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8권 삼국의 문화Ⅳ. 문학과 예술4. 조각2) 삼국시대의 조각(2) 불교조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1. 고구려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 2) 조상숭배신앙
          • 3) 지신신앙
        • 2. 백제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 2) 조상숭배신앙
          • 3) 지신신앙
        • 3. 신라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 2) 조상숭배신앙
          • 3) 지신신앙
        • 4.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 2)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
          • 3) 토착신앙과 불교의 교대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1) 고구려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 (2) 교학의 발전
            • (3) 불교신앙
            • (4)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들
            • (5) 백제·신라에서 활약한 승려들
          • 2) 백제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 (2) 교학의 발전과 불교신앙
            • (3)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
          • 3) 신라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 (2) 불교공인의 실상
            • (3) 진흥왕대의 불교
            • (4) 미륵신앙의 양상
            • (5) 신라 불국토설의 내용과 대두 시기
            • (6) 중고시대의 고승
            • (7) 불교의 대중화
          • 4) 가야의 불교
        • 2. 도교
          • 1) 도교의 전래와 수용기반
          • 2) 도교사상
            • (1) 고구려
            • (2) 백제
            • (3) 신라
      • Ⅲ. 유학과 역사학
        • 1. 역사개념의 출현
        • 2. 유학과 역사학의 관련
        • 3. 삼국의 유학
        • 4. 삼국의 역사편찬
          • 1) 고구려
          • 2) 백제
          • 3) 신라
      • Ⅳ. 문학과 예술
        • 1. 언어와 문학
          • 1) 언어
            • (1)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
            • (2) 삼국 언어의 상호관계
          • 2) 시가
            • (1) 한국시의 생성과 노래의 집단성
            • (2) 창작적 노래의 출현과 민족의 발견
            • (3) 삼국의 시가와 한국시의 전통
        • 2. 회화
          • 1) 고구려의 회화
          • 2) 백제의 회화
          • 3) 신라와 가야의 회화
        • 3. 서예
          • 1) 고구려의 서예
          • 2) 백제의 서예
          • 3) 신라의 서예
        • 4. 조각
          • 1) 청동기시대의 조각
          • 2) 삼국시대의 조각
            • (1) 일반 조각
            • (2) 불교조각
        • 5. 공예
          • 1) 금속공예
            • (1) 금속공예의 종류
            • (2) 금속공예의 기법과 공예품
            • (3) 금속제 그릇들
            • (4) 삼국시대의 동경
          • 2) 유리공예
          • 3) 도자공예
            • (1) 고구려의 토기와 도기
            • (2) 백제의 토기
            • (3) 신라의 토기
          • 4) 목칠공예
        • 6. 건축
          • 1) 사원건축
            • (1) 고구려
            • (2) 백제
            • (3) 신라
          • 2) 궁실·연못
            • (1) 궁실
            • (2) 연못
          • 3) 성곽
            • (1) 고구려 성곽
            • (2) 백제 성곽
            • (3) 신라 성곽
            • (4) 가야 성곽
            • (5) 삼국 및 가야 성곽의 성격
        • 7. 고분
          • 1) 고구려 고분
            • (1) 적석총
            • (2) 봉토석실분
          • 2) 백제 고분
            • (1) 토광묘
            • (2) 토축묘
            • (3) 주구토광묘
            • (4) 적석총
            • (5) 석곽묘
            • (6) 옹관묘
            • (7) 화장묘
            • (8) 석실분
            • (9) 전축분
          • 3) 신라 고분
            • (1) 토광묘
            • (2) 석곽묘
            • (3) 적석목곽분
            • (4) 횡혈식 석실분
          • 4) 가야고분
            • (1) 토광묘
            • (2) 석곽묘
            • (3) 석실분
          • 5) 원방형분
        • 8. 음악
          • 1) 향악의 기원과 상고사회의 음악문화
            • (1) 한민족의 기원문제와 향악
            • (2) 상고사회의 음악문화
          • 2) 삼국시대의 음악문화
            • (1) 고구려
            • (2) 백제
            • (3) 가야와 신라
          • 3) 삼국시대의 해외음악활동
            • (1) 중국에서의 고려악
            • (2) 일본조정에서의 삼국악
        • 9. 무용·체육
          • 1) 무용
          • 2) 체육
            • (1) 무예
            • (2) 놀이
      • Ⅴ. 과학기술
        • 1. 한국 과학기술의 형성
        • 2. 고구려의 과학과 기술
          • 1) 하늘의 과학
            • (1) 천문도를 만들다
            • (2) 천문관측제도와 활동
            • (3) 기상 관측
          • 2) 산업기술 및 생활과학
            • (1) 고구려척과 축조기술
            • (2) 금속기술
            • (3) 연단술
            • (4) 도구와 기계장치
          • 3) 의약학
          • 4) 지도의 제작
        • 3. 백제의 과학과 기술
          • 1) 천문학과 역산학
          • 2) 지리학과 의약학
          • 3) 산업기술
            • (1) 농업기술의 혁신
            • (2) 토목기술
            • (3) 금속기술
            • (4) 요업기술
        • 4. 신라의 과학과 기술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를 세우다
            • (2) 천문기상 관측
          • 2) 의약학
          • 3) 산업기술
            • (1) 농업기술
            • (2) 금속기술
            • (3) 요업기술
            • (4) 그 밖의 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의생활의 기본구조
            • (1) 관모와 머리모양
            • (2) 저고리(유)
            • (3) 바지(고)
            • (4) 치마(상)
            • (5) 두루마기(포)
            • (6) 대
            • (7) 신(이·화)
          • 2) 고구려의 의생활
            • (1) 관모
            • (2) 의복
          • 3) 백제의 의생활
            • (1) 왕복
            • (2) 관인 복식
          • 4) 신라의 의생활
          • 5) 가야의 의생활
        • 2. 식생활
        • 3. 주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1. 선사시대 문물의 일본 전파
        • 2. 학문과 사상
        • 3. 역학·의약·기술
        • 4. 예술 문화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6세기의 불상

