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2. 성립과 발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1.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 1) 박혁거세 신화
          • 2) 석탈해 신화
          • 3) 김알지 신화
          • 4) 신라 신화의 특징
        • 2. 성립과 발전
          • 1)≪삼국사기≫초기 기록의 문제점
          • 2) 성립
            • (1) 사로 6촌의 위치와 성격
            • (2) 사로국의 형성
          • 3) 발전
            • (1) 내부체제의 정비
            • (2) 진한 소국의 복속
            • (3) 복속 소국에 대한 통제의 강화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1) 내물왕의 등장과 김씨 세습왕조의 성립
          • 2) 나제동맹의 결성
            • (1) 나제동맹 성립 이전의 대외관계
            • (2) 고구려의 남하와 나제동맹의 성립
          • 3) 마립간시대의 정치적 발전
            • (1) 왕권의 강화
            • (2) 축성사업
        • 2. 정치체제의 정비
          • 1) 배경
            • (1)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
            • (2) 사회의 변동
          • 2) 부체제
            • (1) 부
            • (2) 6부의 기원과 성립
            • (3) 부의 구조와 기능
            • (4) 부대표자 회의-화백
          • 3) 지증왕대
            • (1) 지증왕의 등장
            • (2) 국호 및 왕호의 개정
            • (3) 지방제도의 정비
          • 4) 법흥왕대
            • (1) 율령의 반포
            • (2) 군사제도의 정비
            • (3) 불교의 공인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1) 영토의 확장
            •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고구려와의 항쟁
            • (2) 가야의 병합
            • (3) 대지방민 정책
          • 2) 왕권의 강화
            •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 (3) 화랑도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1) 조공의 의미와 대중국 교섭의 전개
          • 2) 수 이전의 중국과의 관계
          • 3) 당과의 관계
          • 4) 대당사행의 유형
        • 2. 왜국과의 관계
          • 1) 시기 구분
          • 2) 4세기 후반∼5세기 초 왜국과의 관계
          • 3) 5세기 왜국과의 관계
          • 4) 6세기 전반 왜국과의 관계
          • 5) 6세기 후반 왜국과의 관계
          • 6) 대수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 7) 대당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 8) 당과의 군사동맹 강요와 왜국의 동향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과 관직
          • 2) 행정조직
          • 3) 화백회의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2) 군사조직
          • 3) 교통로 개척과 성곽시설
        • 3. 경제
          • 1) 농업
            • (1)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
            • (2) 수전의 확대
            • (3) 맥류 재배의 확산
          • 2) 수공업
          • 3) 상업
          • 4) 토지제도와 조세·요역제도
            • (1) 토지제도
            • (2) 조세·요역제도
        • 4. 사회구조
          • 1) 신라사회의 대본이 되는 골품제도
          • 2) 골품제도의 형성 배경
            • (1) 왕경 6부의 성립과 그 전개과정
            • (2) 율령의 수용과 신분층의 결정화 과정
          • 3) 골품제도의 계층 구성
            • (1) 골제-성골과 진골-
            • (2) 두품제
            • (3) 불완전한 사회성층의 지표-화랑도
          • 4) 골품제사회의 권력구조
            • (1) 경위제-골품제도와의 대응관계-
            • (2) 외위제―지방촌락사회의 계층구조―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1. 가야사 연구의 개관
          • 1) 가야사 연구의 전통
          • 2) 임나 문제의 제학설
            • (1) 임나일본부설의 성격
            • (2) 임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경향들
          • 3) 가야관계의 제학설
            • (1) 문헌사학 계통의 가야사 연구
            • (2) 고고학 계통의 가야문화 연구
        • 2. 가야사의 범위
          • 1) 가야의 명칭과 6가야
          • 2) 변한 및 임나와의 관계
          • 3) 가야사의 시기 구분
      • Ⅵ. 가야의 성립
        • 1. 가야의 풍토와 지리
        • 2. 가야의 건국 설화
          • 1) 가락국 수로왕 신화
          • 2) 대가야국 이진아시왕 신화
        • 3. 가야 제국의 성립
          • 1) 성립 배경
          • 2) 성립 시기
          • 3) 존재 형태
        • 4. 가야연맹의 형성
          • 1) 가야연맹의 성립
          • 2) 전기 가야연맹의 영역
