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속공예의 기법과 공예품
금속공예품을 成形하는 데에는 鑄造·鍛造·板金加工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다음으로는 彫金技法·打出기법·鏤金細工·鍍金·透彫기법 등에 의하여 장식 마무리된다. 이 가운데 시대적인 흐름을 가장 알아보기 쉬운 것은 조금기법이라 할 수 있다.
조금기법은 금속기의 표면에 여러 가지의 기법으로 장식 효과를 내는 강철제 끌(鑿)의 출현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며, 철이 청동기를 지배하게 되었다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장식이 평면화하고 透彫·鍛金(打出)·鑄物에 의한 금속공예품의 표면 장식이 조금기법에 의해 다양하게 施文된다. 구체적으로는 象嵌기법, 魚子文기법, 線彫기법(毛彫기법·蹴彫기법·点線彫기법) 등으로 세분 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는 점선조기법이란 특히 운풍정으로 점을 찍어서 선을 나타내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앞면에서 눌러 찍은 경우(刺点文)와 뒷면에서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찍은 경우(錐点文)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러한 기법을 중심으로 각 왕조의 금공제 장신구를 살펴본다.
먼저 고구려의 유물로 淸岩里土城 출토 金銅製 透彫裝飾品은 투조한 다음 전면에 작은 점선문으로 장식하였고, 万寶汀 78호분 출토품 역시 투조한 다음 점선조기법으로 장식하였다. 禹山 41호분 출토 鎏金銅 菱形飾片은 화문의 가장자리를 ‘刺刻錐点’하였고, 通溝河를 끼고 万寶汀 古墳群의 건너편에 있는 山城子山城下의 출토품은 금동제 帶金具와 鳥形飾에 ‘刺点文’, ‘錐点文’으로 장식하고, 垂下飾은 毛彫의 기법으로 시문하였다.
백제의 유물인 무령왕릉 출토 금관식은 전혀 線彫의 加飾이 없으나 금동 요패와 투각한 금구 등에는 점선조의 기법으로, 은제 요패에는 투조·점선조·毛彫의 기법이 보인다. 羅州 甕棺墓 출토 금동관은 전형적인 점선조기법(刺点文)으로 外冠의 忍冬文 장식, 內冠의 화문, 帶輪의 윤곽을 이 기법으로 시문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무령왕릉 출토의 은제 팔찌이다. 왕비의 왼팔에 끼였던 것으로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돌리고 꼬리를 서로 포개서 얽힌 모습으로 팔찌의 외면을 양각하고, 팔찌의 안쪽에는 점각으로 경계를 나타내고, 안쪽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경자년 2월은 520년으로 왕비 사망 6년 전, 多利라는 장인이 왕비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어 당시의 공장들이 갖춘 격을 짐작케 한다. 또 이 多利는 일본 奈良(나라)의 法隆寺(호류지)에 전하는 삼존불의 작자로 알려진 止利(도리)와 같은 가계로 해석되고 있다.
가야의 유물인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중앙의 장식과 양옆으로 꺾여져 나온 ㄴ자형 장식에 2개의 평행선대가 있고 그 안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는데 이들은 蹴彫기법과 점선조기법으로, 파상문 사이는 강하게 점선조기법으로 점선을 찍고 있다.
일본의 東京國立博物館에 보관 중인 小倉(오구라)蒐集品 가운데 창녕지방 출토로 알려진 금동제 透彫冠飾, 湖巖美術館 소장 고령 출토 금관의 대륜에 보이는 草花形 장식은 곡옥과 瓔珞을 매달고 바탕의 윤곽에는 2개의 띠가 있고 그 사이에는 능형문을 점선조기법으로 시문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유물인 천마총·금관총·서봉총·금령총·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금관들은 출자형 立飾과 사슴뿔형의 입식을 띠(臺輪)에 세우고, 그리고 그 입식들은 각기 투각하고 그 가장자리를 점선조기법으로 시문하였다. 皇龍寺 心礎石 아래의 유물 가운데 金銅透彫板佛은 투조와 점선조기법으로, 銀製唐草文盒의 毛彫한 당초문 사이도 역시 점선조기법으로 시문하였다. 그밖에도 九黃里 舍利外函도 점선조기법으로 99基의 불탑을 나타내고, 뚜껑 안쪽에 18행 344자의 銘文을 線刻하였는데 이 글로 보아 이것의 제작 년도가 성덕왕 5년(706)임이 분명해 졌다. 분황사 석탑 사리장엄구도 장식 금구에 점선조기법이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