 현존하는 불상 중에 중국의 5세기 초기 불상 양식을 반영하는 예가 있기는 하나 명문을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만들어진 소속국을 밝히기가 어렵다. 또한 크기가 작은 불상들은 이동되기가 수월하여 상이 발견된 곳이 그 상을 제작한 나라가 아닌 경우도 있다.

 6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불상 중에는 광배에 명문이 쓰여진 금동불의 예가 몇 있으며 그 내용을 통해서 제작국이나 상의 명칭 또는 신앙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특히 干支銘이 있는 경우에는 양식 고찰을 통하여 대략의 시대 추정도 가능하다. 국보 119호인 延嘉 7년 己未年銘 금동여래입상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상은 명문에 의해 6세기의 고구려 상으로 판명되나 실제의 발견지가 경남 宜寧이므로 명문이 없었다면 신라의 상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이 상의 광배 뒷면에 있는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東寺…’이란 명문의 내용으로 延嘉 7년인 己未年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옛 낙랑지역)에 있던 東寺라는 절에서 주지스님과 제자와 師徒들이 1000佛을 造像하여 유포한 것 중 제 29번째의 佛인 因現義佛로 만들었다고 한다(<그림 5>).

<그림 5>연가 7년 기미년명 금동여래입상(539)     + 참고이미지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이 연가 7년명 불상은 광배와 불상과 대좌가 하나로 주조된 상으로 본존상은 오른손을 들어 두려움이 없음을 보여주는 施無畏印과 왼손을 내려 소원을 받아들이는 의미의 與願印을 하고 있다. 법의는 가슴이 많이 벌어지고 한쪽 옷자락 끝이 가슴 앞을 가로질러 왼쪽 팔 위로 걸쳐지고 있는데 이러한 大衣 형식은 중국의 5세기말 운강석굴이나 6세기 초 北魏 불상에서 인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중국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명문에 있는 延嘉라는 고구려 연호는 역사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상의 양식이 6세기초의 중국 불상과 비교되어서 기미년은 539년으로 추측하고 있다.391) 이 상은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서 명문에 의해서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장 이른 예가 되는 셈이다.

