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중기 성곽
≪삼국사기≫백제본기 文周王조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성이 함락되고 蓋鹵王이 살해되자 아들 文周가 서울을 熊津城으로 옮겼다고 한다(475). 그리하여 泗沘(扶餘)로 천도할 때까지 4代 63년 동안 백제의 중흥을 도모했던 곳이 되었다. 이 성은 현재 公州市 山城洞 표고 110m의 구릉에 있다.
성의 둘레는 2,660m463)인 包谷式 산성으로 남향을 하고 있다. 성은 토성이 735m, 石城이 1,925m이다.<그림 5>의 평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퇴뫼式 토성과 석축의 포곡식 산성이 결합한 복합식 산성으로 되어 있다. 초축 당시에는 토성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할 때에 축소해서 이와 같은 양식으로 변한 것인지는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로서는 알 수 없다.
웅진성안에 있는 유적 중에서 挽阿樓址와 臨流閣址·將台址·蓮池 등이 발굴되었다.≪公山城 百濟推定王宮址調査報告≫에 의하면 이곳에서 정면 6間, 측면 4간의 남향을 하고 있는 제1건물지와 정면 5간, 측면 2간의 서향을 하고 있는 제2건물지를 확인한 바 있는데, 瓦家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3.1×1.45×0.6m의 本槨庫와 上面徑 7.3m, 底邊徑 4.78m, 높이 3m의 연못도 조사된 바 있다. 이곳을 백제시대 왕궁지로 추정하고 있는 의견이 있다.464)
웅진성 동쪽 언덕에는 800m의 퇴뫼식 보조산성이 있는데, 성안에서는 백제토기편만이 출토되고 있다. 웅진성 서쪽 언덕 위에는 약 360m의 토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안에서는 역시 백제토기편을 용이하게 수습할 수 있었으며, 1978년 지표조사 때에는 三足土器 1점을 수습한 바 있다. 그러나 土城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있어 앞으로의 정밀조사를 기대한다. 웅진성의 배후에는 錦江이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어 자연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다(<그림 5>).
웅진성(公州)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 중요 통로에 배치되어 있는 산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465)
公州-長岐-宗村-조치원 통로 : 松亭里山城, 坪基里山城, 隱龍里山城, 眞儀里山城, 唐山城
公州-正安-車嶺-조치원 통로 : 栗亭里山城, 茂盛山城(燕城), 廣亭里山城
公州-鷄龍-敬天-連山
└論山 통로 : 中壯里山城(1) (2), 陽化山城, 魯城山城
公州-錦江-扶餘의 통로 : 熊津洞山城, 萬壽里山城
公州-利仁-扶餘의 통로 : 龍城里山城, 利仁山城
公州-牛城-新豊-西海의 통로 : 丹芝里山城, 新豊山城, 鷄峯山城
└─ 靑陽 ─┘
또한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대전 동쪽에는 鷄足山城·迭峴城·陵城·葛峴城·三丁洞山城·炭峴·鷄峴城 등 신라에 대비해서 一字形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466)
463) | 安承周,≪公山城≫(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1982)에서는 2,660m로 보고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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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 | 安承周·李南奭,≪公山城 百濟推定王宮址調査報告≫(公州大 博物館, 1987). 이 의견에 兪元載(<百濟熊津城硏究>,≪國史館論叢≫ 45, 國史編纂委員會, 1993, 88쪽)도 찬동하고 있으나 필자는 熊津城 앞에 王宮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보고 한 바 있다(成周鐸,<百濟都城築造의 發展過程에 對한 考察>,≪百濟硏究≫19, 忠南大 百濟硏究所, 1988, 65쪽). 그 구체적인 예로 정면 6間, 측면 4間의 남향한 제1 건물지와 서향한 제2 건물지만으로는 왕과 왕비, 왕자 등이 거주할 內殿이나 6部 대신들이 출입하는 政廳 등이 없어 이 건물지는 宮苑址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하고 왕궁지는 城址앞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필자는 다시 지적한 바 있다(成周鐸,<百濟熊津城硏究 再齣>,≪百濟의 中央과 地方≫, 百濟硏究論叢 第5輯,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7, 299쪽). |
465) | 兪元載, 위의 글, 86∼88쪽. |
466) | 成周鐸,<大田附近古代城址考>(≪百濟硏究≫5, 忠南大 百濟硏究所, 1974). 최근에 발굴 조사된≪鷄足山城≫略報告에서는 鷄足山城은 출토 유물로 보아 6세기 중·후반경의 신라 城일 것이라고 하는 새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鷄足山城≫略報告, 忠南大 박물관,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