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신라의 금속제 기명
金製 鋺은 금관총 출토의 금제 완(6개), 서봉총 출토의 금제 완(2개), 그밖에 다른 고분들에서 보이고 있는데, 이들은 鍛造의 기법으로 器形을 만들고 口緣部는 말아서 마무리하고 있다. 황남대총 출토품의 경우는 고배 형식이며 구연부에 心葉形 纓珞을 金絲로 매달고 있다. 경주 시내 월성로 13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완과 은완의 加盤은 여러 개의 은완을 포개고 한 가운데에 금완을 포갠 것이 2組 출토되었다. 현재 은완의 부식이 심하여 몇 겹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금완은 두께 0. 04cm로 口緣部는 구부려 말아서 처리하였다. 이 加盤은 유목민족이 즐겨 사용하던 그릇의 형식으로 포개면 부피가 작아져 이동에 편리한 용기인데, 중국에서 출토된 사례가 이미 알려져 있고 후대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각 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신라에서 제작된 加盤들이 日本에 다량으로 유출되어 奈良의 東大寺 正倉院에 적지 않은 수량이 보관돼 오고 있다.
또 다른 신라의 금속제 기명으로는 청동제 합이 있다. 경주 壺杅塚에서 출토된 호우형식의 청동합은 많은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뚜껑의 손잡이가 아주 다양하여 宝珠形·十字形·새모양(鳥形) 등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고구려의 壺杅에서 영향을 받아 즐겨 만들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신라 금속제 기명으로 四耳壺을 꼽을 수 있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金銅製 四耳壺(蓋付)은 고구려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黃釉四耳壺와 흡사한 형식이나 胴徑의 크기가 거의 10㎝ 가량이나 작아진다. 형태는 풍만한 동체에서 바로 뻗어 목이 나팔꽃처럼 벌어진다. 드물게 뚜껑이 달린다. 그밖에 각배와 이상한 형식의 容器들도 보이고 있는데, 이 용기는 희랍의「Askos」라는 기름넣는 용기와 흡사하다고 알려져 있고, 각배는 유목민족의 유풍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삼국시대의 금속제기명은 주조기법이 뛰어난 사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호우는 중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형식이며, 기형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되는 銅洗도 중국과는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씩 변화를 보이고 있다. 鐎斗 역시 고구려에 들어와 중국제 보다 약간 작은 것이 만들어져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호우나 초두는 모두 고구려에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신라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널리 만들어 쓰인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신라에서는 수없이 많은 양의 호우가 풍부한 변화를 주어 가면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고구려에서 출토되는 황유사이호 보다 금관총의 금속제사이호가 훨씬 작게 만들어져 있는 것과, 好太王銘의 호우가 신라에 들어 온 후 신라에서는 그것을 모델로 하여 자그마하게 만들었던 점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 고구려의 황유사이호에서는 뚜껑이 보이지 않는데, 금관총의 사이호는 뚜껑까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뚜껑의 寶珠鈕는 신라에서 즐겨 만드는 靑銅盒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의 하나라는 점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延壽在銘盒과의 문제이다. 연대와 제작지에 대하여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 아직 고구려에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단조기법에 의한 합이라는 점에서, 또는 針刻한 명문에 비추어 고구려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