 백제의 초기 불상 중에도 이 연가 7년명 불상과 비슷한 형식의 금동불입상이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에 있는 普願寺址에서 출토되었다. 광배나 대좌는 없으나 그 기본 형식은 연가 7년명 불상과 같이 갸름한 얼굴에 手印과 大衣를 걸쳐 입은 모습이 비슷하다. 그러나 대의의 옷주름은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쳐 늘어지고 가슴의 內衣가 y形의 반대모양으로 여며진 점이 다르다. 이러한 형식은 후에 부여 佳塔里 출토의 금동불입상형으로 발전하는데 보원사지 출토 상보다는 입체감이 강조되었고 옷자락 주름이 몸체에 차분히 붙어서 늘어진다. 이러한 새로운 요소는 인도 굽타양식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 四川省 萬佛寺 절터 출토의 梁代 석불입상이나 6세기 후반 北齊 시기에 유행하는 불입상의 특징과 유사하여 백제 불상 양식의 발달에 반영되는 남조 불상의 영향을 알려준다.392)

 불상의 양쪽에 보살상이 등장하는 것을 삼존불형식이라고 하는데 부처를 도와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다. 하나의 큰 광배에 삼존불이 붙어 있는 一光三尊佛像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경에 유행한다. 불상의 광배에는 화염문양을 표현하여 성스러운 부처의 몸에서 빛이 난다는 의미를 상징하는데 서울 澗松미술관에 있는 일광삼존불의 광배 화염문은 연가 7년명 불상 광배의 문양보다 더 정돈되었다. 광배의 뒷면에는 “癸未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寶華가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데 이 계미년은 상의 양식으로 보아 56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림 6>). 그러나 제작국은 확실히 알기 어려우며, 광배의 화염문 형태는 평양의 평천리에서 출토되어 현재 평양 박물관에 있는 永康 7年銘 광배와 유사하다. 이 광배는 밑부분이 파손되었고 본존불은 남아있지 않으나 뒷면 명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彌勒尊像을 만들어 훗날 미륵불이 내려와 세 번의 법회를 할 때에 듣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있어 고구려에서 유행한 미륵하생신앙의 구체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림 6>계미명 금동삼존불입상(563)
간송미술관소장.

 고구려의 일광삼존불상 중에서 또 다른 중요한 예는 황해도 谷山 출토의 景(?) 4년 辛卯年銘 금동삼존불입상이다. 상의 명문에는 “무량수상을 만들어 돌아가신 부모와 함께 미륵불이 있는 곳에 태어나 法을 같이 듣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있어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는 사후의 정토왕생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묘년 삼존불상은 연가7년명 여래입상보다는 얼굴이나 몸체의 표현에 입체감이 있으며 광배의 火焰 문양형태도 더 정돈되고 세련미가 보인다. 또 본존불을 보좌하는 좌우협시상이 등장하였을 뿐 아니라 광배면에 三化佛이 등장한 점은 과거·현재·미래 三世佛 개념의 반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의 연대를 추정하게 해주는 신묘년은 양식으로 보아 6세기 후반인 571년으로 보고 있으나 명문에 있는 景(?) 4년이 현재 알려진 어느 고구려의 연호와도 연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 신묘년 일광삼존불상의 본존불 표현의 특징은 법의 주름의 처리방식이 北魏佛을 따라서 연가 7년명상이나 계미년명불과 같이 옷자락이 허리를 가로질러 왼쪽 팔뚝에 걸쳐진 모습이 아니고 몸 앞에서 둥글게 자연스럽게 늘어지고 어깨 뒤로 걸쳐진 점이다. 이와 비슷한 형식은 이미 백제의 가탑리 상에서도 보았고 중국에서는 北齊·隋代에 유행하는 인도식의 착의법으로 새로운 형식의 불상이 6세기 후반에 우리 나라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알려진 일광삼존불의 광배중에 충북 中原郡 老隱面에서 출토한 建興 五年 丙辰銘 光背는 596년으로 추정되며 명문에 釋迦文像을 제작하였다고 하나 현재 상은 없어졌다. 또 현재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에 있으나 원래는 法隆寺(호류지) 보물로 있었던 御物48體佛중에 제193호인 甲寅年 王延孫銘光背도 우리 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뒷면의 명문에 현세 부모를 위해 석가문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갑인년은 594년으로 추정되며 광배 주위의 飛天이나 7化佛의 표현은 매우 발달된 광배형식으로 화염문양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주조되었다.

