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회화
선사시대와 고대 초기의 회화가 집단의 豊饒와 多産,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며 열리던 呪術的 祭儀의 산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蔚州 盤龜臺 巖刻畵나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대전 槐亭洞 출토 청동기의 農耕文은 우리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회화 겸 주술표현의 좋은 사례이다(<그림 1>). 정치와 종교 등 사회 제분야 및 직업의 분화가 뚜렷해지고 농경·목축경제가 보다 안정화되는 삼국시대에 이르면 회화에 부여되던 주술적 의미는 이전보다 약화된다. 반면 회화에는 실용성, 장식성이 짙게 가미되며, 회화 표현기교의 발달 또한 두드러지게 된다. 삼국시대의 말기에 이르면 이러한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화에 개인의 독특한 미적 감각이 담겨지게 된다. 이것은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제반 사회활동이나 생산작업이 점차 마을이나 씨족이 아닌 대가족이나 개별 家戶, 혹은 개인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게 된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회화활동 및 작품에 실용성, 더 나아가 감상성이 부여되면서 회화의 표현대상과 기법은 보다 확대되고 세련되어진다. 풍요와 다산을 비는 주술제의와 관련된 상징적 기호나 동·식물이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존재로 바뀌며, 진기한 동물과 기이한 화초, 자연풍경과 일상생활, 인물이 회화의 새로운 대상으로 더해진다. 회화의 표현방식도 다양해지고 재료 및 도구 또한 눈에 띄게 발달한다. 회화 속의 동·식물과 인물·가옥·山水는 이전처럼 각기 독립적으로 나열되거나, 정지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며, 특정한 상황을 연출하는 존재들로 그려지게 된다. 암벽을 갈거나 쪼아 대상을 간결하게 표현하던 선새김그림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먹과 색안료를 이용하여 돌벽이나 회벽·나무벽·가죽이나 나무판·비단이나 종이 등에 대상의 세부적 특징까지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또한 널리 퍼지게 된다.
회화 자체에만 몰두하는 전업화가가 출현하는 것도 삼국시대이다. 씨족의 주술담당자에 의한 呪術畵나 익명의 화가집단에 의한 실용화가 전업화가의 출현에 의해 예술성이 짙은 감상화로 변화해 가는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회화작품에 화가의 개인적 창의성이나 美感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이며 삼국시대 회화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당대인의 종교관과 내세관, 혹은 일상적 기원을 담은 공예적 그림이었다.
삼국시대의 회화로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매우 적다. 그나마 남은 회화작품의 종류와 수량도 삼국 사이에 편차가 심하여 각 나라별로 회화 표현기법 및 방식의 변화와 발전과정을 밝히기는 힘든 형편이다. 그러나 한정된 자료로나마 삼국시대 회화를 살펴보면 나라마다 독특한 개성을 담아 발전시켜나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힘과 긴장감, 백제의 여유와 부드러움, 신라의 고요와 엄격성은 이들 나라의 자연환경과 사회조건, 곧 생활풍토와 民의 기질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