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7세기의 불상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668년을 하한으로 하면 7세기의 삼국시대는 7세기 전반과 중엽까지를 포함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륙으로부터 불교를 먼저 수용하여 불교문화를 발달시켰으나 7세기에는 그 중심이 신라로 차차 옮겨지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普德和尙이, 고구려 왕실이 도교를 믿어 불교를 소홀히 하므로 전라도 完山州(지금의 全州)로 가서 열반종을 시작했다는 기록이나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주요 내용이 일상생활의 표현에서 도교적인 四神으로 바뀌는 것 등은 그러한 변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신라는 陳에 유학을 갔던 圓光스님이 600년에 귀국하여 활약한 것이나 僧 智明이 602년에, 僧 曇育이 605년에 중국에서 귀국하는 점 등으로 보아 새로운 불교 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安含이라는 스님이 7세기초 인도스님 3명과 함께 귀국하여 황룡사에 머물면서 譯經사업을 폈다는 기록은 신라의 불교가 중국 뿐 아니라 인도 불교사회와도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황룡사 장육존상의 원형이 멀리 인도의 아쇼카왕이 보낸 상이라는 전설적인 내용도 이미 예로부터 신라가 불교의 근원지인 인도와의 인연이 깊었음을 믿었던 신라인의 신앙과 불교사회의 국제적 성격을 말해 준다. 자장법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643년에 왕실 사찰인 황룡사의 9층탑 건립을 발원하여서 주변 국가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한 것은 신라의 불교가 왕실 후원의 호국 불교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황룡사의 탑이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645년에 완성되었다는 점은 백제의 불교 문화가 신라보다 이미 앞서 있었음도 알려준다.
7세기의 불상 중에서 명문에 의해 고구려의 상으로 확인되는 상은 없으나 출토지로 보아 경기도 楊平과 강원도 橫城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은 그 가능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대략 이 시대 불상의 표현이 중국 隋의 양식 또는 그 이전의 北齊·北周 양식을 이어주는 것으로 본다면 양평불상에서 보이는 연속된 U형의 주름처리나 단순화되면서 몸체의 양감이 강조된 점은 캐나다 토론토시 온타리오박물관의 중국 수대의 대리석 아미타불입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그러나 엄숙한 중국 불상과는 달리 양평의 불상이 보여주는 여유 있는 자세나 거리감 없는 얼굴 표정은 대체로 한국의 불상에서 공통되게 느끼는 표현이다(<그림 12>). 일반적으로 7세기에 유행한 삼국의 불입상형은 이 양평 불입상과 비슷한 계통이 많으며 그 대표적인 石造像으로 충청남도 서산 雲山面의 마애삼존불과 경주 남산 서편 拜洞 삼존불의 본존불상을 들 수 있다.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의 마애삼존불은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백제 불상의 대표적인 예로 본존과 두 협시보살상의 온화하게 웃는 얼굴표정은 백제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인간적이고 친근한 얼굴모습이다(<그림 13>). 여원인 시무외인의 手印을 한 본존불은 두 어깨를 덮은 大衣를 입었고 몇 개의 둥근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늘어졌으며 가슴에는 대각선으로 입혀진 內衣가 보인다. 불상의 오른편에는 두 손을 모아 寶珠를 들고 있는 봉보주 협시보살입상이 본존불과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으며, 이 봉보주보살상은 일본의 법륭사 御物48체불상 중 제 165호인 辛亥年 관음보살입상이나 166호 상과 보관 형태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해년명은 寶冠에 阿彌陀化佛이 있어서 이 봉보주형 보살상 형식이 관음보살로 신앙되었던 것을 알려준다. 흔히 삼존불은 양쪽에 같은 형식의 보살상이 표현되나 이 경우에는 반대편에 반가사유형 보살상이 협시로 된 특이한 구성을 보이며 이들은 당시 백제에서 널리 신앙되었던 두 형식의 보살상으로 생각된다. 반가사유형 보살상을 현재 도솔천에 있으면서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서 설법하실 미륵보살로, 봉보주보살은 관음으로 추정하며 本尊은 현세의 부처 석가불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 서산 마애불의 본존불은 앞에서 언급한 양평 출토나 횡성 출토 금동불입상과 같은 계통에 놓을 수 있는 백제 불상으로 늘어진 옷주름의 수가 간략해지고 입체감 있는 몸체 표현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보주를 든 보살상도 이미 태안 마애삼존불상에서 보았던 봉보주보살상보다 그 보관 형태나 天衣 표현이 새로우며 얼굴 표정도 자연스럽고 몸체 표현에 입체감이 있어 양식적으로 보아 태안 마애불보다는 늦은 7세기초의 상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에 남아있는 많은 석조불상 중에 古新羅시대의 상으로 생각되는 대표적인 예가 남산 서쪽편 포석정 옆 골짜기 입구에 있는 拜洞의 石造三尊佛立像이다(<그림 14>). 