 그러나 발원자 왕씨가 고구려계인지 백제계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 논란으로 남아 있다.393)

 6세기에 제작된 불상 중에 보살상의 표현은 일광삼존불의 협시보살상에서도 보았듯이 대개 꽃잎 모양의 보관을 쓰고 넓적하고 밑이 뾰족한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두 어깨 위에는 천의를 고정하는 둥근 장식이 있고 늘어진 천의는 무릎부분에서 교차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의 보살상은 평양 서북방 平原郡 德山面 元五里절터에서 출토된 흙으로 구운 泥造보살입상에서도 보인다. 이 泥像들의 파편들을 보면 같은 틀로 찍어서 대량 생산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비교적 두툼하고 부드러운 조형감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금동보살입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그림 7>). 미소 띤 갸름한 얼굴과 세 갈래로 갈라진 머리장식 그리고 어깨에 둥근 장식으로 고정시킨 천의가 흘러내려 무릎부분에서 교차되고 일부는 몸 양쪽에 지느러미처럼 늘어진 모습은 바로 삼국시대 초기에 많이 보이는 보살형이다. 시무외·여원인의 손을 유난히 크게 하여 보살의 자비심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며 옷주름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얼굴표정에 생동감이 보인다. 조형적으로는 북위 불상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의 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림 7>금동보살입상(6세기)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부여 軍守里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 역시 기본적으로는 위에 설명한 삼국시대 초기 보살상의 圖像을 따르고 있으나 치마 주름이 부드럽게 정리되고 天衣가 몸 양쪽으로 규칙적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표현, 그리고 부드러운 얼굴의 표정 등은 백제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부여 窺岩面 新里 출토의 금동보살상은 넓적한 연판 대좌 등에서 역시 백제 상에 보이는 부드러운 조형성이 보인다.

 대체로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를 먼저 수용하여 불상 제작에 앞서 가고 있을 때 신라는 뒤늦게 528년에 불교를 공인하였고 공식적으로 처음 세워지는 절이 544년에 완성된 興輪寺이다. 따라서 이 때에 불상도 절에 모셨을 것이나 현재는 절터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보다 후인 566년에 왕실사찰로 완성된 경주의 황룡사 절터에는 지금도 금당지에 574년에 완성되었다는 丈六의 금동3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있어서 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장육존상의 원형이 인도에서 보내졌다는≪삼국유사≫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아마도 5∼6세기에 유행한 인도의 굽타불상 양식을 반영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가며 한편 다른 삼국의 불상과 연계를 짓는다면 부여 가탑리 출토의 불상 양식이나 신묘년명 불상의 본존과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94)

 최근 山東반도 諸城에서 발견된 일광삼존불상중에 도상이나 표현양식이 우리 나라 6세기의 일광삼존불상들과 매우 유사한 예를 포함하고 있어서 산동지역 불교와의 연계성을 알려준다. 특히 산동성 諸城博物館에 있는 금동일광삼존불은 그 광배의 형태나 화염문 또는 3化佛의 등장까지도 유사하다.395) 이 산동지역은 중국 남조나 북조 불교미술의 요소가 합쳐지는 지역이고 우리 나라 백제와는 해상교류로 이어졌던 곳이어서 앞으로 두 지역의 교류관계에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삼국초기의 불상표현은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한 금동의 여래입상들 이외에도 이미 언급했던 5세기의 뚝섬불좌상이나 장천 1호분의 천정 그림에서 보았던 선정인의 여래좌상형이 좀 더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 고구려의 예 중에는 이미 앞의 보살상 소개에서 언급한 평양 元五里절터에서 나온 泥造佛像들 중에 옷자락이 밑으로 늘어진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禪定印의 불좌상이 있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많으나 같은 틀로 찍어 대량으로 구워서 그 위에 흰색과 붉은 칠을 한 상들이다. 두툼한 법의는 목둘레에서 자연스럽게 늘어지고 그 끝단이 양쪽 손 밑에 좌우대칭으로 접혀져 있다. 이와 같이 선정인의 불좌상이 고구려 초기 불상형으로 유행하였다는 것은 평양 土城里寺址에서 출토된 陶范에서 찍어낸 불좌상으로도 알 수 있으며 또 북위의 불상에서도 보이듯이 불상의 옷주름이 늘어져서 대좌 위를 덮는 裳懸座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제의 선정인 불좌상으로 가장 대표적이고 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예는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나온 납석제 불좌상이다(<그림 8>). 통통하면서도 긴장이 풀린 자세가 특징적이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이 네모난 대좌를 덮어 상현좌를 이루고 있다. 고구려의 토성리 불좌상 보다는 주름이 간략해지고 정돈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기본적인 도상은 같아도 조형적인 감각에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 8>군수리사지출토 蠟石製如來坐像(6세기)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부처의 裳衣가 대좌를 덮는 상현좌의 불상은 5세기말에 중국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운강석굴 후기에도 나타나며 四川省 출토 南齊의 484년 석좌상에서도 보이는데 인도로부터 전해진 불상형이 중국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중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남경 棲霞寺의 석굴에 남아있는 南齊의 大佛은 비록 보수를 하였다 하더라도 그 규모나 상현좌의 모습에서 과연 당시 남조불상을 대표하는 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남조문화의 영향도 받았던 북위불상은 물론이고 고구려나 백제의 상현좌 불상의 원류를 보는 것 같다. 옛 백제의 영토였던 충청북도 靑陽에서 발견된 대형 陶製 상현대좌 역시 군수리상과 같은 백제 초기 불좌상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동이 쉬운 불상들은 출토지가 제작국이 아닐 수도 있으나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상이나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석조불상은 그 지역을 다스렸던 나라에 속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구려의 마애불은 알려진 예가 없고 백제나 신라 지역에는 중요한 삼국시대 초기 마애불상들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른 예는 충청남도 예산 花田里에서 발견된 장방형 石柱에 새겨진 四面石佛이다396)(<그림 9>).

