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8권 삼국의 문화Ⅱ. 불교와 도교1. 불교2) 백제의 불교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1. 고구려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 2) 조상숭배신앙
          • 3) 지신신앙
        • 2. 백제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 2) 조상숭배신앙
          • 3) 지신신앙
        • 3. 신라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 2) 조상숭배신앙
          • 3) 지신신앙
        • 4.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 2)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
          • 3) 토착신앙과 불교의 교대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1) 고구려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 (2) 교학의 발전
            • (3) 불교신앙
            • (4)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들
            • (5) 백제·신라에서 활약한 승려들
          • 2) 백제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 (2) 교학의 발전과 불교신앙
            • (3)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
          • 3) 신라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 (2) 불교공인의 실상
            • (3) 진흥왕대의 불교
            • (4) 미륵신앙의 양상
            • (5) 신라 불국토설의 내용과 대두 시기
            • (6) 중고시대의 고승
            • (7) 불교의 대중화
          • 4) 가야의 불교
        • 2. 도교
          • 1) 도교의 전래와 수용기반
          • 2) 도교사상
            • (1) 고구려
            • (2) 백제
            • (3) 신라
      • Ⅲ. 유학과 역사학
        • 1. 역사개념의 출현
        • 2. 유학과 역사학의 관련
        • 3. 삼국의 유학
        • 4. 삼국의 역사편찬
          • 1) 고구려
          • 2) 백제
          • 3) 신라
      • Ⅳ. 문학과 예술
        • 1. 언어와 문학
          • 1) 언어
            • (1)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
            • (2) 삼국 언어의 상호관계
          • 2) 시가
            • (1) 한국시의 생성과 노래의 집단성
            • (2) 창작적 노래의 출현과 민족의 발견
            • (3) 삼국의 시가와 한국시의 전통
        • 2. 회화
          • 1) 고구려의 회화
          • 2) 백제의 회화
          • 3) 신라와 가야의 회화
        • 3. 서예
          • 1) 고구려의 서예
          • 2) 백제의 서예
          • 3) 신라의 서예
        • 4. 조각
          • 1) 청동기시대의 조각
          • 2) 삼국시대의 조각
            • (1) 일반 조각
            • (2) 불교조각
        • 5. 공예
          • 1) 금속공예
            • (1) 금속공예의 종류
            • (2) 금속공예의 기법과 공예품
            • (3) 금속제 그릇들
            • (4) 삼국시대의 동경
          • 2) 유리공예
          • 3) 도자공예
            • (1) 고구려의 토기와 도기
            • (2) 백제의 토기
            • (3) 신라의 토기
          • 4) 목칠공예
        • 6. 건축
          • 1) 사원건축
            • (1) 고구려
            • (2) 백제
            • (3) 신라
          • 2) 궁실·연못
            • (1) 궁실
            • (2) 연못
          • 3) 성곽
            • (1) 고구려 성곽
            • (2) 백제 성곽
            • (3) 신라 성곽
            • (4) 가야 성곽
            • (5) 삼국 및 가야 성곽의 성격
        • 7. 고분
          • 1) 고구려 고분
            • (1) 적석총
            • (2) 봉토석실분
          • 2) 백제 고분
            • (1) 토광묘
            • (2) 토축묘
            • (3) 주구토광묘
            • (4) 적석총
            • (5) 석곽묘
            • (6) 옹관묘
            • (7) 화장묘
            • (8) 석실분
            • (9) 전축분
          • 3) 신라 고분
            • (1) 토광묘
            • (2) 석곽묘
            • (3) 적석목곽분
            • (4) 횡혈식 석실분
          • 4) 가야고분
            • (1) 토광묘
            • (2) 석곽묘
            • (3) 석실분
          • 5) 원방형분
        • 8. 음악
          • 1) 향악의 기원과 상고사회의 음악문화
            • (1) 한민족의 기원문제와 향악
            • (2) 상고사회의 음악문화
          • 2) 삼국시대의 음악문화
            • (1) 고구려
            • (2) 백제
            • (3) 가야와 신라
          • 3) 삼국시대의 해외음악활동
            • (1) 중국에서의 고려악
            • (2) 일본조정에서의 삼국악
        • 9. 무용·체육
          • 1) 무용
          • 2) 체육
            • (1) 무예
            • (2) 놀이
      • Ⅴ. 과학기술
        • 1. 한국 과학기술의 형성
        • 2. 고구려의 과학과 기술
          • 1) 하늘의 과학
            • (1) 천문도를 만들다
            • (2) 천문관측제도와 활동
            • (3) 기상 관측
          • 2) 산업기술 및 생활과학
            • (1) 고구려척과 축조기술
            • (2) 금속기술
            • (3) 연단술
            • (4) 도구와 기계장치
          • 3) 의약학
          • 4) 지도의 제작
        • 3. 백제의 과학과 기술
          • 1) 천문학과 역산학
          • 2) 지리학과 의약학
          • 3) 산업기술
            • (1) 농업기술의 혁신
            • (2) 토목기술
            • (3) 금속기술
            • (4) 요업기술
        • 4. 신라의 과학과 기술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를 세우다
            • (2) 천문기상 관측
          • 2) 의약학
          • 3) 산업기술
            • (1) 농업기술
            • (2) 금속기술
            • (3) 요업기술
            • (4) 그 밖의 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의생활의 기본구조
            • (1) 관모와 머리모양
            • (2) 저고리(유)
            • (3) 바지(고)
            • (4) 치마(상)
            • (5) 두루마기(포)
            • (6) 대
            • (7) 신(이·화)
          • 2) 고구려의 의생활
            • (1) 관모
            • (2) 의복
          • 3) 백제의 의생활
            • (1) 왕복
            • (2) 관인 복식
          • 4) 신라의 의생활
          • 5) 가야의 의생활
        • 2. 식생활
        • 3. 주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1. 선사시대 문물의 일본 전파
        • 2. 학문과 사상
        • 3. 역학·의약·기술
        • 4. 예술 문화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교학의 발전과 불교신앙