이 삼존상은 양쪽협시보살의 형식이 동일하지 않아 원래부터 같은 삼존 형식을 이루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표현 양식으로 보아서는 중국의 6세기 후반 北齊·周에서 隋代에 걸쳐 유행하는 양식을 따르는 7세기 전반의 신라상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본존불은 바로 양평금동불입상, 서산마애불 본존상과 같은 계보에 넣을 수 있는 U형의 둥근 옷주름의 불상 형식을 따르고 있다. 만일 574년에 완성했다는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인도 불상의 요소를 어느 정도 지녔다면, 그리고 중국 四川省 萬佛寺 절터에서 나온 北周의 ‘造阿育王造像…’명의 상과 같이 굽타 불상 양식이 중국식으로 변화한 모습과 유사한 형식이었다면 바로 경주 남산의 배동 삼존상의 본존은 황룡사의 장육존상의 전통을 이어주는 7세기의 신라 상으로 생각된다. 즉 동북아시아의 불상 발전의 큰 흐름을 따르는 국제적 양식과 7세기의 신라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7세기 신라에서 예배된 불상 중에서 또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는 예는 경주 인왕동에서 출토된 석불좌상이다(<그림 15>).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정면성 위주의 높은 浮彫의 상으로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표정이 경주 배동 삼존불과도 비슷하여 신라 불상의 얼굴 모습을 보여주며 서산 마애불상의 백제적인 표정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與願印·施無畏印의 手印은 禪定印佛像 이후에 백제나 고구려에서 유행한 불좌상의 한 형식이다. 우리 나라에는 경상북도 봉화에 있는 거대한 마애불좌상과 충청북도 중원군 봉황리에 있는 파손된 불좌상 외에는 이와 같은 형식의 상이 별로 남아있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이미 5세기 말경에 나타나서 6세기 전반에 크게 유행을 한 형식이다. 또 일본에는 법륭사 석가삼존불상을 비롯하여 飛鳥시대의 불좌상 중에 이와 같은 형식의 불상이 많이 남아 있는 점을 참고한다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를 비롯하여 신라에도 같은 형식의 상이 좀 더 많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전라남도 익산 蓮洞里에 있는 거대한 석불좌상은 비록 머리와 손이 없어졌지만 바로 이 계통의 불상형으로 생각되는 7세기의 중요한 백제 석상이다. 이 익산불상의 거대한 광배에 보이는 化佛과 화염문 표현이 일본 법륭사 석가 삼존불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399)
경주 남산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온 불상 중에≪삼국유사≫에 있는 기록과 연결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상이 삼화령에서 출토된 미륵삼존불상이다(<그림 16>). 이 불상의 본존은 두 다리를 밑으로 내려뜨리고 앉은 倚坐像으로 이러한 형식의 불상이 중국에서는 隋代부터 7세기 唐조각에 많이 나타나고 명문이 있는 것 중에는 미륵으로 불리는 예도 있다.
이 삼화령 삼존석상은≪三國遺事≫권 3<生義寺石彌勒>條에 있는 善德王때에 生義라는 스님이 남산 꼭대기 삼화령에 미륵을 모셔 644년에 절을 짓고 후에 生義寺라고 불렀다는 내력과, 忠談스님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하였다는 기록과도 연결시키는 불상이다.400) 상의 자세로 보아도 당시 유행하던 미륵불의 표현일 수도 있고 또 불상이나 그 양쪽 협시의 표현 양식에서도 7세기 중엽의 상일 가능성이 크므로 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불상이다. 보살상의 얼굴 표정이 귀여운 童顔이고 아직 머리가 몸체에 비해 큰 점은 특히 석상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불상의 보수적인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倚坐형식의 불상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토되었다는 금동의좌불상 외에는 별로 알려진 예가 없고 법주사 입구 암벽에 마애불상이 있으나 시대가 고려로 내려간다.
한편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서 많이 발견되는 형식 중에 大衣를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偏袒右肩의 불입상들이 있다. 이러한 예는 이미 단석산의 마애불상군중 반가사유상을 향해 서 있는 불상 중에 두 예가 발견되었고 또 같은 암벽 밑쪽에 조각된 공양자상 옆에도 편단우견의 불상이 표현되어 있다.