<그림 9>예산 화전리 4면석불(6세기 후반)

 가장 넓은 면에 새겨진 불좌상이 正面像이고 그 옆과 뒷면에는 높은 浮彫로 조각된 佛立像이 있다. 모두 머리가 떨어져 나가긴 했으나 여러 겹의 U형으로 길게 늘어진 法衣의 표현은 입체적이고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정면 불좌상의 偏衫을 입은 着衣 형식이나 넓적한 연판으로 둘려진 頭光에 깊고 뚜렷하게 조각된 화염문과 중앙의 寶珠紋은 백제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다른 면에 있는 불입상은 옷주름이 목에서 부터 둥글게 연속적으로 늘어진 형식인데 앞에서 언급한 가탑리 불입상의 옷주름과 연결되며 그 원형은 역시 인도의 굽타시대 불상에서 발전한 것이다.

 암벽에 조각된 백제의 마애불상 중에서 가장 이른 예가 충청남도 서산군 태안에 있는 마애삼존불이다(<그림 10>). 허리 밑부분이 오랫동안 흙에 묻혀있던 이 삼존불은 1995년 여름에 발굴되어 정연하게 조각된 연화대좌가 드러났으며 불상들의 균형잡힌 비례와 옷주름 처리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寶珠를 두 손에 마주잡은 奉寶珠菩薩立像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불입상이 서 있는데 그 중 왼쪽 불상은 뚜껑이 달린 약함을 들고 있어 藥師如來로 추정된다. 이 태안의 불상은 두 어깨에 걸쳐져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이 연속된 반원형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부여 가탑리 금동불상이나 예산 4면석불의 불입상들의 착의형식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다.

