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왜와의 관계
1) 대왜관계의 시작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기본사료로는≪삼국사기≫와≪日本書紀≫가 있다. 하지만≪삼국사기≫와≪일본서기≫의 기록은 내용과 분량에 있어서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삼국사기≫에는 백제본기에 10여 개의 짤막한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며, 그것도 주로 4세기 말에서부터 5세기 전반기에 걸쳐서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한 백제의 대왜관계를 구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에≪일본서기≫에는 백제관계 기사가 80여 개조나 이르고 있어≪삼국사기≫보다 자료를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는 백제관계 기사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일본학계에서도 시인하고 있는 실정이다.≪일본서기≫는 고대 천황제국가 건설을 기념하여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이 천황가의 유구성과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지배의 정당성을 천명할 목적으로 편찬한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역사서이다.468) 그 결과 국내관계 기록이나 대외관계 기록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작과 왜곡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일본서기≫에서 백제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의 근거가 된≪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記≫라는 이른바 백제3서는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조정에서 일하던 백제사람들이 가지고 건너간 본국의 역사기록을 당시 사정에 의해 개서하고 수식하여 일본당국에 제출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469) 이들에 의해 제출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윤색되어≪일본서기≫에 인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일본서기≫의 백제관계 기록으로부터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한≪삼국사기≫의 내용과 양적으로는 풍부하나 내용상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일본서기≫의 내용을 사료비판을 통해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가장 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일치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아신왕 6년(397)에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한 것이470) 왜국과의 관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는 전지왕 원년(405)에 기록된 전지왕의 등극과정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471) 즉≪삼국사기≫는 4세기 말에 이르러 처음으로 왜국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아신왕대에 백제와 왜가 처음으로 접촉하였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때의 사실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에 대응하기 위하여 왜국과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일본서기≫에는 神功皇后 섭정 46년(246;고이왕 13;병인)부터 백제와 왜국의 접촉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신공황후 52년에는 백제에서 왜로 七枝刀와 七子鏡을 보내고 있어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일본학계에서 통설화되어 있는 바에 따라 간지 2운(갑) 120년을 내려 조정하면 백제의 근초고왕대에 해당하게 된다. 이곳에 실려있는 기사는 그 내용의 줄거리를 볼 때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서 일찍이 주목되어 온 바 있다. 따라서 신공기의 백제관계 기사를 일부 수정하여 취하면 당시의 백제사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472)≪일본서기≫의 상고기년이≪삼국사기≫의 것보다 120년 빠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내려 조정하면 적어도≪일본서기≫신공기가 백제의 근초고왕대에 해당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공기의 백제관계 기사의 내용은 근초고왕이 전남지방에 출정하여 이 지역을 경략하는 기록으로 이해되고 있다.473) 그러므로 백제는≪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아신왕대에 이르러 왜국과 처음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며, 이전인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와 왜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사에서 근초고왕대는 대외관계에서 주목되는 시기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21년(366) 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23년에도 또 보내어 진한의 통일세력으로 급성장한 신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태자인 근구수에게 고구려의 雉壤을 공격하도록 하고 그 후에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더구나 근초고왕 27년에는 중국의 晋에 공식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대중관계를 시작하는 등 백제가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근초고왕대의 신라·고구려·진과의 관계에 짝하여 대왜관계 또한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