 漢城시대의 승려로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道琳이 보인다. 앞에서 기술한 바 있듯이, 그는 백제의 敗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의 승려였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백제에서는 불교전래 이후로도 면면히 불교를 숭상하였을 것이며, 아울러 승려들은 왕궁 출입에 크게 제한을 받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고구려 군사에 의해 蓋鹵王이 죽음을 당하자, 그 아들 文周王은 熊津(公州)으로 천도하였다(475).

 백제 승려로서 이름이 남아 있는 맨 먼저 인물은 發正이다. 그는 天監 연간(502∼519)에 梁나라에 건너가서 스승을 찾아 佛道를 배운 지 30여 년만에 귀국하였다. 발정이 중국에 있었을 때 越州界山에 관세음 堵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두 승려가 수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두 道人이 있었는데 서로 入山하기를 재촉하였다. 각각 골짜기 하나를 차지하여 한 사람은≪화엄경≫을, 또 한 사람은≪법화경≫을 독송하고자 하였다(≪觀世音應驗記≫).

 아마도 위의 두 경전은 백제에 수용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南中國에서 사용한「道人」이라는 칭호가 백제에서도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075)

 彌勒佛光寺事蹟에 의하면 백제승 겸익은 聖王 4년(526)에 인도에서 梵本五部律을 직접 가지고 돌아와 28인의 승려와 함께 번역하였다고 한다. 曇旭과 惠仁은 이에 대한 律疏 36권을 저술하였으며, 왕은 번역된 新律의 序를 썼다.076) 이 사료는 매우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겸익은 한국→남중국→인도에 이르는 해양 실크로드를 경유했을 것이다. 둘째 이때는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지 100여 년이 지난 때로서 불교교단의 팽창에 따라 새로운 律文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셋째 무령왕·성왕의 治世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백제가 한창 국가 중흥에 힘을 기울였고 새로운 문물을 적극 도입하던 때였으므로, 겸익은 국가에서 파견한 유학생일 것이다. 넷째 미륵불광사사적이 전하는 당시 백제의 사정이나 이웃 나라의 사정이 역사상의 제반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077)

 백제가 수도를 남쪽 熊津으로 옮긴 뒤부터 다시 성왕이 泗沘(扶餘)로 천도할 때까지(538) 웅진은 이 나라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절로서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약간 와전된 채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또 大通 원년 丁未(527)에 梁帝를 위하여 熊川州에 절을 지었는데, 이름을 大通寺라 하였다(原註-웅천은 공주인데 당시 신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丁未는 아닐테고 中大通 원년 己酉(529)에 세웠을 것이다. (법흥왕이) 정미년에 興輪寺를 세우고 아직 他郡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三國遺事≫권 3, 興法 3, 原宗興法).