<그림 10>태안 마애삼존불(6세기말)     + 참고이미지

 보주를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봉보주형의 보살입상은 백제에서 특히 유행했던 형식이다. 태안의 봉보주형 보살상은 세개의 연속된 산처럼 생긴 높은 보관을 쓰고 그 밑에 띠로 두른 冠帶가 머리 양쪽에서 귀밑으로 늘어졌다. 양쪽 어깨에서 내려온 천의가 무릎 위에서 교차하는 형식은 삼국 초기에 유행한 보살상형을 따르고 있다. 불상 전체가 많이 훼손되어 보관의 형태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백제에서 불교와 불상을 전해 받은 일본의 飛鳥(아스카)시대 초기 불상 중에서 法隆寺 寶藏殿의 금동봉보주보살입상이나 止利(도리)佛師의 대표작인 법륭사 金堂 석가삼존상의 협시보살상의 寶冠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어 초기 일본 불상에 반영되는 백제의 영향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일본에 남아있는 초기 불상을 참고하면 그 원류가 되었으나 현재는 불완전하게 남아있는 백제불상이나 다른 삼국시대 불상의 모습을 복원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태안 마애불의 봉보주보살상과 비슷한 예는 부여 규암면 新里 출토의 금동보살상 중에서도 발견된다. 이 금동상은 보존 상태가 나빠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높은 보관 밑에 띠로 둘러져서 그 끝이 양쪽에서 늘어지고 天衣가 다리부분에서 교차하는 모습이 바로 태안의 상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부여 定林寺 절터에서 발굴된 허리부분만의 소조상 파편도 두 손으로 보주를 마주 잡고 있는 부분인 것을 알 수 있고 같은 절터에서 발견된 납석제 삼존불입상도 왼쪽 협시 보살상의 약간 파손된 두 손이 허리 부분의 천의 위로 모아진 것으로 보아 봉보주를 한 자세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정림사 출토의 상들은 백제의 부여 천도 얼마 후인 6세기 후반의 상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봉보주형보살상 중에는 명문으로 상의 명칭이 확인되는 예는 없으나 일본 법륭사의 御物48체불 중에 보관에 화불이 있는 봉보주보살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의 도상으로 짐작된다.

 삼국 중에서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황룡사를 세우고 장육존상을 모시는 등 활발하게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수도 경주의 南山에는 많은 절터와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서 신라 불교 미술의 융성을 알려준다. 그 중에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는 산의 동쪽에 위치한 탑곡의 상으로 암벽에 불상, 탑, 비천, 승려, 동물 등 다양한 내용의 불상군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 수법이 그다지 세련되지 않으며 세부 표현도 뚜렷이 보이지는 않으나 큰 암벽을 돌아가면서 부조된 것이 불국토를 상징하는 듯하다. 혹 이 상들이 사방불 정토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397) 뚜렷하게 사방불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상들의 배치에도 일정한 체계가 보이지 않는다. 또 시기적으로나 불교 교리의 발달로 보아 아직 신라의 미술에 사방불정토의 개념이 표현되기는 이르다고 생각된다.

 탑곡의 불상군보다 내용면에서 좀 더 해석이 가능한 또 다른 중요한 신라의 마애상으로 경주의 서쪽 乾川에 있는 단석산 마애석불군이 있다. 산을 한 시간쯤 오르면 세 면의 높은 암벽을 석굴처럼 구성하고 입구 오른쪽 벽에 여원인·시무외인의 수인을 한 8m의 큰 불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그 안쪽의 암벽 위에는 오른손을 뺨에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반가사유보살상과 이 보살상을 향해 서 있는 4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보인다(<그림 11>).

<그림 11> 단석산 신선사 마애석불군(7세기 전반)

 이 단석산 神仙寺는 김유신의 수도장으로 알려져 있고 석불의 맞은편 벽에서 미륵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입구 쪽에 있는 불입상이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설법하실 미륵불임을 알 수 있다. 또 그 옆 암벽위의 반가사유보살상은 앞으로 중생을 구제하기로 기약된 미륵보살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곳은 도솔천에서 태어나 미륵보살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56억 7천만년 후에 성불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三會의 설법을 하실 미륵불을 만나기를 원하는 미륵하생 신앙이 합쳐진 미륵신앙의 도량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단석산의 마애상들은 조각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으나 신라시대에 유행한 불상 중에 연속된 U형의 옷주름을 가진 불입상 뿐 아니라 반가사유상, 편단우견의 불입상과 같은 새로운 불상 형식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석벽 밑 부분에 향로와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의 공양자상 표현은 고대 신라인의 복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많은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는데 현존하는 반가사유형 보살상 중에서 평양 平川里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이 현재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이다. 보관의 형태나 몸체의 조각 그리고 대좌 위의 옷주름 표현이 중국의 東魏-北齊系의 반가사유상 양식을 반영하므로 그 제작시기는 6세기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경주 단석산의 반가사유상도 자세한 세부는 보이지 않으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형식의 상이다. 특히 신라에서는 젊은 귀족으로 구성된 화랑의 집단이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들을 미륵의 화신으로 이해하는 신라적인 특수성이 있었다.

