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산성
신라 왕도에 외곽성인 羅城의 축조가 없었던 것은 지형상 하천과 주위에 산이 둘러싸여 있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고, 주위에 山城을 축조하여 나성의 역할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에서의 구체적인 축성 기록은≪삼국사기≫에 파사니사금 8년(87)조의 加召·馬頭 2성의 축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王都를 수호하기 위하여 왕도 주위에 축조한 산성들이다.
가) 명활산성
明活山城은 普門洞과 千軍洞에 위치하고 있는 明活山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다. 주로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이 산성은 토성과 석성의 2개로 구성된 복합식 산성이다. 토성의 성벽 길이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석성은 4.5㎞ 정도라고 한다. 석성 안에는 문지·수구지·건물지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신라시대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명활산성은 자비마립간 18년(475)부터 소지마립간 10년(488)까지 13년 동안 왕의 居城으로서의 역할을 한 바도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明活山城作成碑488)가 발견되어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 남산신성
南山新城은 왕궁이 월성으로 옮겨지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 성이 위치한 南山(표고 468m)은 경주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佛國淨土로 불려질 정도로 신라시대의 佛蹟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3.7㎞이다.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 13년(591)에 처음으로 축조하였으며, 문무왕 19년(679)에 크게 수축하였다고 한다. 시설물로는 문지·망대지·수구지 등을 비롯하여 성안에는 큰 창고지 3개소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南山新城碑가 8기 발견되었다. 이 비문의 내용은 성을 축조함에 있어서 3년 이내에 파손될 경우 공사 담당자들이 벌을 받을 것을 서약하고 관직·인명·출신부명·담당한 성벽길이 등을 기록489)하고 있다.
다) 서형산성
西兄山城은 경주시 西岳洞 仙桃山(표고 380m)에 위치한 석축산성이며, 둘레는 2.9㎞에 달하는 테뫼식 산성이다.≪삼국사기≫진평왕 15년(539)조에 의하면, 명활산성과 함께 개축하였다고 되어 있어 그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축성 목적은 서쪽으로부터의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며, 주로 백제와의 관계에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성내에는 별다른 시설물 유적이 없다.
라) 북형산성
北兄山城은 경주에서 포항으로 국도를 따라 가면 北兄山에 이르게 되는데 행정구역으로는 경주군 江東里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축조가 문무왕 13년(673)490) 羅·唐戰爭이 치열했던 시기이므로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삼국시대 기와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문무왕 13년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시설물로는 문지·건물지·연못터 등이 있다. 특히 북형산은 中祀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으며,491) 현재 玉蓮寺가 있다.
마) 부산성
富山城은 경주군 乾川邑에서 서편에 표고 729.5m의 富山(五臺山)에 축조한 둘레 약 7.5㎞, 성내 면적 약 100만 평에 달하는 석재로 夾築한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시설물로는 문지 4개소, 건물터 6개소, 우물·연못터·암문지·雉城 등이 있다.
문무왕 3년(663)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유물로는 신라시대 기와편과 토기편을 비롯해서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다. 또한 부산성은≪三國遺事≫효소왕대의 竹旨郞조에 의하면 得烏谷이 倉直으로 부역하였던 곳이다.492)
바) 삼년산성
三年山城은 報恩邑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漁巖里와 城舟里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표고 325m의 烏頂山 위에 석재로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조하였다고 하며 3년 동안 공사를 하였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축성 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산성으로 유명한 성 가운데 하나이다. 성의 둘레는 1,680m, 성벽의 높이는 10∼20m, 폭은 5∼8m로 內外夾築의 석축산성493)이다. 내부의 시설물로는 수구지·문지·突出部(치성역할)·장대지·건물터·우물터 등이 남아있다.494)
유물로는 신라시대의 기와편·토기편, 고려·조선시대의 자기편 등이 출토되고 있다. 백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나아가서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 축조한 신라의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다.
사) 달성
達城은 대구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달성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규모는 동·서 약 380m, 남북 470m이고, 성벽의 둘레는 1,300m이다. 성벽은 일부 자연 지형을 이용한 곳도 있으나 土·石混築을 하고 있다. 성벽 하부에서는 金海期의 포함층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495) 이때의 성곽시설은 ‘啄國’의 왕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496) 그러나≪삼국사기≫에 의하면 점해니사금 15년(261)에 “達伐城을 축조하여 奈麻克宗으로 城主를 삼았다”497)라고 하여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의 중심지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88) | 朴方龍,<明活山城作成碑의 檢討>(≪美術資料≫41,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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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 | 秦弘燮,<南山新城碑의 綜合的 考察>(≪歷史學報≫26, 1964). |
490) | ≪三國史記≫권 7, 신라본기 7, 문무왕 13년 9월조에 風原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 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
491) | ≪三國史記≫권 32, 雜誌 1, 祭祀. |
492) | ≪三國遺事≫권 2, 紀異 2, 효소왕대 죽지랑. |
493) | 成周鐸,<新羅三年山城硏究>(≪百濟硏究≫7, 忠南大 百濟硏究所, 1976). |
494) | 이 산성의 西門址는 1980년도 발굴 조사되어 보고된 바 있다(報恩郡,≪三年山城西門址調査槪報≫, 1980). |
495) | 有光敎一, 앞의 글, 498∼502쪽. |
496) | 尹武炳,<山城·王城·泗沘都城>(≪百濟硏究≫21,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0), 8쪽. |
497) | 成周鐸, 앞의 글(1994), 56∼58쪽. |