          • 3)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1. 가야연맹의 발전
          • 1) 후기 가야연맹의 형성
          • 2) 대가야 세력권의 확립
          • 3) 후기 가야연맹의 영역
        • 2. 가야연맹의 약화
          • 1) 탁기탄국의 신라 투항
          • 2) 백제의 안라 걸탁성 진주
          • 3) 남가라국(금관국)의 신라 투항
          • 4) 백제의 구례모라성 축성과 안라 경영
        • 3. 가야의 멸망
          • 1) 대가야·안라 이원체제로의 분열
          • 2) 가야연맹의 자구노력과 백제 부용화
          • 3) 가야연맹의 신라 복속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 1) 4세기의 대신라관계
          • 2) 대백제관계의 시작
          • 3) 대야마토왜관계의 시작
          • 4) 대백제관계의 진전
        • 2. 대백제관계의 심화와 부용외교
          • 1) 신라·고구려의 침입과 대백제관계의 심화
          • 2) 야마토왜에 대한 군사기지 제공
          • 3) 백제군의 주둔
        • 3. 백제·신라의 각축과 분열외교
          • 1) 신라의 진출
          • 2) 백제의 직접지배 시도
          • 3) 가야의 멸망
      • Ⅸ. 가야인의 생활
        • 1. 산업의 발달
          • 1) 전기 가야의 산업
          • 2) 후기 가야시기
        • 2. 종교와 풍속
          • 1) 문헌에 보이는 가야의 종교
            • (1) 불교
            • (2) 유교
            • (3) 도교
          • 2) 가야의 신앙과 풍속
            • (1) 소도신앙
            • (2) 태양신앙
            • (3) 산악신앙
          • 3) 유물자료에 보이는 신앙과 풍속
            • (1) 장례 풍속
            • (2) 점복풍속
            • (3) 기타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1)≪삼국사기≫초기 기록의 문제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첫 왕인 赫居世는 기원전 57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의심하는 견해가 있었다. 고구려·백제에 비해 그 발전이 늦은 신라의 건국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신라 중심의 우월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혁거세가 즉위한 기원전 57년은 간지로 甲子年에 해당되는데, 이는 특히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의 첫번째 갑자년에 해당하는 까닭에 이는 讖緯說의 甲子革命說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赫居世居西干 다음의 南解次次雄이 즉위한 연대 또한 갑자년(A.D. 4)인 것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이뿐만 아니라≪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 신라본기에 한정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라본기에는 脫解尼師今代에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지역에서 백제와 전투를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탈해는 57∼80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에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에서 백제와 교전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백제가 이미 이 지역을 석권하였으며 신라 또한 이 지역에까지 세력권을 확대한 것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3세기 전반의 한반도 상황을 전하는 중국의≪三國志≫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당시 한반도의 중남부에는 辰王이 다스리는 目支國이 가장 큰 세력으로 馬韓의 50여 국을 통솔하고 있었고, 伯濟國은 마한 소국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사로국 또한 弁辰 소국들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을 뿐 다른 소국들에 비해 아무런 우위를 설명할 만한 자료가 없다. 또≪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비교적 신라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다고 생각되는 押督國(慶山)·伊西國(淸道) 등을 완전히 복속하지 못한 상태에서 百濟·樂浪·靺鞨·加耶 등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즉 압독국의 경우≪삼국사기≫ 地理志에는 祗摩尼師今 때에 伐取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 의하면 婆娑尼師今 23년(102)에 항복하였다가 逸聖尼師今 13년(146)에 모반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서국은≪삼국유사≫에 의하면 儒理尼師今 19년(A.D. 42)에 일단 항복하였으나 그 뒤 儒禮尼師今 14년(297)에 金城을 공격하여 크게 위협한 것을 보면 이들 소국에 대한 복속이 완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탈해니사금대(57∼79)의 백제와의 전투지역이 蛙山城(報恩)·狗壤城(沃川?, 槐山?)035)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伐休·奈解尼師今代를 거쳐 味鄒尼師今代(262∼283)까지 계속되고 있다.036) 경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서국·압독국에 대한 지배조차 확실치 못한 상황에서 백제와의 전투를 위해 충청도지역까지 군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037)

