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1. 고구려의 기원
        •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1) 성립
            • (1) 나집단의 성장
            • (2) 나부체제의 성립
          • 2) 발전
            • (1) 국가체제의 정비
            • (2) 영역의 확대
      • Ⅱ. 고구려의 변천
        • 1. 체제정비
          • 1) 체제정비의 배경
          • 2)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 (1)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
            • (2) 율령반포의 의의
          • 3)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
        • 2. 영토확장
          • 1) 요동 방면
          • 2) 백제 방면
          • 3) 신라 방면
          • 4) 낙랑·대방군 고지
          • 5) 기타 지역
        • 3. 5∼6세기의 대외관계
          • 1) 중국의 남북조와의 관계
          • 2) 백제·신라와의 관계
        • 4. 후기의 정세변동
          • 1) 한강유역의 상실
          •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 Ⅲ. 수·당과의 전쟁
        • 1. 수와의 전쟁
          • 1) 수와의 관계
          • 2) 고구려의 요서 공격
          • 3) 수의 침입과 고구려의 살수대첩
        • 2. 당과의 전쟁
          • 1) 당과의 관계
          • 2) 초기 전쟁(645)
          • 3) 중기 전쟁(647∼665)
          • 4) 말기 전쟁(666∼668)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과 관직
            • (1) 초기 관등제와 관직
            • (2) 4∼7세기 관등제와 관직
          • 2) 합좌제도
            • (1) 제가회의
            • (2) 귀족회의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제도
            • (1) 초기의 지방통치제
            • (2) 「성·곡―촌」제의 성립
            • (3) 성단위 지방통치제
          • 2) 군사제도
            • (1) 군사조직의 변화
            • (2) 군사훈련과 병종
          • 3) 성곽시설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2) 조세제도
            • (1) 조(租)와 조(調)
            • (2) 부역
          • 3) 산업
            • (1) 농업
            • (2) 수공업
            • (3) 상업
            • (4) 목축업
        • 4. 사회구조
          • 1) 신분제
            • (1) 귀족
            • (2) 중·하급 지배층
            • (3) 호민
            • (4) 평민
            • (5) 노비
          • 2) 법률과 풍속
            • (1) 법률
            • (2) 풍속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 건국설화인 朱蒙說話는001) 백제나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복잡할 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전 주몽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廣開土王陵碑>의 서두 부분이고,<牟頭婁墓誌>와≪魏書≫고구려전의 주몽설화도 5세기경의 기록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나≪三國遺事≫·<東明王篇> 등 국내문헌은 5세기경의 기록에 후대적 윤색이 가해진 것을 전하고 있다.002)

 주몽설화는 부여의 東明說話에 바탕을 두고,003) 4세기 후반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건국설화로 확립되었다.004) 그리하여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한 주몽설화의 경우, 주몽의 出自를 비롯하여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전승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 줄거리는 대체로 비슷하다.005) 이들은 대체로 “天帝와 水神(河伯)의 혈통을 이어받은 朱蒙이 하늘신과 地母神으로부터 부여받은 神的 權能을 가지고 여러 곤경을 극복하고, 卒本地域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구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고구려왕들의 통치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주몽의 신적 권능 또는 주몽집단의 독자적 힘으로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 건국설화 서두 부분의 주몽설화는 매우 주목된다.

㉠ 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에 도착한 鄒牟(朱蒙)는 後嗣가 없던 졸본부여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즉위년조 서두 축약).006)

㉡ 백제 시조 沸流王의 아버지 優台는 북부여왕 解扶婁의 庶孫이고 어머니 召西奴는 졸본인 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은 뒤 과부로 지냈다. 扶餘에서 남하한 주몽이 건국한 뒤 소서노를 妃로 맞아들여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비류와 온조를 아들처럼 대하다가, 부여에서 孺留가 내려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위와 같음).

