 이에 의거한다면 만여 가의 사회는 인구 5만여 명을 포용한 사회로서 상당히 규모가 큰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081) 이같은 규모는 삼한 전체에서 몇 개 이상 상정하기는 곤란하므로 문헌상에 나타나는 마한지역의 目支國과 伯濟國, 진한지역의 斯盧國, 변한지역의 狗邪國 등이 이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결국 다양한 정치체간의 통합과정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존재로서 국가형성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백제·사로·구야는 각각 百濟·新羅·加耶로 발전하였지만 삼한사회에서 가장 먼저 발전된 사회로 이해되었던 마한의 목지국은 백제에 의해 병합되어 연속성을 상실하였다.

 두번째로 상정되는 삼한사회의 정치체는 마한의 소국과 진변한의 대국 규모의 정치체로서 인구 규모가 약 2만여 명 내외의 사회이다. 이같은 규모에 해당되는 정치체는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는 없으나 신라에 복속된 주변 세력 중 상당한 규모로 이해되고 있는 押督國·召文國·甘文國·沙伐國 등과 마한사회의 乾馬國을 이같은 정치체에 비견해 볼 수 있다. 이들 정치체는 신라에 복속되면서 ‘郡’으로 편제되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마국의 위치는 전통적으로 전북 益山郡 金馬面 일대로 비정하여 왔다.082) 건마국과 관련된 문헌 자료는 보이지 않으나 익산 일대에서 확인되는 상당량의 청동유물은 바로 이곳이 건마국이 있던 곳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즉 금마면·王宮面·八峰面·三箕面·完州郡 上林里 등지에서 발견된 琵琶形銅劍·粗文鏡·桃氏劍·細形銅劍·後漢鏡 등의 유물은 이것을 반출하는 분묘의 주인공이 삼한사회의 정치적 지배자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는 곧 건마국의 군장과 관련된 일정한 영역과 위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도씨검과 후한경의 존재는 건마국의 군장이 내부적인 통치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섭에서도 중심 인물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083) 이같은 청동유물의 집중적인 반출과 그 문화의 성격 및 규모를 감안할 때 건마국과 같은 정치체는 앞에서 본 대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바로 그 다음 단계의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로 상정되는 辰弁韓의 소국에 해당하는 정치체는≪삼국사기≫에서 산견되는 소규모의 ‘國’들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즉 신라의 경우 주변의 정치체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郡에 속하는 縣으로 편제된 세력들이 이같은 소국에 해당하리라 생각된다.084) 마지막으로 상정되는 ‘諸小別邑’ 단계의 정치체는 최소한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보기 힘든 존재로서 주변의 강력한 정치세력에 거의 귀속된 상태, 또는 완전 예속된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같이 인구구성을 기준으로 하여 삼한사회의 정치체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비록 각 세력간의 격차는 존재하지만 各國數와 人口數를 대비해 볼 때 만여 명 내외로 구성된 정치체가 평균적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삼한사회에서 볼 수 있는 蘇塗와 天君의 존재는 이들 사회가 상당히 발전된 수준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정치적 지도자와는 별도로 제사를 담당하는 천군이 있었다는 것은 삼한사회의 분화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며, 특히 종교의례를 수행하기 위한 별도의 지역으로서 소도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발전수준이 높았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085) 특히 소도나 천군과 관련되는 劍·鏡·玉 등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의 성격을 보다 구체화시켜준다고 하겠다.086) 이상에서 본 것처럼 삼한사회의 ‘국’으로 표현된 존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국가(State)’의 개념에 해당되는 존재가 아니라 일정 영역의 정치체로서 아직 국가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군장사회 단계(Chiefdom Level)라고 해야 할 것이다.

<金貞培>

065)金貞培,<三韓社會의 ‘國’의 解釋問題>(≪韓國史硏究≫26, 1979;≪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6, 223∼229쪽).
066)金兆梓,<封邑邦國方辨>(≪歷史硏究≫2期, 1956).
067)판본에 따라 衆國이라는 표현은 辰國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국도 衆國의 일부분이란 점에서 衆國의 의미로 파악하고자 한다.
06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069)위와 같음.
070)그런데 이같은 양상을 보다 구체화시켜 주는 것으로서 중국이 삼한의 거수들에게 사여한 관작 명칭이 있다. 景初年間(237∼239)에 魏가 낙랑, 대방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삼한사회에 대하여 관작과 인수를 사여하여 간접적 통제를 강화하였는데 이 때 邑君과 邑長의 명칭이 보이고, 보다 구체적인 관작으로서 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등이 언급되고 있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여기서 귀의후·왕·읍군·읍장 등은 독립된 정치세력의 지배자에게 주어진 작호로 각 세력간의 정치적 위치를 감안하여 사여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중랑장·도위 등의 작호는 군태수와 비슷한 위계의 관직명이고 백장의 경우 더 하위의 직명으로, 이들 관작을 받은 존재는 독립된 정치세력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신지 이하에 예속된 읍차 등과 같은 통치체계의 하위 서열자들에 대한 사여로 이해된다. 특히 경북지역에서 발견된 ‘魏率善韓佰長’ 銅印과 ‘晋率善穢佰長’ 동인의 존재 그리고 평양지역의 ‘夫租穢君’ 동인 및≪삼국사기≫의 ‘濊王之印’ 등의 예를 볼 때 실제로 작호의 사여와 인수의 제공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071)백련행,<부조예군도장에 대하여>(≪문화유산≫2, 1962), 61쪽.

이순진,<부조예군무덤에 대하여>(≪고고민속≫4, 1964), 39쪽.
072)金貞培,<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앞의 책), 206∼207쪽.
073)岡崎敬,<夫租薉君銀印をめぐる諸問題>(≪朝鮮學報≫46, 1968), 49∼60쪽.

金基興,<夫租薉君에 대한 고찰>(≪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3∼34쪽.
074)金貞培, 앞의 글(1979), 229쪽.
07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07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弁辰.
077)Oberg, K., “Types of Social Structure among the Lowland Tribes of South and Central American”, American Anthropologist 57, 1955, pp.472∼487.
078)金貞培, 앞의 글(1979), 224∼225쪽.
079)金貞培,<「三國史記」에 보이는 ‘國’의 解析問題>(앞의 책), 223∼240쪽.
080)金正基,<無文土器文化期의 住居地>(≪考古學≫3, 1974).
081)일반적으로 군장사회의 인구 규모는 1만여 명 내외로 보고 있는데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 5만 명이나 되지만 군장사회 단계로 이해되고 있음에서 그 범위를 짐작케 한다. 이는 삼한의 대국 규모의 성격을 이해하는 하나의 자료로 이해될 수 있다(金貞培, 앞의 글, 1979).
082)金貞培, 앞의 책, 229∼230쪽.
083)金貞培, 위의 책, 230∼238쪽.
084)義昌郡에 편제된 音汁火縣은 婆娑王 때 음즙화국을 취해 편제한 것으로 후에 安康縣에 속하는 규모이며 臨皐郡에 배속된 臨川縣은 助賁王 때 骨火小國을 정벌해 대치한 것으로 그 규모가 군으로 대치할 수준이 못되는 소규모의 정치체였다고 생각된다. 신라가 주변세력을 복속시킬 때 沙伐國은 尙州로, 召文國은 義城郡으로 甘文國은 開寧郡으로 편제한 것과 비교할 때 그 규모가 소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085)金貞培,<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1978;앞의 책, 141∼166쪽).
086)金貞培,<劍·鏡·玉과 古代의 文化와 社會>(위의 책, 209∼222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