 또 탈해의 즉위에 관한≪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의 즉위 당시의 나이가 62세라고 하였는데, 같은 기사에서 그가 동해안의 阿珍浦에 도착한 것이 혁거세 재위 39년(B.C. 19)이라 하고 있다. 탈해가 즉위한 연도를 기준으로 그의 탄생년도를 찾아 보면 그가 즉위한 해가 서기 57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는 기원전 5년에 출생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출생하기 14년 전에 이미 동해안에 도착한 것이 된다. 이는 단순한 기록상의 오기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나, 이 이외에도 초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경우 100년이 훨씬 넘는 수명을 가진 왕들이 다수 나타나게 되는 등의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038) 또 초기에 보이는 靺鞨에 대한 기록은 말갈이란 종족 명칭이 6세기에 들어와서야 중국 문헌에 나타나고 그 거주지가 만주지역이므로 이를 기록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며, 유리니사금 32년(A.D. 55)에 6部의 명칭을 고치고 李·鄭·孫·裵·薛·崔 등의 姓을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이 시기의 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견해이다.

 과거 우리 역사를 이른바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일인 학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기 기록 전부를 불신하는 태도를 취하였다.039) 초기의 일본 학자 중에는 신라 말기에 神德·景明·景哀의 세 왕이 박씨 성을 칭한 까닭에 박씨를 김씨 왕통 이전에 존재한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으며, 여기에 다시 陰陽 三才사상에 입각하여 昔氏姓을 추가하여 3姓 세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040) 그 뒤에도 이러한 이론은 더욱 발달하여 법흥왕 이전의 22명의 왕 이름이 알(卵)·날(生)·불(火)로 분류되는 점과 특히 내물마립간 이전의 16명의 왕 이름이 대부분 내물왕 이후의 6명의 왕 이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물마립간 이전의 신라본기의 기록을 허구로 보기도 하였다.041)

 이러한 일본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반박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는데, 중요한 관점을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그 하나는≪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보이는 기록들은 紀年상의 문제점은 있으나 대체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초기 기록을 대체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불신론」또는「허구론」이라 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국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수정론」과「긍정론」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042)

 수정론에도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우선≪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三姓世系를 계기적인 것이 아니라 병렬적인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이는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기년상의 문제점을 일단 인정하고 이의 합리적 해석을 통하여 사료적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수정론의 선구적인 견해에 따르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계승적으로 되어 있는 박·석·김 3성의 세계는 실제로는 병렬적인 것으로, 부족연맹 시기에 실제 연맹장에 오르지 못한 자기 부족의 부족장들을 후대에 이들도 尼師今이었던 것처럼 인식하여 이사금의 대수가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史書의 편찬과정에서 奈勿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된 金氏世系와 내물 직전까지 이사금들을 배출한 昔氏世系는 기년상의 위치를 비교적 원형 그대로 두고, 석씨·김씨와 병렬적인 朴氏世系를 그 이전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전반적인 기년의 인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3성 세계를 병렬적인 것으로 고치고, 실제 이사금이 아니었던 인물들을 세계에서 제외한다면 사실과 가까운 紀年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祗摩·逸聖·阿達羅·助賁·沾解·基臨尼師今 등을 제외하고, 언어학적인 해석을 통해 박씨 세계 속에 끼어 있는 탈해를 기록상 그의 손자로 되어 있는 벌휴와 동일인물이라고 보아 세계에서 제외시켰다.043)

 또 최근에는 3성 세계 자체는 인정하고 왕들의 재위 연수만을 수정할 것을 주장한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백제와의 교전 기사가 탈해왕대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기년의 조정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기존 연구에서 탈해를 3세기 전반에 위치시킨 문제점을 지적하고, 3성 족단의 계보를 출생시기를 중심으로 역추적하여 탈해를 약 250년대로, 파사니사금은 260∼270년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044)

 이에 반해「긍정론」의 입장에 서는 학자들은 신라 왕통에 있어 박·석·김 3성 교립은 사실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 밖의 일반적인 기사도 대체로 파사니사금(A.D. 80∼113) 이후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는 해방 이후의 고고학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045) 긍정론의 대표적인 견해에 따르면 초기에는 朴氏系와 金氏系의 두 부족 집단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에서 박씨계의 세습적인 首長權이 성립·발전하였는데, 이것이 일종의 冶匠의 성격을 갖고 있는 탈해니사금(A.D. 57∼80)에 의해 한때 단절되었다고 한다.