 위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방면에서 남하하기 이전부터 졸본지역에는 卒本扶餘나 召西奴集團 등 선주토착집단이 있었고, 주몽은 이들과 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고 한다.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일찍부터 토착세력의 성장, 이주민집단의 유입, 토착세력과 이주민집단의 결합이라는 정치적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주몽의 신적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건국된 것이다.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하는 주몽설화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시조의 신적 권능으로 신비화하였지만,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주체는 주몽집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압록강 중류일대 각지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선주토착집단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중류일대 토착집단의 성장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지역은 서북으로 요동지역, 동으로 동해안으로 통하는 동서 교통로상의 중간지점이다. 그리고 서남으로 황해, 남쪽으로 대동강·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 북쪽으로 松花江유역의 대평원지대나 遼河 상류방면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고구려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이 지역은 흔히 “큰 산과 깊은 골짜기는 많고 넓은 들은 없어” 고구려인들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하지만,007) 압록강과 그 지류 禿魯江·慈城江·渾江 유역에는 충적지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특히 國內城이 있는 通溝地域이나 五女山城이 위치한 桓仁縣 소재지는 상당히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기후는 만주일대에서 가장 온난하며 강수량도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한다.008)

 이러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청동기시대 이래 이 지역 주민들은 강 연안의 충적대지를 배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가축기르기·사냥·물고기잡이 등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009) 신석기시대 유적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나010) 청동기시대 주민과 동일 계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바닥이 편평한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돌도끼나 돌괭이 등의 농공구, 그물추, 돌활촉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생활양식은 청동기시대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두께가 얇은 돌괭이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신석기시대에도 농업의 비중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토기와 석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혼강 지류인 大葦沙河 연안의 二道崴子유적처럼011) 한곳에서 대량으로 토기와 석기를 제작하게 된다. 다양한 용도의 석기를 대량 생산함으로써 농업이 발전하였고 주민집단 상호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 청동기문화는 遼東∼靑川江의 古朝鮮文化나 송화강유역의 西團山文化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시대적 지역적 특성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토기의 모양새에 있어 양 지역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꼭지달린 바리모양 단지는 서단산자형 토기의 그것과 비슷하며,012) 고조선지역의 美松里型 土器가 중강군 토성리와 通化市 王八悖子에서 발견되었다.013) 이 지역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고조선 주민이나 부여를 이룬 송화강유역의 주민과 활발히 교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4·3세기경 중국 戰國·秦·漢 교체기에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전국 燕과 대립하다가 기원전 3세기초 연의 공격을 받고 요동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014) 이에 따라 전기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세형동검문화로 변화하였고, 철기문화가 요동과 한반도 서북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유이민 파동이 요동과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밀려왔다.015)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이러한 정세변화는 압록강 중류일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丹東地區와 桓仁·集安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세형동검 과도기 형식의 銅劍이나016) 철제농공구와 무기류를 공반하는 明刀錢유적을017)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 주민집단은 이러한 정세변화와 유이민 파동의 영향 아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독특한 묘제인 積石墓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적석묘의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는 압록강 중·상류와 대동강·청천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초기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018) 적석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매우 다양하지만,019) 단동지구와 집안·환인의 청동단검묘와 연결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020) 그 중 集安 五道嶺溝門의 청동단검묘는 계단적석묘로 보고된 이래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021) 일반적으로 적석묘에서는 청동제 장식품과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철제 농기구·무기·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었고,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에서는 전국·진·한 시기의 화폐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석묘는 대체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 과도기의 청동단검묘에서 기원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전국말∼진한초(기원전 3세기 중엽∼기원전 2세기초)로 추정된다.022)

 또한 독로강과 압록강 연안에는 적석묘 축조집단과 관련된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독로강변의 노남리유적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기철기시대층에서 冶鐵址와 온돌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었고 도끼·손칼·활촉·낚시 등의 철기와 함께 明刀錢·五銖錢이 출토되었다. 압록강변의 토성리에서도 신석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집자리가 발견되었다.023)

 이처럼 이 지역 주민집단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적석묘를 축조하면서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문헌상 늦어도 기원전 2세기 후반경에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024)

 종래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관련하여 濊·貊·穢貊 등의 명칭을 주목하여 왔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정설이 없는 형편이고, 특히 고구려의 종족기원에 대해서는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모두 제시되었다.025) 그러므로 현재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고 대체적인 상황만 파악할 수 있다.

