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5세기의 불상
4세기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해졌던 당시에 만들어졌을 불상의 모습에 참고가 되는 중요한 상은 서울의 뚝섬에서 출토된 5cm정도 크기의 금동여래좌상이다(<그림 4>). 두 손을 포개어 禪定印을 하고 앉아 있는 이 금동여래좌상은 두 어깨를 덮는 通肩의 법의를 입었고 옷주름은 몇 줄의 U형 주름으로 늘어져 있으며 네모난 대좌의 양쪽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정면으로 앉아 있다. 이러한 형식의 불좌상은 중국에서는 東晋 말에서 北魏 초기인 4세기말∼5세기초에 유행하며 이 무렵에 고구려나 백제에 전해진 불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뚝섬불상이 출토된 한강 유역은 지역적으로 보면 옛 백제의 땅에 속하나 불상 양식으로 보면 5세기초의 北魏 불상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동경예술대학교 자료관에 있는 북위의 금동불좌상이나 大阪市立美術館의 大夏勝光二年(429)銘의 금동불좌상과 비교가 된다. 이로 보아서도 이 뚝섬상은 중국 북방의 나라와 관련이 깊었던 고구려의 상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중국에서 가져온 상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불교 수용 초기 4세기 말 내지 5세기의 고구려와 백제 불상의 모습은 이와 비슷한 형상이었을 것이다.
이 뚝섬불상과 같은 禪定印의 불좌상 형식이 불교수용 초기 고구려에서 유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또 만주 集安의 長川 1호고분의 前室 동측 천정 고임돌에 그려진 예불공양도에서도 뒷받침된다.
1981년에 처음 중국 학술지에 소개된 이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높은 수미단의 대좌 양쪽에 긴 꼬리의 흰 사자가 있고 그 위에 앉아 있는 禪定印의 불좌상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뚝섬의 상과 같이 通肩의 法衣에 U形의 옷주름을 보여주고 있다.389) 그런데 이러한 불좌상 형식은 5세기 중국의 金銅佛 뿐 아니라 敦煌이나 雲崗石窟 또는 더 서쪽의 투르판지역 출토의 塑造나 木造 불좌상에도 보이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장천 1호분의 천장 고임돌 남벽과 북벽면에는 각기 4구의 보살입상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 양쪽에서 늘어진 띠장식이나 가슴에 걸쳐진 구슬장식이 역시 중국 5세기 후반에 나타난 보살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390)
장천 1호고분의 예불공양도에서 불상 좌우에서 엎드려 절하는 공양인들의 표현은 당시 고구려에서 행해진 불교신앙의 모습을 알려주며, 또 천정 고임돌 여러 곳에 그려진 蓮花위에 남녀 두 인물의 머리가 보이는 것은 佛國淨土에 태어나는 불교의 환생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이 천정벽화는 일반 대중의 예배장소가 아닌 특정 개인의 墓宅벽화인 점이나 동양의 전통적인 장례풍습에 따라서 축조된 분묘임을 참고할 때에 사후에 혼이 天上으로 올라간다는 동양의 전통적인 내세관이 불교의 윤회사상과 서로 혼합된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불상의 표현은 고분벽화에서 사라지게 되고 蓮花나 飛天 또는 火焰文 등 불교미술의 장식적인 요소만이 장엄의 효과로 남아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