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왕성
가) 금성
史書에 나오는 최초의 궁성은 ‘金城’이다.≪삼국사기≫赫居世 21년조에 “궁성을 축조하여 금성이라 불렀다”고 하여 그 축조 연대가 B.C. 37년임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 규모는 1,023步라고 하므로 매우 작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금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삼국사기≫및≪東京雜記≫의 기록476)에 근거하여 月城의 서북쪽 내지는 閼川부근으로 보는 견해477)이다. 둘째, 금성은 왕의 거처에 대하여 사용된 보통 명사적인 명칭이거나 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478)이며, 셋째는 경주평야의 남쪽 현 校洞근처로 비정하는 견해479) 등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앞으로의 고고학적인 연구성과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문헌자료에 근거를 둔다면 월성과는 다른 금성의 존재를 살펴 볼 수 있다. 금성 내에는 逸聖尼師今 5년(138)에 설치한 政事堂이 있어 정치의 중심이 되었으며 사방에는 성문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성벽은 흙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나) 월성
금성이 축조된 후 130년이 경과한 婆娑尼師今 22년(101)에 月城이 축조되었다고 한다.480) 월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행정구획상 慶州市 仁旺洞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는 인왕동과 校洞을 흐르는 蚊川 북안의 자연구릉에 積心土築으로 축조하였다. 그 형태가 半月形을 하고 있어 ‘半月城’이라고 불려지고도 있으며, 또한 ‘在城’으로도 불려졌다.481) 규모는 동·서 너비 900m, 남·북 길이 260m 정도이며, 성벽의 길이는 1,841m이고, 성안의 면적은 183,600㎡(55,600평)482)이다. 현재 성안에는 石氷庫와 慶州昔氏 시조를 모시는 崇信殿이 있다.
월성은 1915년부터 수 차례에 걸쳐 단면이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 토기편·鐵滓·骨製具 등이 출토483)되었다. 그리고 동북문지 동편 성벽의 45㎝ 아래 횡단면에서는 자연석렬이 산재하고 있어 축성시에 보강재로 자연 석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484) 그리고 1985년도에는 월성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추정 동문지와 안압지 사이에 축석에 의한 垓字 시설이 있었음이 확인485)되었다. 성안의 시설물로는 門址들을 비롯해서 宮殿址·橋樑址·연못터 등이 확인되었다(<그림 7>).
다) 조방제
신라에는 도시를 둘러싼 성곽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王城을 중심으로 條坊制가 실시되고 있었다. 즉,≪삼국사기≫자비마립간 12년(469)조에 보면 “京都의 坊里名을 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늦어도 자비마립간 12년에는 조방제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소지마립간 9년(487)에 취해진 郵驛의 설치, 官道의 수리와 같은 왕도의 정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왕도는 소지마립간 10년(488) 월성으로의 移居를 전후하여 1차적으로 정비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왕도의 정비는 360坊, 35里(55里)라고 하는 조방제로 완비486)되었다. 조방은 시가지를 종횡으로 관통하는 도로로 구획되었으며, 1개의 규모는 동·서 약 160m, 남·북 약 140m(또는 160m)의 方眼形487)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그림 8>).
476) | ≪東京雜記≫권 1, 城郭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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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 | 金秉謨,<都市計劃>(≪歷史都市慶州≫, 悅話堂, 1984), 128쪽. 李元根,≪三國時代 城郭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80), 350∼351쪽. |
478) | 尹武炳,<역사의 도시 경주의 보존에 대한 조사>(≪文化財의 科學的 保存에 관한 硏究≫1, 科學技術處, 1972), 127∼128쪽. 朴方龍, 앞의 글, 341∼342쪽. |
479) | 藤島亥治郞,<朝鮮建築史論>其一(≪建築雜誌≫ 44-530, 1930), 12쪽. 李鍾旭,≪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一潮閣, 1980), 57∼59쪽. |
480) | ≪三國史記≫권 1, 신라본기 1, 파사니사금 22년조. 그런데 성벽 서남부 아래층에서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류가 출토되어 월성의 축조를 그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東潮·田中俊明,≪韓國の古代遺蹟≫1, 新羅篇, 中央公論社, 1988, 235∼237쪽). |
481) | 월성에서 ‘在城’銘 와당이 출토되었다(≪朝鮮古蹟圖譜≫5, 朝鮮總督府, 652쪽). 최근 월성 조사 때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第八巷……」명문 목간이 출토된 바 있다(金昌鎬,<古新羅의 都城문제>,≪新羅王京硏究≫, 신라문화선양회, 1995, 94∼95쪽). |
482) | 閔德植,<新羅의 慶州 月城考>(≪東方學志≫66, 延世大, 1990), 3∼4쪽. |
483) | 有光敎一,<慶州月城·大邱達城の城壁下遺蹟について>(≪朝鮮學報≫14, 1953), 490∼497쪽. |
484) | 張慶浩,<統一新羅時代의 宮殿建築>(≪考古美術≫162·163, 1984), 42∼43쪽. |
485) | 文化財硏究所,≪月城垓字試掘調査報告書≫, 1985. |
486) | ≪三國史記≫권 34, 잡지 3, 지리 1 및≪三國遺事≫권 1, 진한조. 이와 관련하여 1360坊 55里를 인정하는 견해(藤島亥治郎, 앞의 글, 91∼106쪽;閔德植,<新羅王京의 都市設計와 運營에 관한 考察>,≪白山學報≫33, 1986, 15∼16쪽)와 왕도의 지역 구분을 坊, 王畿지역의 행정구획이 里라고 하는 견해(李鍾旭,<新羅下代의 骨品制와 王京人의 住居>,≪新羅文化≫7, 東國大 新羅文化硏究所, 1990, 177∼179쪽) 등이 있어서 앞으로의 진전된 연구를 기대한다. |
487) | 尹武炳,<新羅王京의 坊制>(≪斗溪 李丙燾博士 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成周鐸, 앞의 글(1994) 54∼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