금동불의 예 중에는 경주 황룡사 절터와 경상북도 영주의 숙수사 절터에서 출토된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지역에서 특히 유행한 불상 형식으로 생각된다(<그림 17>).
편단우견의 불상은 한쪽 어깨에만 옷을 걸치고 있는 특징 뿐 아니라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보주라는 것은 불교신앙에서 모든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 신통력이 있음을 상징하며 보주를 든 불상을 초기 형태의 약사여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01) 이 편단우견 불상의 또 다른 특징은 그 자세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 다리의 힘을 빼고 서서 한쪽 엉덩이가 치켜올려진 인도 굽타불상의 三屈자세와 유사한 점이다. 대의가 주름이 별로 없이 몸체에 착 달라붙었고 몸매의 매끈함과 신체의 굴곡이 강조된 점은 당시 삼국시대의 불상표현으로는 다분히 이국적이다.
이러한 특징 있는 불상 양식은 인도에서도 특히 남부지방이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불상에 많이 보이고 중국에서는 별로 유행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인도의 승려나 또는 인도와 연계가 있는 경로를 통해서 전래된 불상임에는 틀림없고≪海東高僧傳≫에 安含이 인도 승려 3人을 데리고 와서 황룡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혹시 이러한 새로운 상의 등장 배경을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서 반가사유형 보살상은 초기부터 등장하여 특히 7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처음에 태자사유상으로 불리던 이 반가사유형 보살상이 싣달타 태자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로, 또는 미래에 부처가 되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법회를 하실 것이며 현재에는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로서 인식되었으며 관음보살상과 함께 삼국시대에 가장 유행되었던 예배상이다.
이미 고구려의 평양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이 알려져 있고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에서는 협시보살상으로 나타났으며 경주의 단석산 신선사 암벽의 불상군은 彌勒上生의 반가사유보살상과 下生신앙의 미륵불이 결합된 미륵의 도량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미륵불사상이 신라사회에서는 특히 화랑도와도 연결되어 청년 집단의 대표인 화랑을 미륵의 화신으로 믿었다고 한다. 미륵불이 56억 7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내려와 龍華樹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할 것이라는 믿음과 화랑을 따르는 무리들을 龍花香徒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이러한 믿음과 연관이 있다고 보며 이 반가사유상이 신라지역에서 특히 유행하여 절에 본존으로 모셔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402)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 중에는 경상북도 안동 玉洞이나 경상남도 梁山에서 출토된 예가 있는데 옷주름의 처리가 서로 비슷하다. 경주 송화산 기슭 출토의 머리가 없는 석조 반가사유상과 경상북도 奉化郡 勿野面 北枝里 출토의 석조 반가사유상도 서로 다른 형식의 도상을 모델로 하고 있어 다양한 반가보살형이 신라 지역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 18>). 특히 이 봉화의 반가사유석상은 지금 남아있는 허리 밑부분만도 1.5m나 되는 큰 상으로 옷주름 처리나 연판의 형태가 삼국시대의 금동반가사유상 중 가장 걸작품의 하나인 93.5cm 크기의 국보 제83호 보살상과 가장 유사하다(<그림 19>). 따라서 이 금동반가사유상 역시 신라계통의 상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상은 일본 쿄토의 廣隆寺(고류지)에 있는 소나무로 제작된 반가사유상과 매우 유사한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赤松의 목재도 한국산으로 보고 있다. 또 이 절의 창건과 관련된 신라 불교 사회와의 연관성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신라 제작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다른 대표적인 상인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은 머리에 복잡한 장식의 보관을 쓰고 끝이 뾰족한 목걸이에 팔찌가 장식적이다. 天衣는 두 어깨 위에 날개처럼 뻗치고 몸 앞으로 늘어져서 교차하면서 걸쳐졌다. 이 반가상의 원류를 중국에서 찾아보면 東魏의 보살상과 비교되며 국보 제83호의 반가상이 北齊의 상들과 연관되는 점에서 본다면 더 古式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뛰어난 주조기술이나 섬세한 조각표현, 그리고 종교적인 심오함을 조각적 표현으로 승화시킨 예술성으로 본다면 국보 제83호의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삼국시대 금동불상의 최대 걸작품으로 꼽힌다(<그림 20>).