 탈해는 冶鐵의 능력을 가진 자였으나 족적인 기반이 약하여 그 일대로 끝났으며, 뒤에 탈해의 후손을 자처하는 석씨계의 벌휴니사금(184∼196)이 박씨계를 대신하여 등장하였으나 이는 탈해의 후예가 아니라 실은 마한·백제세력에 밀려 한강 유역에서 忠州→報恩→小白山脈을 거쳐 마침내 경주에까지 이동해 온 이른바 진한세력으로 본다. 그리고 이 석씨계는 사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왕성한 정복력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3세기 중엽에는 사로국이 진한의 전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탈해대에 보이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투기록 또한 남하하는 진한세력과 백제세력 사이의 분쟁이 나중에 이렇게 기록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04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모든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신뢰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이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으나, 특히 기년상의 문제에는 아직도 상당히 커다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세론적으로는 수정론의 입장이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보이나, 이 또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본서에서는≪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서술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절충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035)蛙山城을 충북 報恩으로 비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나, 狗壤城은 충북 沃川(李丙燾,≪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12쪽), 또는 충북 槐山(千寬宇,≪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184쪽)으로 비정된다.
036)백제와의 전투기록은≪三國史記≫ 新羅本紀의 脫解尼師今 8년(64)·10년·14년·18년·19년, 婆娑尼師今 6년(85), 阿達羅尼師今 14년(167)·17년, 伐休尼師今 5년(188)·6년·7년, 奈解尼師今 4년(199)·19년·23년·27년·29년, 沾解尼師今 9년(255), 味鄒尼師今 5년(266)·11년·17년·22년조에 보인다. 미추니사금 22년(283) 이후에는 백제와의 전투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眞興王代(540∼575)에 이르러 다시 나타난다.
037)≪三國遺事≫ 王曆에는 “제16대 乞(訖)解尼師今…의 왕대에 백제병이 처음 來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여겨진다.
038)姜鍾薰,<新羅 上古紀年의 再檢討>(≪韓國史論≫26, 서울大, 1991), 7∼9쪽.
039)이 문제에 관한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崔在錫,≪韓國古代社會史方法論≫(一志社, 1987), 10∼263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040)前間恭作,<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つきて>(≪東洋學報≫15-2, 1925), 56∼82쪽.

池內宏,<新羅の骨品制と王統>(≪東洋學報≫28-3, 1941;≪滿鮮史硏究≫上世篇 2, 吉川弘文館, 1960, 557∼561쪽).
041)末松保和,<新羅上古世系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49∼115쪽.
042)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古代篇(一潮閣, 1982), 143∼147쪽.
043)金哲埈,<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歷史學報≫17·18, 1962), 151∼192쪽.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 학자로는 金光洙가 있다. 그는 朴·昔·金 3성의 계기적 계승을 사실로 인정하였으나, 朴氏世系 가운데 있는 脫解와 昔氏世系 속에 끼어 있는 味鄒의 경우에는 世系상의 위치를 의심하였다. 그래서 탈해와 伐休를 세계에서 제외시키고, 미추의 위치를 奈勿 직전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기년의 인하를 추구하였다. 또 奈解尼師今 초반의 12년과 미추니사금 초반의 10년, 訖解尼師今 후반의 36년을 제외시켜 전체적으로 70여 년의 기년을 인하시키고자 하였다(金光洙,<新羅 上古世系의 再構成 試圖>,≪東洋學≫3, 檀國大, 1973, 363∼391쪽).
044)姜鍾薰, 앞의 글, 1∼58쪽.
045)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관한 一考察>(≪東亞文化≫7, 1967), 1∼33쪽.
046)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 上 (≪韓國學報≫2, 1976), 18∼46쪽. 이 이외에도 긍정론의 입장에 서는 학자로 李鍾旭이 있다. 그는 儒理王代 이후의 기록은 그 기년을 인정할 수 있고, 赫居世와 南解代의 기록들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신라 국가 형성기의 모습을 복원하고자 하였다(李鍾旭,≪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1982), 4∼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