 위 인용문은 신라 법흥왕의 崇佛 업적을 기술한 것인데, 당시 웅천주는 백제영토이므로 挾註가 틀린 것이다. 大通寺址는 공주시 班竹洞에 있는데, 대통 원년(성왕 5년)에 백제에서는 梁 武帝를 위하여 그 연호를 취해 절을 지은 것이다.078) 이외에도 웅진시대의 백제 사찰로서 그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는 먼저 水源寺를 들 수 있다.079) 이 절터가 공주시 玉龍洞에 있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080) 그리고 舟尾寺(공주시 주미동 절터골),081) 西穴寺(공주시 웅진동 쉬엿골-서혈동),082) 南穴寺(공주시 금학동 남산),083) 晩日寺(천안군 聖居面 성거산 中腹) 등이 있다.

 武寧王陵이 발견됨으로써 이 시절 불교신앙의 구체적 모습을 알 수 있게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무령왕비는 불교신자였고 淨土願生者였음이 그 木枕의 圖像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北魏 용문석굴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한다.084) 또한 무령왕릉은 華藏世界요 蓮花臺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여 왕릉을 造營한 성왕은 父王과 그 妃의 능을 극락정토로 꾸몄을 것이라고 한다.085) 그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능의 羨道와 玄室이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능이 하나의 극락정토임을 의미한다. 壁龕의 白磁등잔은 蓮花世界를 이루는 燃燈供養이며, 벽감은 寶珠形이니 곧 摩尼寶珠가 된다. 金製 귀금속의 새 모양은≪觀無量壽經≫에서 說한 極樂鳥로 볼 수 있다.

 6세기 전반 내지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유물로는 瑞山 普願寺址 출토 金銅佛立像과086) 禮山의 四方佛087)을 들 수 있다. 보원사지 금동불입상이 발견된 지점은 중국과 해상을 통하여 교류하던 泰安半島에서 부여로 가는 첫 길목이다. 그리고 백제 四方佛像은≪觀佛三昧海經≫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088)

 성왕 19년(541)에 왕은 使者를 梁나라에 파견하여 毛詩博士와 涅槃 등 經義와 工匠·畵師 등을 요청하여 이들을 제공받았다.089) 당시 중국에서는 열반경 교리에 밝지 않고는 행세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경이 유행하였는데, 그러한 학풍이 백제에 전해지자 특히 열반경 義疏를 청하게 되었다고 한다.090)

 熊州人 釋 玄光은 중국으로 건너가 陳나라의 南岳 慧思禪師(514∼577)에게서 法華 安樂行門을 은밀히 받고 精修하였다. 스승으로부터 印可를 받은 뒤 귀국하여 고향에서 법문을 크게 폈다.091) 법화 안락행문은≪법화경≫安樂行品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법화경 교리에 대한 이해나 講說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 證得한 자였다.092) 모든 고승전에서 그를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착오임이 분명하다.

 惠現(慧顯, 570∼627?)은 일찌기 출가하여 오직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법화경 讀誦을 業으로 삼았으며, 三論을 공부하기도 한 그에게는 靈應이 많았다고 한다.093) 현광이나 혜현을 통하여 우리는 백제시대 法華三昧의 실천적 경향을 볼 수 있다.094)

 이즈음 만들어진 불상으로는 鄭智遠銘金銅釋迦佛立像(보물 196호)이 있다. 불상의 造像例로 볼 때 백제에서는 미륵신앙도 적지 않게 유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위덕왕 31년(584)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지고 온 미륵석상 이외에도 부여의 扶蘇山 東部 建築址 및 定林寺址에서 滑石製의 半跏像 2軀가 발견되었다.095)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태안마애삼존불의 중앙 尊像 또한 미륵보살이며, 좌·우는 각각 釋迦·多寶佛이라고 한다.096) 그리고 서산의 마애삼존불도 중앙은 석가, 왼쪽은 관음, 오른쪽은 미륵반가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백제의 사찰 가운데 烏含寺는 창건의 사정(法王 또는 武王代)이 전해지는 드문 예에 속한다. 충청남도 保寧郡에 있는 聖住寺는 원래 백제의 오함사인데097) 같은 이름의 절이 일본 河內에도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백제의 오함사 관계자가 일본의 하내지방에 정주해서 그 곳에 氏寺를 세우고, 본국의 오함사를 모방하여 절 이름까지 동일하게 붙였기 때문이라고 한다.098)

 왕의 諡號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법왕은 신심이 돈독하였고, 불교 진흥을 위해 힘쓴 왕이었다.≪삼국사기≫의 다음 기사를 보도록 하자.