7세기 불상들의 조각 양식은 그 이전 시기의 상들보다 몸체의 비례도 알맞고 입체감이 강조되면서 옷주름의 표현도 부드러워지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와 더불어 보살입상들도 보관이나 영락이 화려하게 장식되면서 그 형식이 다양해지고 자비로운 보살형의 아름다운 자태로 표현되어 예배되었다. 7세기 보살상중에 금동으로 제작된 비교적 소형의 입상들이 여럿 남아 있는데 그 중
출토지가 확실한 예 중에 공주 儀堂面 송정리 출토의 보살입상과 부여 규암리 출토의 보살상 2구는 모두 백제의 상으로 분류된다. 이 상들은 모두 6세기 보살상과 달리 새롭게 보관의 중앙에 화불이 표현되어 도상적으로 관음보살상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따라서 관음이 보좌하는 아미타불 신앙의 유행을알려준다. 이러한 새로운 도상의 유행이나 예배 대상의 등장에는 당시에 전래되는 새로운 경전의 내용과 관계가 깊으며 교리의 깊은 이해에 따라 만들어지는 다양한 상의 종류와 이들을 예배하는 신앙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공주 송정리 출토의 관음보살상은 오른손은 연봉오리를 치켜들고 왼손은 내려서 정병을 든 자세로 서 있다. 두 어깨 위에 걸쳐진 천의는 무릎 위에서 교차하면서 그 끝이 다시 두 팔뚝 위에 걸쳐졌고 둥근 목걸이에서 늘어진 영락은 허리 부분에서 갈라져서 뒤로 돌려졌는데 앞의 영락장식과 똑같은 장식이 뒤에도 표현되었다. 천의가 몸 뒤에서 길게 U형으로 늘어진 것은 백제 초기에 유행하는 봉보주형 보살상의 뒷면에서 보이는 천의 표현과 같다. 이 송정리 보살상의 넓적한 얼굴에 여유 있는 미소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의 처리는 백제상의 특징을 따른 것으로 특히 7세기 후반 일본 白鳳(하쿠호)시대의 보살상 중 법륭사에 있는 7세기말 木造六觀音像과 그 도상과 양식 면에서 비교된다.
백제 말기의 보살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는 부여 규암리 출토의 관음보살상 2구로 그 중의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랫동안 오사카의 이케다(市田次郞)씨의 소장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소장처가 확실하지 않다.
국립박물관에 있는 규암리 금동보살상은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삼면으로 된 보관을 썼는데 그 정면에 아미타좌상의 화불이 있다(<그림 21>). 몸체가 길쭉하며 머리와의 비례도 균형이 잡혔고 얼굴은 통통하다. 어깨에서 늘어진 영락장식은 허리에서 꽃모양고리 장식을 중심으로 교차되었으며 비슷한 장식이 몸 뒤에도 있고 천의는 부드럽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보주를 높이 들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렸는데 팔뚝이 둥글며 몸체에서 떨어져 조각되어 입체감이 강조된다.
한편 이케다씨 소장이었던 또 다른 규암리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목걸이 장식이나 천의를 걸친 형태가 앞에 설명한 상 보다 더 장식적이고 세부 표현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고 조각 솜씨도 뛰어나다. 三面寶冠에는 역시 化佛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이 괸음보살상이 도상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관련된 경전의 전래와 함께 관음신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서울 삼양동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 역시 7세기의 삼국시대 보살상 중에 중요한 예로 보관에 화불이 있다(<그림 22>). 천의를 몸에 두 번 가로질러 걸쳐 입은 점은 앞서 본 경주 삼화령의 석조삼존불의 협시보살상과도 같은 형식이나 석조상보다는 알맞은 몸체 비례에 균형이 잡혀 있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별로 뚜렷하지 않고 늘어진 목걸이 장식도 크기가 고르지 않으며 천의의 표현 수법이 투박한 점 등은 주조 기술이 세련되지 못한 결과인지 아니면 세부 표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의 한국적인 조형 감각의 결과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세부의 생략과 기술적으로 미숙해 보이는 조형성은 한편 꾸밈이 없고 자연스런 느낌을 주며 전체적으로는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삼양동 보살상이 나온 곳은 특별한 寺址로 알려진 곳이 아니고 명문도 없어서 삼국 중에 어느 나라의 상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금동보살입상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주조기술을 보여주는 예는 경상북도 善山에서 출토된 2구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이 두 보살상은 크기나 그 표현 형식이 서로 다르고 또 같이 출토되었던 불상과도 별도의 상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발견 장소는 예로부터 있었던 절터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의 한 보살상은 몸체가 길고 목걸이와 연결되어 늘어진 영락장식이 허리 위에서 교차되는 모습은 국립박물관에 있는 부여 규암리의 백제 보살상과 유사한 형식을 보인다(<그림 23>). 여유있게 웃는 얼굴 표정과 통통하고 유연한 몸체 표현 그리고 굵고 화려한 영락장식과 접혀진 裳衣 표현의 뛰어난 조각 수법은 이 상이 삼국 말기의 걸작품임을 말해 준다. 보관의 형태가 三面冠과는 다르게 중앙 부분이 높게 올라온 형태나 어깨 뒤로 늘어진 보발이 더 구체적으로 자연스럽고, 굴곡진 몸체가 입체감 있게 표현된 것은 기본적으로 隋代 말 唐시대 초기의 양식을 따르면서 한국적인 상으로 발전된 신라 말기의 상으로 생각된다.