 예·맥·예맥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고구려를 ‘貊’이라 표현한 것은 기원 이후의 중국사서에 집중되어 있다.≪漢書≫王莽傳에서 ‘高句驪侯 騶’의 집단을 ‘貊’ 혹은 ‘穢貊’이라 칭한 이래,≪三國志≫·≪後漢書≫등에서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퇴축을 ‘夷貊의 공격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여026) 句驪와 貊을 관련시키고 있다.≪三國志≫에는 “大水 유역에 나라를 세운 句麗는 大水貊, 서안평으로 흘러드는 小水에 사는 句麗別種은 小水貊”이라 하여027) 고구려를 명확하게 貊族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북방의 돌궐인도 고구려를 ‘매크리(Mökli)’ 곧 貊句麗라고 불렀다.028) 이처럼 기원 이후에 저술된 대다수 중국문헌이나 북방 유목민은 고구려를 貊族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貊’은 원래 중국북방에 거주하던 종족에 대한 명칭이었다. 이에 비해 발해만 동부지역은 先秦 시기에 대체로 ‘夷穢之鄕’ 곧 穢族의 거주지역으로 인식되었다.029) 예족 가운데 朝鮮이 가장 일찍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030) 그 뒤 夫餘·眞番·臨屯 등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史記≫에서는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치세력과 주민집단을 통칭할 때 ‘穢貊’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031) 원래 중국의 북방종족에 대한 명칭이던 貊이≪史記≫ 이후로 ‘예’라는 명칭과 결합하여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던 예족 일반에 대한 표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032)

 따라서 고고학 및 문헌자료상 중국 북방의 맥족과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을 직접 연결시킬 수 없는 한, 고구려가 처음부터 예족 혹은 예맥족으로 불린 주민집단과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맥족’이었다고 볼 수 없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원래 예족 혹은 예맥족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2세기초경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전 2세기 후반경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 주민집단은 처음에는 ‘句驪’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高句麗라는 국가명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貊’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렸던 것이다.

 고구려를 형성한 주민집단이 예맥족에서 분화하였다는 것은 3세기경 고구려의 언어와 법속이 부여·옥저·동예와 비슷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033) 그러므로 이 주민집단의 사회상태는 원래 예맥족의 일원인 동예나 옥저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3세기경 동예와 옥저는 각 邑落 長帥가 개별적으로 邑落民을 통제하였고, 동예는 生口·牛·馬 등의 부가 축적되었으나 ‘山川이 각 읍락별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를 받았다. 이는 생산력 발달이 상대적으로 낮고, 고조선 이래 한군현과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 원래의 사회상태가 존속된 결과이다. 고구려를 형성한 주민집단 역시 처음에는 이와 비슷하거나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가 더 강한 상태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余昊奎>

001)고구려 건국설화를 東明說話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朱蒙과 東明은 별개의 인물이고 고구려 건국설화와 부여 건국설화는 성립배경이 다르므로 이 글에서는 양자를 ‘朱蒙說話’와 ‘東明說話’로 구분한다.

李弘稙,<高句麗의 興起>(≪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84∼99쪽.
002)특히≪三國史記≫高句麗本紀 및<東明王篇>의 주몽설화에 나오는 북부여의 解慕漱說話와 동부여의 金蛙說話는 5세기 이후에 첨가되었다고 이해된다(島田好,<東夫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靑丘學叢≫16, 1934, 91∼94쪽).
003)≪梁書≫고구려전과≪隋書≫백제전 등은 동명설화와 주몽설화를 혼동하였다. 또 양자를 모두 고구려 건국설화로 보는 설, 동명설화는 주몽설화의 誤傳이라는 견해도 있다(리준영,<고구려의 국가기원에 대하여>,≪력사과학≫1964-4 및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004)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Ⅹ, 全南大, 1981).

徐永大,≪한국고대 神觀念의 社會的 의미≫(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213∼214쪽.
005)5세기의 기록은 (북)부여출자설이며, 국내문헌은 동부여출자설이다.

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3), 38∼43쪽.
006)≪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 割註에도 나옴.
00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008)吉林省文物志編委會,≪集安縣文物志≫(長春 ; 1983), 1∼4쪽.
009)리병선,<압록강 중·상류 및 송화강 유역 청동기시대 주민의 경제생활>(≪고고 민속≫1966-1), 8∼15쪽.
010)陳大爲,<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1960-1).

