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중국 역사서의 기록과 삼국 언어의 상호 관계
삼국 언어의 상호 관계에 대한 견해는 현전하는 언어자료에 의한 것보다는 주로 중국 역사서의 기록의 해석에 근거하여 피력되어 왔다. 기본적인 문제는 삼국 언어의 동일 여부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상이한 견해들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고구려어는 부여계, 신라어·백제어는 韓系 언어로 같은 계통이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다른 언어였다.294) ② 고구려어는 南下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는데, 남하이전의 고구려어는 퉁구스어계통이고, 남하 이후는 백제·신라와 같은 언어였다.295) ③ 삼국의 언어는 같은 언어였다. 단 방언적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296) ④ 고구려는 古아시아(Paleo-Asiatic)종족의 한 派로서, 퉁구스족과 접촉으로 퉁구스化되었던 민족이다.297)
대략 이상과 같은 견해들의 1차적인 근거는 중국의 正史類 列傳의 일부로, 주로≪後漢書≫(권 85, 東夷列傳),≪三國志≫(魏書 권 30, 烏丸鮮卑東夷傳),≪梁書≫(권 54, 諸夷 東夷),≪魏書≫(권 100, 列傳),≪周書≫(권 49, 異域傳)의 기록이다. 대략 기원 전후로부터 2∼3세기에 걸친 시대에 해당하는 기사 내용들에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가장 먼저 이루어진≪三國志≫(기원 280년부터 편찬)를 다른 역사서의 편찬자들이 참고하고,298) 후대의 사실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관계 기사들을 발췌하여 보이면 아래와 같다.
①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와 제반사가 부여와 많이 같다(≪三國志≫·≪後漢書≫).
② 東沃沮는 언어가 고구려와 대개는 같으나, 간혹 조금씩 다르다(≪三國志≫).
③ 동옥저는 언어·음식·거처·의복 등이 고구려와 유사하다(≪後漢書≫).
④ 濊는 언어 법속 등이 고구려와 대개 같다(≪三國志≫).
⑤ 挹婁는 사람의 모습이 부여와 비슷하지만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같지 않다. 옛날 肅愼씨의 나라이다(≪三國志≫).
⑥ 읍루는 옛날 숙신의 나라이다.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비슷하지만, 언어는 각각 다르다(≪後漢書≫).
⑦ 勿吉國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 옛날 숙신국이다. 언어가 독특하게 다르다(≪魏書≫).
⑧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들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말로 옛날 사람들이 秦(始黃帝)의 노역을 피하여 韓國으로 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한은 동쪽의 경계 지역을 나누어주었다. 城柵이 있고,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 國(나라)을 邦, 弓(활)을 弧, 賊(도적)을 寇라 하여 진 사람(언어)과 비슷한 점이 있다(≪三國志≫·≪後漢書≫).
⑨ 弁辰은 진한과 섞여 살고 있으며, 성곽도 역시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고, 언어와 법속도 서로 비슷하다(≪三國志≫).
⑩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며 성곽·복장 등이 모두 같다. 언어와 풍속에 다름이 있다(≪後漢書≫).
⑪ 백제는 그 선조가 東夷이다. 오늘날 언어와 의복 등이 대략 고구려와 같다(≪梁書≫).
⑫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류다. 辰韓은 秦韓이라고도 한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 秦 시대에 사람들이 노역을 피하여 마한에 와서 정착하였고, 마한은 그 동쪽 경계지역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들이 秦 사람이기 때문에 秦韓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언어와 사물 이름은 중국인들과 유사하다. 國(나라)을 邦, 弓(활)을 弧, 賊(도적)을 寇라 하여 마한과 같지 않다. (중략) 진한에는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더 작게 나뉘어 12 나라가 되었고, 신라는 그 중 하나이다. (중략) 신라의 拜禮와 행동거지는 고구려와 같은 종류이다. 문자가 없고 나무에 새겨 信表를 삼았다. 언어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넣고서 통할 수 있다(≪梁書≫).
⑬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었다. (중략) 왕의 성은 夫餘氏이고 호는 於羅瑕, 백성들은 鞬吉支라고 불렀는데 중국 말로 둘 다 王이란 뜻이다. 왕비는 於陸이라 부르고 중국말로 妃란 뜻이다(≪周書≫).
이상 13개항에 발췌된 기사들이 지금까지 삼국 언어를 연구한 논저들에서 대부분 반드시 인용되고 다양하게 해석되었던 중국 역사서 기록을 대개 망라한 것이다.
①∼④의 기사는 부여·고구려·동옥저·濊의 언어가 같았다는 근거가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었다. 이 언어들을 흔히 부여계 언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 부여계 언어가 韓系와 같은 계통인가, 퉁구스어 계통인가에 차이가 있었다.299)
⑤∼⑦은 숙신·읍루·물길(靺鞨)이 같은 언어였다는 근거가 되었고, 이들을 숙신계 언어라고 불러왔다. 물길은 앞의 둘 보다 훨씬 후세에 등장하는 族名이다. 이 숙신계 언어를 퉁구스계로 보는 견해와, 古아시아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하간에 우리 민족의 언어와는 직결되지 않는 언어로 인정한다.
⑧∼⑬이 三韓 지역에 존재하였던 나라(國)들에 관한 기록으로, 선후 문헌에 모순되는 내용도 있고 문면 그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서, 다양한 설명과 해석이 이루어졌던 기사들이다.
