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언어의 일반적 속성과 삼국 언어의 상호 관계
언어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항상 변화한다. 몇 년 혹은 몇 십년 동안에 전혀 다른 언어로 변하지는 않지만, 몇 백년 혹은 몇 천년의 기간에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언어로 바뀐다. 60년 전 대중의 인기가 높았던 춘원 이광수의 소설들에는 오늘날의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단어와 표현방식이 다수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는 읽고 이해하기에 과히 어렵지 않다. 그러나 100년 전에 발행된≪독닙신문≫은 순한글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고, 400년 전에 창작된≪홍길동뎐≫은 더욱 어렵다. 550년 전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에 간행된≪龍飛御天歌≫의 국문시가를 현대인들이 보통 시집을 읽듯이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래된 글일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국어의 변화 정도가 시간에 비례하여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언어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같은 언어라도 계속 접촉하지 않으면 상호 소통되지 못하는 다른 언어로 분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행정, 혹은 상업, 혹은 종교적 이유로 자주 접촉하는 인간의 집단, 즉 사회는 규모와 지역의 대소에 관계없이 언어의 분화 정도가 낮았던 반면에, 다른 사회와 접촉이 없었던 사회들은 각각 상이한 언어 집단으로 발전하여 언어의 높은 분화를 가져 왔다. 이러한 현상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예가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제도에 산재하는 수천 개의 언어들로, 고립된 생활을 지속하는 부족들의 언어이다. 이들 언어들의 사용자들은 각각 수백 혹은 수천에 불과하다.310) 다른 예로 중국은 전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고 인도가 그 다음인데, 중국에서는 중국어 방언이라고 지칭하는 언어가 오직 6∼7종(소수민족의 언어가 50종) 존재한다. 그와 반면에 인도에서는 적어도 250종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공용어만 해도 15종이다. 이 현상은 중국이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채택하여 온 반면, 인도는 그렇지 않았던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요약 소개한 삼국 언어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은 모두가 19세기에 유럽에서 발전되었던 역사비교언어학에서 제시되었던 ‘언어 발달의 모형’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모형은 다윈의 進化論을 圖示하여 단세포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과정의 발달과 진화과정을 보여주는<種의 進化圖>와 유사하게 그리며, 系統樹圖라고 부른다.
이 계통수도에서는 모든 언어가 單線的으로 발달한 모습만 보여준다. 위 그림에서 보면, A·B·C 언어는 W, D·E 는 Y의 분화에 의하여 형성된 언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A·B·C와 D·E 는 각각 親族관계에 있는 언어라고 부른다. 이것을 국어에 적용하면, 현대국어의 조상언어는 삼국시대의 언어이고, 삼국의 언어는 단일어 혹은 계통을 달리하는 2∼3종의 언어 중에서 어느 하나이지 복수 언어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온 언어가 아니라는 전제이다.
이러한 언어 발달의 단선적 모형은 19세기 중엽 등장할 때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었다. 언어는 생물과 같이 독립된 種屬으로 존재하며 자체의 유전인자에 의하여 種性이 유지되는, 즉 생물학적 기능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는 점-생물은 일단 분화하면 다른 種과의 접촉에 의한 종성의 변화는 다시는 있을 수 없는데-과 언어는 분화된 후에도 다른 언어와 접촉에 의한 영향으로도 계속 변화한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그리하여, 언어의 다면적 접촉에 의한 변화, 가까이 있는 언어로부터는 다수의 영향을 받고, 멀리 있는 언어로부터는 적은 영향을 받으면서 언어가 변한다는 통칭 波狀說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흔히 발생하였던 언어 분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어느 시대에 A, B, C, D, E, F, G, H…라는 언어들이 어느 지역에 A-B-C-D-E-F-G-H…과 같이 분포되어 있을 때, 인접한 언어들은 유사성이 많아 상호 통할 수 있는 언어이지만, 멀리 떨어질수록 유사성이 적어져서 불통하는 언어이다. A와 B, B와 C, C와 D…는 상호 통할 수 있는 아주 유사한 언어들이었으나, A와 F, B와 H 등은 현격히 다른 언어였다. 어떤 시점에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로 A-B-C가 A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통합되어 A 언어로 통일되고, E-F-G-H가 G로 통일되었을 때, 본래 점진적으로 차이가 있던 언어군은 현격히 다른 A와 G, 2개의 언어로 통폐합된다.
‘언어’와 ‘방언’은 그 명확한 한계를 긋기가 어렵다.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는 상호간에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는데 상이한 언어로 취급하고, 북경어와 광동어는 상호 불통인데 같은 중국어의 방언으로 취급한다. 즉, 언어와 방언의 구분은 언어학적 구분보다는 의식적 구분에 의하여 규정되는 면이 강하다.
이상 약술한 언어의 일반적인 속성에 비추어 삼국의 언어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삼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어떤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수립되지 않았었다면, 상호 간에 차이가 있는 언어 집단이 다수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고, 그것이 삼국의 출현과 더불어 소수의 언어 집단으로 통합되었으며, 그것이 삼국의 통일로 다시 단일 언어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경우에나 언어의 통합은 일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삼국의 출현과 더불어 언어의 집단이 소수로 통합될 때,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다수 집단 중 어느 집단의 언어를 중심으로 통합되었을 것이지만, 개별 집단의 언어의 영향은 통합 언어에 남았을 것이고, 삼국이 통일되어 다시 언어의 통합이 일어날 때, 이전 삼국 언어의 영향이 통합 언어에 영향을 남겼을 것임은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 삼국 출현 이전의 여러 나라(國)들의 언어나, 삼국통일 이전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에 어떤 정도이든 차이가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차이가 방언적 차이인지, 언어적 차이인지 구분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한다. 설혹, 충분한 언어자료가 현전한다고 가정해도, 그것이 방언적 차이인지, 언어적 차이인지 따지는 일은 또 다른 문제이다.
삼국의 언어에 대하여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전하는 언어자료에서 삼국 공통의 어휘항들을 발견할 수 없어 삼국 언어 상호 간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 삼국 언어자료에서 확인되는 단어들의 일부가 중세국어 내지 현대국어 단어들과 비교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삼국이 정치적으로 통일됨에 따라 언어의 통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 그것은 언어의 일반 속성에 부합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의 단편적 기록에 의하여 삼국 언어의 상황이나 상호 관계를 왈가왈부하는 일은 처음부터 사변적일 수밖에 없었고, 확증적 결론은 누구도 제시한 바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宋基中>
310) | 오늘날 세계에는,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르지만 5천 내지 7천 종의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고 그중 1백만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불과 130여 종에 불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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