겨울 12월에 令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人家에서 기르는 매를 거두어서 놓아주었고, 고기잡는 도구와 사냥하는 도구를 불살랐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법왕 원년).

봄 정월에 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득도시켰다. 크게 가물었으므로 왕은 漆岳寺에 행차하여 기우제를 지냈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법왕 2년).

 위의 두 기사는 상호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 같이 보인다. 거의 같은 내용이≪삼국유사≫興法篇, 法王禁殺條에도 있다. 이에 대해서, 법왕이 내린 명령은 미륵신앙에 의한 계율이며, 그것은 미륵상생신앙의 요건으로서 법왕 당시 백제에서는 미륵상생신앙이 성행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왕이 이를 널리 펴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고 해석하는 이가 있다.099) 왕흥사를 미륵사와 동일시하는 사료가 있는가 하면,100) 부여군 규암면 新九里 절터를 왕흥사로 비정하기도 한다.101)

 ≪삼국유사≫武王條에 의하면, 무왕의 妃가 미륵사 건립을 발원하자 신라 진평왕이 工人을 보내어 원조해 주었다고 한다. 미륵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薯童說話의 해석 여하에 따라 무왕대,102) 武寧王代103) 또는 東城王代104)라고 각각 주장한다.105) 어떻든 미륵사가 완성된 후 그 규모와 경관이 어떠했던가는 다음과 같은 후대의 평가를 보아도 짐작이 간다.

석탑은 매우 커서 그 높이가 몇 길(丈)이나 된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33, 益山郡).

 미륵사의 창건이 彌勒佛國土 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은, 창건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실들이 다음과 같은 미륵경전에 보이는 彌勒下生信仰과 밀접한 대응관계를 보이고 있다는 데서 미루어 알 수 있다. 즉 도솔천의 미륵은 七寶臺內 摩尼殿上의 獅子床에 앉아 있다가, 땅이 金沙로 덮혀 있고 곳곳에 금·은이 쌓여 있는 翅頭城의 婆羅門家에 하생한 후, 龍華樹 아래에서 成佛하고 3回의 법회를 열어 중생을 제도한다. 미륵경전에 보이는 이러한 내용과 미륵사 창건 과정상의 내용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다. 獅子床은 知明法師가 살았던 용화산의 獅子寺와 대응되고, 미륵이 하생한 시두성의 금은 서동이 마를 캐며 “흙더미 같이 쌓아 놓았다”고 한 황금과 대응되며, 용왕이 있는 못은 용화산 아래의 大池와 대응되며, 용화수는 용화산과, 龍華三會는 龍華三會殿과 각각 대응되고 있다.106) 이렇게 볼 때 익산 지역은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이상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107) 그리하여 이곳에 미륵삼존불을 모신 거대한 사찰을 건립한 것은 미륵불국토를 건설한 것이었다. 王興寺의 준공에 대하여≪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왕 35년(634) 봄 2월에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물을 굽어보고 있으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泗沘時代의 유물 가운데 金銅龍鳳蓬萊山香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993년 부여 능산리의 집터를 발굴하던 중 금동향로와 각종 금속 유물 및 유리·구슬·토기를 비롯해서 기와 등 1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향로의 형태는 머리를 들어 올린 龍을 조각하여 받침을 삼고, 몸체는 연꽃 위에 솟아난 봉래산을 표현하였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신선의 세계를 표현한 博山香爐의 형식과 비슷하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 공예품의 진수라 할 만하다.108) 이외에도 부여지방의 출토유물을 통하여「何多宣藏法師」라는 僧名이 최근에 알려졌다.109)

 백제가 멸망한 해인 義慈王 20년(660)에 僧 覺從이 일본으로 파견된 것은 나당연합군을 반격하기 위하여 請兵하러 간 것이었다. 그 후로도 백제遺民들의 부흥운동은 집요하게 전개되어서, 승 道琛은 僧將으로서 領軍將軍을 자칭하고 왕족 福信과 더불어 일본으로부터 왕자 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고 周留城에 依據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이들 부흥운동군에게 敗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는 등 잇달은 內紛으로 주류성이 마침내 함락되어(663) 전후 4년에 걸친 부흥운동도 終幕을 고하게 되었다.110)

075)辛鍾遠, 앞의 책, 182∼183쪽.
076)李能和,≪朝鮮佛敎通史≫(新文館, 1918), 33∼34쪽.
077)小玉大圓,<百濟求法僧謙益とその周邊>上(≪마한백제문화≫8, 1985).
078)輕部慈恩,≪百濟美術≫(寶雲舍, 1946), 93쪽.
079)≪三國遺事≫권 3, 塔像 4, 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
080)金永培,<水源寺塔址調査>(≪百濟文化≫11, 公州師大, 1978).