우선 ⑧과 그것을 참고로 기술한 것이 분명한 ⑫에서, 진한의 언어는 중국의 秦나라에서 유입한 사람들의 언어로 인접한 마한의 언어와 달랐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기사를 ‘辰’과 ‘秦’의 동음성에서 기인한 중국인의 作爲에 의한 것으로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또 실제로 발생하였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견해도 있었다.300) 여하튼, 진한의 원주민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언어를 지칭한 것이라면, 삼국 언어 상호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⑨에서 변진과 진한의 언어가 비슷하다고 하고, ⑩에서는 다르다고 설명하여 모순이 된다. 이에 대하여 방언적 차이가 있는 두 언어를 차이에 초점을 맞추면 ⑩, 공통성에 초점을 맞추면 ⑨의 설명이 된다는 설명이 있고,301) ⑩은 ⑨를 참고하고 전재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전후 문맥의 비교에 의해서 ⑩의 오류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설명도 있다.302) 그리하여 ⑨는 변진과 진한이 同族이었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303)
⑪은 백제어가 고구려어와 같았음을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을 ⑬과 결부하여 고구려어와 백제 지배족 언어에 관한 기술로 추측하기도 하고,304)≪梁書≫의 편찬 시기가 7세기 초반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구려가 한반도 이북 지역으로 남하한 후의 언어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305) 기기의 문면 그대로 해석하여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같았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하기도 한다.306)
⑫의 끝부분에 보이는 “(신라의) 언어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두고 통할 수 있다”는 기사는 신라어와 백제어의 동일성을 확인시켜주는 근거로 지적되어 왔다.307) ⑬은 백제의 지배층(부여계) 언어와 피지배층(마한계) 언어가 달랐음을 시사하는 기록으로 언급되어 왔다.308) 그러나, 이 기사에서 언급한 지배층의 호칭이 고구려어라는 근거가 없고, 같은 언어 내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어휘는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다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백제어와 고구려어가 달랐다는 근거로 채택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309)
294) | 李基文, 앞의 책의 견해로, 1960년대 초 이래 여러 논저에서 피력되었고, 여러 국내학자들이 수용하여 왔다. 일본어를 부여계에서 분파해 간 것으로 추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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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 金芳漢교수의 소론으로 역시 60년대 후반부터 여러 논저에서 피력되었다. 가장 최근의 저술은 金芳漢,≪韓國語의 系統≫(民音社. 1983)이다. |
296) | 김수경, 앞의 책. |
297) | 河野六郞 等,≪三國誌に記された東アジアの言語および民族に關する基礎的硏究≫(平成 2·3·4年度 科學硏究費補助金 一般硏究(B) 硏究成果報告書. 1993)에서 발표한 견해이다. 그러나 1945년에 발표된 河野의≪朝鮮方言學試攷≫에서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언어상황을 ‘남부:일본어계’와 ‘북부:부여어계’로 구분하고, 일본어계에 일본어와 韓語(변진·진한·마한 방언, 후에 신라어로 통합), 부여어계에 예맥·옥저·부여어가 통합된 고구려어를 포함시키는 도표를 제시하였다. 그 즈음부터 일본 학계에서 고구려를 퉁구스의 일파로 보는 견해들이 여럿 발표되었다고 한다. |
298) | 우리 나라 고대사에서 빈번히 언급되는≪三國志≫는 西晉의 陳壽(233∼297)가 280년에 편찬하기 시작한 魏·蜀(漢)·吳 세 나라의 紀傳體 역사서이다.<魏書>30권,<蜀書>15권,<吳書>20권, 총 65권으로 이루어졌다. 後漢이 멸망하고 三國이 각축하던 기원 220년으로부터 28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三國志≫의 권 30이<魏書>의 마지막 권으로<烏丸鮮卑東夷傳>이다. 우리 나라 학자들이 보통 축약하여<魏志東夷傳>이라고 불러온 것이다.≪삼국지≫에 편입된<魏書>외에 다른≪魏書≫가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앞의 것을 흔히<魏志>로 불러왔다. |
299) | 李基文 교수 등이 韓계와 같은 계통으로 보고, 河野六郞 등 주로 일본 학자들이 퉁구스계로 본다. |
300) | 李基文, 앞의 책, 69쪽에서 이 기사를 ‘作爲’로 본다. 河野六郞은 이 기사를 역사적 사실의 전승으로 본다. 그에 대해서는 安秉禧, 앞의 글(1987), 999쪽 참고. |
301) | 李基文, 위의 책, 69쪽 참고. |
302) | 安秉禧, 앞의 글(1987), 999∼1000쪽 참고. 김수경, 앞의 책, 22∼23쪽에서는 우선 李基文교수의 견해를 인용하고, “같은 언어에 대한 방언적 차이의 강조 혹은 기록상 착오”로 설명하였다. |
303) | 河野六郞, 앞의 책, 17쪽 참고. |
304) | 이기문, 앞의 책, 70쪽 참고. |
305) | 安秉禧, 앞의 글(1987), 1000쪽에서 金芳漢의 책을 인용하면서 설명하였다. |
306) | 김수경, 앞의 책, 17∼18쪽 참고. |
307) | 지금까지 이 기사를 인용한 논저에서 대개 같은 견해들이다. 대표로 安秉禧, 앞의 글(1987), 1001쪽 참고. 그러나, 이것은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신라어와 백제어는 달랐지만 백제에는-지리적 여건 때문에-신라어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중국 사람이 신라인과 통하려면 백제인을 통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宋基中,<書評:金芳漢, 韓國語의 系統>,≪國語學≫13호, 1984, 273쪽 참고). |
308) | 원래 河野六郞이 발표한 것을 李基文교수 등 우리 나라 학자들이 수용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李基文, 앞의 책, 70쪽;安秉禧, 앞의 글(1987), 1001쪽;河野六郞, 앞의 책, 29쪽 참고. |
309) | 金芳漢, 앞의 책;김수경, 앞의 책, 18∼21쪽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