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1. 가야연맹의 발전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이후 5세기 가야지역의 유적 상황은 4세기 이전에 비하여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우선 패총 및 대형 목곽분 등이 다량 출토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남 해안지대에서는 5세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고분 유적의 수효가 줄어들고 규모도 소형 석곽분 정도로 위축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전기 가야연맹의 소멸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5세기 가야지역 중에서 고령·합천·거창·함양 등지의 산간 내륙지방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大形 墳丘墓(고총고분)가 나타나는 등 번성하였다. 묘제나 유물의 성격면에서 그들은 4세기 이전 진·변한 문화 공통기반을 계승하여 상호간에 현저한 유사성을 보였고, 신라문화권의 고분들과는 구별되었다. 이러한 유적 상황은 이 지역이 동일한 문화기반 밑에 있으면서 전반적인 경제력 및 지배권력이 크게 성장한 것을 반영한다.
원래 이 지역은 최상의 농업 입지조건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고 있으면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있다가, 전기 가야연맹 해체 시기에 이르러 경남 해안에 선진문화의 파급으로 철산지 등이 개발되면서 급속히 발전하였던 듯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고령 池山里 고분군의 출현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소형 석곽묘의 단계를 거쳐 점차 석곽과 봉분의 규모가 커져서 5세기 후반에는 봉토 직경이 50미터급의 단계에 이르는 대형 고총고분이 나타났으며, 출토 유물도 가야지역의 다른 고분군과 비교하여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많았다.
고령을 비롯한 가야 북부지방의 발전에 힘입어 차츰 가야 남부지방의 함안·창원·김해 등에서도 복구의 기운이 일어났다. 이 중에서 김해지역 고분의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신라 계통 유물이 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그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유물 성격은 낙동강 東岸 신라지역의 고분 유물과 분명히 구분되었다.
내부적으로 그러한 차이는 인정되지만, 위에 말한 가야문화권은 5세기 후반에 들어 고령·함양·함안·김해 등지를 포괄하는 지역에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되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고고학적 배경을 토대로 해서 가야지역의 추이를 다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