秦弘燮,<百濟寺院의 伽籃制度>(≪百濟硏究≫2, 忠南大, 1971).
081)朴容塡,<舟尾寺跡>(≪百濟の考古學≫, 雄山閣, 1972).
082)金永培·朴容塡,<西穴寺跡>(≪百濟の考古學≫, 앞의 책).
083)≪南穴寺址≫(국립공주박물관, 1993).
084)吉村怜,<百濟武寧王木枕に畵かれた佛敎圖像について>(≪美術史硏究≫14, 1977).
085)史在東,<武寧王陵 文物의 敍事的 구조>(≪百濟硏究≫12, 1981).

趙載勳,<武寧王陵과 百濟의 宗敎>(≪百濟武寧王陵≫, 公州大, 1991).
086)李殷昌,<서산 용현리 출토 백제 금동여래입상>(≪考古美術≫9-7, 1968).
087)朴永福,<예산백제사면석불의 고찰>(≪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
088)文明大,<백제 사방불의 기원과 예산 石柱四方佛像의 연구>(≪韓國佛敎美術史論≫, 1987), 69쪽.
089)≪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

≪南史≫권 7 및≪梁書≫권 54.
090)金東華, 앞의 글, 68∼72쪽.

―――,<백제불교의 日本傳授>(≪百濟硏究≫2, 忠南大, 1971).
091)≪宋高僧傳≫권 18, 陳新羅玄光傳.
092)金煐泰,≪百濟佛敎思想硏究≫(東國大, 1985), 28∼31쪽.
093)≪三國遺事≫권 5, 避隱 8, 惠現求靜.

≪續高僧傳≫권 28, 釋慧顯.
094)삼국의≪법화경≫수용에 대해서는 福士慈稔,<朝鮮半島に於ける法華經傳播について>(≪大崎學報≫145, 1988) 참조.
095)黃壽永,<百濟半跏思惟石像小考>(≪韓國佛像의 硏究≫, 삼화출판사, 1973), 58∼59쪽.
096)文明大,<泰安 百濟磨崖三尊佛像의 新硏究>(≪佛敎美術硏究≫2, 東國大, 1995), 1∼25쪽.
097)洪思俊,<百濟 烏合寺考>(≪考古美術≫100, 1968).
098)田村圓澄,≪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吉川弘文館), 120∼124쪽.
099)洪潤植,≪三國遺事와 韓國古代文化≫(圓光大, 1985), 182쪽.
100)≪三國遺事≫ 권 2, 紀異 2, 武王.
101)秦弘燮,<百濟寺院의 伽藍制度>(≪百濟硏究≫2, 1971), 101∼102쪽.
102)黃壽永,<百濟帝釋寺址의 연구>(≪百濟硏究≫4, 1973).
103)사재동,<서동설화연구>(≪藏庵池憲英華甲紀念論叢≫, 1971).
104)李丙燾,<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105)金福順은 서동설화에 나오는 知命을 신라 진평왕 때의 大德 智明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신라에서 지명을 諜者로 백제에 보내어 미륵사의 大役事를 유도하고, 그것이 백제 멸망의 한 요인이었다고 하였다(金福順,<三國의 諜報戰과 僧侶>,≪伽山李智冠華甲紀念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伽山文庫, 1992). 그러나 자신의 本色을 숨겼을 智明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하는 등 의문이 남는다
106)金煐泰,<彌勒寺 創建 緣起說話考>(≪馬韓百濟文化≫創刊號, 1975).
107)洪潤植, 앞의 책, 213∼214쪽.
108)崔夢龍,<최근 발견된 백제 향로의 의의>(≪韓國上古史學報≫15, 1994).

溫玉成,<百濟의 金銅大香爐에 대한 새로운 해석>(≪美術史論壇≫4, 1996).
109)金容民,<扶蘇山城 東門址 出土 金銅光背>(≪美術資料≫57, 국립중앙박물관, 1996), 200∼209쪽.
110)安啓賢,<韓國佛敎史>上(≪韓國文化史大系≫6, 高麗大, 1970), 199∼200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