선산에서 같이 출토된 또 다른 금동보살입상은 영락장식이 훨씬 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얼굴 표정은 앞의 상보다는 좀 더 엄숙하고 곧게 선 자세는 묵직한 조형감을 준다(<그림 24>). 보관에는 화불이 있는 관음보살상으로 복잡한 영락장식의 표현은 隋代 말의 長安派 보살상이라고 부르는 보살상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후에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의 도상으로 이어진다. 상의 뒷머리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처리, 두 어깨를 덮다시피한 천의나 치마단과 허리띠 장식 등의 세부표현이 정교하고 구체적이다. 이 보살상 역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주조기술이 뛰어나며 삼국시대 말기 금동보살입상을 대표한다.
삼국시대 말기에 속하는 불상들은 대부분 신라지역에 남아 있으며 양식으로 보면 중국의 수와 당 초기의 불상과 비교가 된다. 그러나 세부표현이 생략되고 주조기법이 미숙해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생동감이 있다. 특히 한국의 불상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거리감 없는 친근성과 권위적이지 않은 불상의 자세와 여유있게 미소 띤 얼굴 표정은 고대 한국인이 편안하게 느꼈던 이상적인 불상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7세기 삼국시대의 불상은 또한 일본의 飛鳥시대 말기와 7세기 후반인 奈良시대 전반기의 소위 白鳳조각 양식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앞서 6세기 백제로부터 전해진 불교문화의 영향은 이미 御物48체불이나 廣隆寺의 반가사유상에서 확인한 바 있으며 新瀉縣의 關山神社(세키야마 진자)의 금동 봉보주보살상이나 長野의 觀松院(칸소인)에 있는 금동 반가사유상도 한국에서 전해진 상으로 생각되고 있다.403) 법륭사에 있는 목조 백제관음상의 아름다운 자태와 미소 띤 얼굴,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솜씨를 보면 옛 백제에서 제작되었을 보살상의 분신을 보는 듯하다. 비록 백제관음상이 일본산 楠木으로 조각되었고 원래 어디로부터 온 상인지 기록은 없으나 같은 절에 있는 전형적인 止利(도리)양식의 목조 夢殿觀音像의 좀 더 엄격한 표정이나 각진 조각솜씨와 비교하면 그 표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을 한 뒤에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활약을 하였으며 새로이 중국에서 전해지는 唐 초기의 양식과 더불어 白鳳조각 양식의 성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남아있는 역사 자료나 불상 유물이 적은 삼국시대 불상의 연구에 일본의 불상과 불교문화의 연구는 우리 불교미술의 발달과 국제적인 위상을 찾아주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金理那>
399) | 大西修也,<百濟 石佛坐像-益山 蓮洞里石造如來坐像をめぐって->(≪佛敎藝術≫107, 1976), 23∼4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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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 黃壽永,<新羅 南山三花嶺 彌勒世尊>(≪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9, 909∼944쪽;≪韓國의 佛像≫, 文藝出版社, 1989, 309∼339쪽 再收錄). |
401) | 金春實,<三國時代의 金銅藥師如來立像 硏究>(≪美術資料≫36, 1985), 1∼24쪽. |
402) | 田村圓澄,<半跏思惟像の諸問題>(田村圓澄·黃壽永 編,≪半跏思惟像の硏究≫, 吉川弘文館, 1985), 1∼44쪽. |
403) | 鄭永鎬,<日本 觀松院所藏 百濟金銅半跏像-百濟 金銅佛 渡日의 一例->(≪金三龍博士華甲論文集≫, 圓光大學校, 1976), 173∼19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