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자장
慈藏의 아버지 武林은 진덕왕대(647∼654)까지도 國事를 논의하였던 진골귀족이었다. 자장은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재상의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출가하였다. 선덕왕 7년(638) 唐 나라에 유학갔을 때 자장의 나이는 25세를 조금 지난 때였다. 당나라에 갔을 때나 귀국할 때 唐 太宗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자장이 유학한 데에는 국가적으로 對唐 외교사절의 일면도 있었을 것이다.
자장은 중국에서 먼저 法常을 찾아뵙고 보살계를 받았으며,165) 終南山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 당시 종남산에는 중국 계율종의 宗主인 道宣이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자장이 도선과 상면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자장의 저서에≪四分律羯磨私記≫·≪十誦律木叉記≫등이 있다는 사실로 보아 도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장과 도선과의 法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데,166) 그것은 자장전에 나오는 설화를 그대로 믿어 자장의 나이가 도선보다 훨씬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장은 귀국하여(643) 궁중에서≪攝大乘論≫을 강의하였고, 황룡사에서는≪菩薩戒本≫을 강의하였다. 자장은 大國統에 임명되어 승려의 규범을 바로잡고, 지방 사찰을 다니며 계율을 지키도록 일깨워주었다. 이즈음에 이르러 나라 사람 가운데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자가 10명 중 8, 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계율 尊崇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僧團에는 出家得度나 儀式에 있어 일정한 규범이 필요하였고, 동시에 그러한 계율이 만들어진 의의를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교 수용 당시 중국에서는 계율을 글자 또는 의미가 유사한 禮나 律로 인식하였다. 중고시대 신라에서도 국가나 사회적으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인격자인 승려에게 어떠한 규율의 지침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다. 원광에게 세속의 계율을 얻어듣고자 한 것도 그러한 예이지만,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많은 백성이 계를 받도록 한 것도 禮俗의 진작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자장의 저서에≪阿彌陀經疏≫와≪阿彌陀經義記≫가 있는 것을 볼 때, 정토교에 대한 관심 또한 컸음을 알 수 있다. 자장을 화엄사상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후대에 점차 나타나고 있는데, 어떻든 그를 어느 한 종파로 국한시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교종파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활동면을 함께 보면「律師」라는 전통적 호칭은 타당하다.
자장은 불국토인 신라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고자 태백산·오대산 등지를 순례하였다. 이것은 감통을 중시하는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절대적인 신앙에 귀의함이 없이는 계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도선의 태도와 서로 통한다. 자장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戒壇을 쌓았다. 그리고 중국의 衣冠을 입고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건의하는 등 구체적인 事大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