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후기 성곽(사비도성)
≪삼국사기≫백제본기 聖王 16년조에 의하면 왕은 泗沘(所夫里)로 서울을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 부여읍을 중심으로 한 城址들이다. 백제 泗沘都城은 왕이 거주하던 王宮址(內城)와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축조된 羅城(外廓), 그리고 동쪽 나성과 연결된 靑山城, 왕궁 배후에 축조된 扶蘇山城 및 나성밖에 위치하고 있는 靑馬山城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6>).
가) 왕궁지
도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권력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왕궁일 것이다. 그런데 백제 사비시대의 정확한 왕궁지는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의 조사 결과로 부소산성 南門址 바로 앞에 위치한 전 부여박물관 부근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충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전 부여박물관 앞 광장에서 백제시대의 瓦製排水口와 깊이 1.2m의 석축 연못을 확인했고, 백제 유물도 다수 수습한 바 있다. 1987년에서 1990년도에 이르는 조사에서는 동서 25m, 폭 9∼10m의 교차하는 백제시대 도로와 우물터, 石築排水路, 축대, 건물토의 기단부분이 발굴 조사되어서 사비도성 내의 시설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역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周書≫百濟傳에 의하면 도성은 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의 五方制로 통치했다고 하며,≪隋書≫百濟傳에는 畿內에 五部가 있었고, 部에는 五巷이 있어서 士人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자료로서 左卩·中卩·上卩乙瓦를 비롯해서 ‘前部’銘의 표석이 출토된 바 있다. 이 五方制가 자연부락 단위로 형성되었는지 條坊制로 이루어졌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467)
나) 나성
백제 사비도성의 외곽을 이루고 있는 토성이 백제시대 羅城이다. 나성은 부소산성의 동쪽에 있는 東門址 북쪽편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둘레 약 500m의 靑山城을 지나 石木里를 통과하고 있다. 이곳에는 부여에서 公州로 통하는 도로가 나 있는데, 이 부근에 北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성은 石木·陵山里의 구릉지대를 거쳐 鹽倉里의 금강까지 이어지고 있다. 능산리는 백제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부여에서 論山으로 통하는 국도가 있다. 최근 나성과 백제 고분군 사이에 있는 논에서 백제 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금동향로와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丁亥妺兄公主供養舍利”가 새겨진 舍利龕이 수습되어 이곳이 舍刹 혹은 陵寺로 추정되는 건물지이며, 그 시기는 ‘567년’이라고 하는 절대연대를 얻게 되었다. 이 출토물의 연대는 나성 축조연대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468) 나성이 잘 남아 있는 곳은 상변 4m, 높이 5.2m, 저변 13m 정도인데, 토성은 단순히 盛土技法에 의존해서 축조한 부분과 판축기법에 의존해서 축조한 부분도 있으며 炭火木層도 확인된 바 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지에서 시작해서 官北里·舊校里·東南里·軍守里·城末里까지 이르고 있다. 서쪽 나성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파괴되어 없다. 성의 둘레는 약 8㎞이다. 남쪽 나성만 있다면 圓形에 가까운 형태이다. 나성 안에는 사방에 연못이 있어서 성안에서 배출하는 流水를 일단 貯水시킨 후 강으로 흘러 들어가게 처리하고 있다. 이것은 유수를 저수해서 濠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으로 판단되며 그 대표적인 것이 宮南池라고 할 수 있는데, 궁남지는 武王 35년(634)에 축조되었다고≪삼국사기≫는 전한다.469)
다) 부소산성
부여읍 배후에는 표고 110m의 부소산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시대 축조한 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현지 지명을 따라서 扶蘇山城이라 부르고 있다. 부소산성의 남쪽 토루는 표고 70∼80m의 능선을 따라서 축성하였고, 북쪽은 북문지와 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표고 10m의 지점까지 쌓았는데 그 둘레는 2,495.60m이다. 따라서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공주 웅진성과 같은 지형이다.
부소산성에는 세칭 軍倉址가 있는데 군창지를 중심에 두고 남쪽은 표고 70m, 북쪽은 표고 80∼90m의 등고선을 따라서 퇴뫼式 산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둘레는 1,400m이다. 또 하나의 테뫼식 산성은 서쪽에 있는 泗沘樓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800m이다.