 백제 반가사유상의 초기 예 중에는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되었다는 하반부만 있는 납석제 반가상이 있는데 다리 밑으로 길쭉하게 늘어진 옷주름 표현이 특징적이다. 이와 유사한 옷주름 형식을 보여주는 예가 일본 對馬島의 淨林寺에서 전해오는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백제에서 전래된 불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삼국시대 불상의 원류를 찾아가면 물론 멀리는 인도의 불상과 연결이 되고 가장 가깝게는 중국의 상과 도상 및 양식적으로 비교가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여러 상의 비교 고찰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불상 양식이 다시 바다 건너 일본으로 전파된 사실이다. 백제의 성왕 때인 538년(혹은 552년)에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6세기 후반부터는 일본의 불교 미술과 삼국의 불교 미술과의 관련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일본 飛鳥(아스카)시대에 불교를 적극 수용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귀족 蘇我(소가)씨의 후원으로 세워진 飛鳥寺(아스카데라)는 588년 백제에서 寺工, 瓦工 등 200명이 넘는 기술자들이 日本에 건너가서 지은 것으로 당시 백제의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이 절의 가람구조가 고구려 淸岩里 절터와 비슷하게 一塔을 三金堂이 둘러싼 구조인 점이나, 또 절이 완성된 후에 백제의 惠總과 고구려의 慧慈스님이 절에 머물렀고, 특히 후자는 불교의 후원자인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다는 사실 등은 당시 일본의 초기 불교 미술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도 짐작하게 한다.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계 상으로는 일본의 초기 불교 미술의 寶庫인 법륭사에 전해져오다 현재는 東京國立博物館에 있는 御物48體佛 중에 몇 예가 있다. 그 중에 제193호인 갑인년 王延孫銘 광배가 백제나 고구려에서 전해진 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다.

 143호인 금동삼존불상도 백제계의 상으로 추정될 뿐 아니라 백제에서 왔다는 전설적인 善光寺 阿彌陀三尊佛 형식의 가장 이른 예로 중요시되고 있다. 한국의 전래품으로 추측되는 상들은 양식적인 고찰에서 뿐 아니라 도금의 색이라던가 주조 때에 기포가 특히 많이 생기는 특징 등이 언급되는데 제158호의 반가사유상도 그 중에 하나이며, 제 151호 또는 192호 불입상들도 한국의 전래품으로 추정되고 있다.398)

 일본의 초기 불상과 삼국시대 불상과의 비교 연구는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일본 자료를 통해서 한국 불상이 끼친 영향을 밝혀줄 뿐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는 사라졌거나 또는 태안의 마애봉보주보살상처럼 마멸이 되어 잘 안 보이는 경우에는 거꾸로 일본에 남아 있는 상을 참고하여 그 원형이 되었을 삼국시대의 상을 복원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된다.

391)그러나 이 해가 고구려 安原王 9년이 되므로 7년이라는 숫자와는 부합되지는 않는 모순이 따른다.
392)金春實,<三國時代 如來立像 樣式의 展開-6世紀 末∼7世紀 初를 중심으로->(≪美術資料≫55, 1995), 10∼41쪽.
393)熊谷宣夫,<甲寅銘考>(≪美術硏究≫209, 1960), 223∼224쪽.

吉村怜,<法隆寺獻納御物王延孫光背考>(≪佛敎藝術≫190, 1990), 11∼24쪽.
394)金理那,<皇龍寺의 丈六尊像과 新羅의 阿育王像系 佛像>(≪震檀學報≫46·47, 1979), 195∼215쪽.
395)金理那, 앞의 글(1996), 100쪽<그림 23>참조.
396)朴永福·趙由典,<禮山 百濟四面石佛 調査 및 發掘報告>(≪文化財≫16, 1983), 1∼50쪽.

文明大,<百濟 四方佛의 起源과 禮山 石柱四方佛像의 硏究>(≪韓國佛敎美術史論≫, 民族社, 1987), 37∼71쪽.

大西修也,<百濟佛再考-新發見の百濟石佛と偏衫を着用した服制をめぐって-> (≪佛敎藝術≫149, 1983), 11∼26쪽.
397)文明大,<新羅 四方佛의 起源과 神印寺(南山塔谷磨崖佛)의 四方佛>(≪韓國史硏究≫18, 1977), 70∼74쪽.
398)金理那,<百濟彫刻과 日本彫刻>(≪百濟의 彫刻과 美術≫, 公州大學校博物館, 1992), 129∼16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