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제의 토기
백제의 토기는 수도의 위치나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초기에는 적갈색의 연질토기로 平底의 鉢이나 호·병·장경호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원삼국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해석된다. 회청색의 경질토기도 보이는데 중국 灰陶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작은 호, 球形壺, 원저호, 병, 고배 등이 있고 약간의 흑색마연토기도 있다. 백제 중기, 즉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로는 회색경질토기가 다양해지고 새로운 器種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백제 토기의 기형으로 대표되는 원저호, 삼족배, 器臺 이외에 고배, 등잔 등이 보인다. 후기에 오면 종래의 토기와 함께 중국 南朝의 영향이 보이는 장경병·虎子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특히 부여지방에서 벼루와 虎子가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청동기의 기형에서 유래하는 형식들이 보인다.
한편 시유한 陶器로서 녹색의 釉藥을 씌운 예가 보인다. 器臺·鉢·長頸甁 등이 있는데 小倉(오구라)수집품 중의 장경병은 기형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유물이다. 그밖에 백제 토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매우 정돈된 臟骨器와 陶硯의 출토이다. 장골기는 백제의 말기로, 또는 그 보다 더 후대의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어쨌든 단정하고 뒤틀림이 없는 백제계통의 토기이며 금속기의 영향을 잘 나타내고 있는 유물이다.
백제의 瓦塼은 초기 한성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그 유물은 매우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하기 곤란하다. 기록으로는 불교가 전래된 침류왕 2년(385) 이듬해에 기와에 대한 기록이≪三國史記≫에 보이고 있으나 얼마나 보급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웅진시기에는 南朝의 영향을 보이고 있으나 역시 정확한 출토나 발굴 조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 연꽃무늬의 수막새가 공산성에서 알려지고 있다. 전돌(塼)은 송산리 6호분의 “梁官瓦爲師矣”라는 명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전축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후기인 사비시대에 이르면 본격적인 기와 제작이 시작되어 연화문·巴文·인동문 등이 보이며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암·수기와, 수막새,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등 각종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이 시기의 규암리 출토 문양전은 조형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제의 窯址로는 부여 亭巖里 및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 등이 조사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