성의 남쪽과 서쪽에 있는 두개의 테뫼식 산성 외곽을 연결해서 조성된 것이 포곡식 산성이다. 퇴뫼식 산성에 포곡식 산성을 증축해서 복합식 산성이 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 동안에는 두개의 테뫼식 산성이 선행해서 축조되고 후에 포곡식 산성이 증축되어 복합식 산성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견해를 내 놓은 바 있으나, 군창지 소재 테뫼형 산성의 내측 성벽과 사비루 소재 퇴뫼형 산성의 내측 성벽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명되어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고, 군창지 소재 테뫼형 산성 중앙에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 196m의 토루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포곡식 산성이 백제시대에 축조되고, 내측 성벽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으며, 196m의 토루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져, 이제까지 알려진 반대의 순으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조성 시기는 추정 동문지 조사 때 ‘大通(527∼528)’ 印刻銘瓦가 출토되어 백제가 서울을 웅진으로부터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1981년 2차에 걸쳐서 군창지 소재 테뫼형 산성 안에 있는 건물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북쪽의 건물터에서는 炭化麥이 출토되고 남쪽 건물터에서는 팥, 동쪽 건물터에서는 철제열쇠와 토기 등이 출토되어 이들 4개소의 건물터는 창고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470)
라) 청마산성
靑馬山城은 扶餘邑 陵山里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동쪽 나성에 인접해서 축조된 백제시대 가장 큰 석축 포곡식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6.5㎞, 면적은 2,581.504㎡이다. 서쪽의 성벽 일부는 높이 4∼5m, 폭 3∼4m 정도이다. 이 성 안에는 濠가 있고, 성벽은 기초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잡석을 많이 넣고 축조하였다. 지형이 서쪽만 낮기 때문에 수구와 성문이 이 부근에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 산성은 백제 사비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유사시에 官·軍·民이 성에 들어와 대적할 목적으로 축조된 산성으로 판단된다. 이제까지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산성이다.471)
마) 사비도성의 주변 산성
백제는 서울인 사비도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많은 산성을 축조하고 있다. 충남지역에만 약 220여 개소의 산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산성들은 대부분 백제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
사비도성인 부여를 중심으로 해서 서쪽 금강을 건너면 浮山城과 蔚山城 등 조그만 터뫼식 산성이 있고, 그 외곽으로 남쪽에는 石城山城이 있다. 이 산성은 둘레 약 1.5㎞의 복합식 산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도 서울의 최후 방비선으로 알려져 있다.472)
聖興山城은 扶餘郡 林川面에 있는데, 일명 ‘加林城’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둘레는 약 600m이며, 대부분이 토축이고 일부 석축이 남아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 터로 알려져 있다.
聖興山城에 대한 東門址 조사가 최근 이루어져서 조사 보고된 바 있으며, 성의 둘레는 800∼1,200m까지 보고자마다 다르다.473)
甑山城은 부여 북쪽 약 4㎞ 떨어진 곳에 있는 테뫼형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5∼600m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474) 이 세 城은 서로 연결되는 외곽성이다. 扶餘 동쪽 약 20㎞ 떨어진 連山面 황산벌은 백제 최후의 격전지였다. 이 전적지 동·남쪽에는 산의 능선을 따라 黃嶺山城·山直里山城, 新興里山城과 중간에는 2개소의 보루를 배치하고 있다. 앞서 대전 동쪽에 배열해서 축조한 線의 산성 배치와 같은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467) | 成周鐸,<百濟 泗沘都城 三齣>(≪百濟硏究≫28,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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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 | ≪화강석재 사리감≫(국립부여박물관, 1995). 朴淳發,<百濟都城의 變遷과 特徵>(≪韓國史의 理解≫, 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 1996), 128쪽. |
469) | 成周鐸, 앞의 글(1998) 참조. |
470) | 成周鐸, 위의 글. 尹武炳,<百濟王都泗沘城硏究>(≪學術院論文集≫人文社會學編 33, 1994). 朴淳發,<百濟都城의 變遷과 特徵>(≪韓國史의 理解≫, 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 1996). 沈正輔,<百濟泗沘都城에 築造時期에 대한 一考察>(≪東北아시아 古代都城≫, 東亞大 박물관, 1996).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扶蘇山城≫硏究叢書 第14輯, 1997. |
471) | 成周鐸, 위의 글. |
472) | ≪文化財大觀(史蹟篇)≫下(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976), 82·126·180쪽. 成周鐸,<百濟山城硏究>(≪百濟硏究≫6, 忠南大 百濟硏究所, 1975), 100쪽. |
473) | 위의≪文化財大觀≫, 62쪽. ≪聖興山城≫(忠南發展硏究院·忠淸南道, 1996). |
474) | 위의≪文化財大觀≫, 18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