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吉林通化市江口村和東江村考古發掘簡報>(≪考古≫1960-7).

陳相偉,<吉林集安渾江中游的三處新石器時代遺址>(≪考古≫1965-1).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集安縣文物管理所, <吉林集安大朱仙溝新石器時代遺址>(≪考古≫1977-6).

정찬영,≪압록강·독로강유역 고구려 유적발굴보고≫(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3).
011)吉林省文物志編委會, 앞의 책, 32∼37쪽.
012)리병선,<압록강류역의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들과 그 분포정형>(≪고고민속≫1963-1), 25∼36쪽.
013)宋鎬晸,<遼東地域 靑銅器文化와 美松里型土器에 관한 考察>(≪韓國史論≫24, 서울大 國史學科, 1991), 43∼46쪽.
014)盧泰敦,<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관한 연구>(≪韓國史論≫23, 1990), 31∼54쪽.
015)≪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016)桓仁 大甸子 동검은 명도전 및 쇠칼과 함께 석곽묘에서 출토되었고, 丹東地區의 동검은 돌무지 중의 석관묘에서 발견되었다. 集安 五道嶺溝門의 동검은 계단적석묘에서 다량의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曾昭藏·齊俊,<桓仁大甸子發現靑銅短劍墓>(≪遼寧文物≫1981-1).

許玉林·王連春,<丹東地區出土的靑銅短劍>(≪考古≫1984-8).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發現靑銅短劍墓>(≪考古≫1981-5).
017)池炳穆,<高句麗 成立過程考>(≪白山學報≫34, 1987), 57∼60쪽.

손량구,<료동지방과 서북조선에서 드러난 명도전에 대하여>(≪고고민속론문집≫12, 1990).

田村晃一,<樂浪郡設置前夜の考古學>(≪東アジア世界史の展開≫, 汲古書院, 1994).
018)余昊奎,<高句麗 초기 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韓國史論≫27, 서울大 國史學科, 1992), 31∼34쪽의 도표와 지도.

田中俊明·東潮,<積石塚の成立と發展>(≪高句麗の歷史と遺跡≫, 東京 ; 中央公論社, 1995).
019)정찬영,<기원 4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5, 1973), 47∼54쪽.
020)박진욱,<초기 좁은놋단검문화의 내용과 발전과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87-1), 6∼9쪽.

田村晃一,<高句麗の積石墓>(≪東北アジアの考古學≫, 六興出版, 1990), 151∼155쪽.
021)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근거로 고구려에 선행한 노예제국가인 구려국이 기원전 5∼3세기경에 존재하였다고 상정하기도 한다(손영종,≪고구려사 Ⅰ≫,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13∼20쪽). 한편 이 무덤은 내부구조가 명확하지 않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고, 계단적석묘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魏存誠,<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1987-3, 328쪽).
022)적석묘에 대한 대표적 견해는 林永珍,<高句麗 考古學>(≪國史館論叢≫33, 國史編纂委員會, 1992), 110∼115쪽에 소개되어 있으며, 적석묘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주영헌,<고구려 적석무덤에 관한 연구>(≪문화유산≫1962-2).

정찬영, 앞의 글(1973).

李殿福,<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1980-2).

魏存誠, 위의 글.

田村晃一,<高句麗積石塚の構造と分類について>(≪考古學雜誌≫62-2, 1982).
023)정찬영, 앞의 책(1983).
024)이 책 제2장 1절 참조.
025)盧泰敦,<高句麗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東方學志≫52, 1986), 195∼196쪽.
02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東沃沮.
02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028)盧泰敦,<高句麗·渤海人과 內陸아시아 주민과의 교섭에 관한 일고찰>(≪大東文化硏究≫23, 1989), 239∼243쪽.
029)≪呂氏春秋≫恃君覽篇.
030)≪管子≫권 23, 輕重甲篇 및 揆度篇.
031)≪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032)三品彰英,<濊貊族小考>(≪朝鮮學報≫4, 1953).

황철산,<예맥족에 대하여>(≪고고민속≫1963-1·2).
03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濊·東沃沮.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